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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거목과 대지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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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하층부에서부터 밀려오는 횃불의 불빛은 잔인할 정도로 붉었다. 쇠사슬이 거친 화강암 바닥을 쓸며 내는 금속음이 벽면에 부딪혀 기괴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블랙스톤 길드의 행동대장, 강철두와 그 사냥꾼 무리였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와 탐욕의 파동은 내 영혼 코어의 외벽을 따갑게 찔러왔다.


[위험: 적대적 침입자 접근 중. 거리는 약 45m.]

[현재 코어 잔여 마력: 12%]


마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 상태에서 무장한 인간 헌터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나는 제단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웅크리고 있는 강철발과 고블린 부족원들을 향해 급히 ‘생명 공감 텔레파시’를 보냈다.


‘강철발, 부족원들을 데리고 제단 뒤편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공동으로 대피해라. 돌봄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지켜야 한다. 어서!’


내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자 강철발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 의지에 담긴 단호함과 자애로움을 느꼈는지, 그는 가슴을 두드리며 짧게 끄덕였다.


“크르릉! 끄아악!”


강철발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굶주림으로 지친 고블린들을 다급히 다독였다. 고블린들은 임산부인 돌봄이를 부축한 채, 어두운 동굴 구석에 나뭇잎과 흙으로 급조해 둔 그들의 첫 보금자리, ‘초록 둥지’ 안쪽의 깊은 바위 틈새로 신속하게 숨어들었다.


아이들이 안전한 곳으로 숨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마력 실가닥을 사방으로 뻗어 주변 지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 권능이 미치는 범위는 F+급 등급의 한계인 반경 50m. 이 좁은 영역 안에서 강철두 일당의 진입 경로를 물리적으로 차단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동굴의 서쪽 통로…….’


내 마력 가닥이 서쪽의 가파른 암석 지대 구석에 도달했을 때, 내 영혼의 감각이 기묘한 위화감을 감지했다. 그곳은 인간들의 무분별한 발파 작업과 사막화로 인해 먼지만 흩날리던 황량한 골짜기였다. 그런데 그 황토 먼지 너머 깊은 어둠 속에서, 꺼져가는 생명의 미약한 신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마력의 시선을 그곳으로 집중했다. 뿌연 황토 먼지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것은 나무였다. 높이가 3m에 달하는 거대한 바오밥 나무 형상을 한 존재. 그러나 잎사귀는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고, 두꺼운 줄기는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처참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줄기 표면의 사람 얼굴을 닮은 커다란 옹이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굳어 있었다.


고대 바오밥 나무 정령, ‘바움’이었다.


바움은 이 던전 1층의 지반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던 식물계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인간들이 하층부의 수맥을 강제로 틀어막고 오염시키면서, 뿌리로 흡수할 수분이 완전히 고갈되어 소멸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학자로서의 직관이 뇌리를 때렸다. 바움의 나이테가 완전히 마르고 줄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었다. 바움의 거대한 뿌리들은 천장의 거대한 화강암반을 지탱하는 천연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만약 바움이 이대로 말라 죽어 쓰러진다면, 그 위에 얹혀 있는 수십 톤의 동굴 천반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릴 터였다.


그리고 그 천반이 무너지는 붕괴 낙하 지점은 바로 고블린들이 숨어 있는 ‘초록 둥지’의 바로 윗부분이었다.


바움이 쓰러지면 초록 둥지는 물론이고, 내 영혼이 깃든 코어 룸의 외벽까지 통째로 매몰될 위기였다.


“저기 고블린 흔적이 있다! 횃불 더 밝혀!”


동굴 동쪽 통로에서 강철두의 거친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횃불의 그을음 냄새가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시간이 없었다. 침입자를 막는 것보다, 바움을 살려 지반을 고정하는 것이 던전 전체의 생존을 위한 최우선 과제였다.


‘바움을 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수분이 필요해.’


나는 대지 깊은 곳을 향해 마력 실가닥을 수직으로 길게 뻗었다. 흙 속의 미세한 수분 입자들이 느껴졌지만, 바움을 소생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더 깊은 곳, 지하 수십 미터 아래에 흐르는 고대 지하수맥의 본류를 자극해야 했다.


나는 F+급 코어의 미세 간섭 권능을 한계까지 쥐어짜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의 코어가 격렬하게 회전하며 열기를 뿜어냈다. 영혼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지만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내 마력 가닥들이 땅속 깊은 암반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 요동치는 수맥의 벽을 거칠게 두드렸다.


‘이쪽이다! 대지의 젖줄이여, 위로 솟구쳐라!’


수맥을 가로막고 있던 고대 점토층을 마력 가닥으로 긁어내며 물길의 방향을 강제로 뒤틀었다. 수압이 급격히 상승하며 지하수가 대지의 균열을 타고 바움의 뿌리가 있는 서쪽 암반 지대로 무섭게 역류하기 시작했다.


꾸르르릉—!


동굴 바닥이 무겁게 진동했다. 지진이 일어난 듯한 진동에 동쪽에서 오던 강철두 일당의 발걸음이 멈칫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이! 이게 무슨 소리야? 지반이 흔들리는데?”

“다이너마이트 발파 여파인가? 조심해!”


하지만 기뻐할 틈은 없었다. 급격한 수맥 이동으로 인한 수압의 충격이 메마른 대지의 기맥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동굴 천장의 화강암반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끔찍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콰과과과광—!”


천반의 약한 부위가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집채만 한 바위 더미와 날카로운 낙석들이 고블린들의 보금자리인 ‘초록 둥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둥지 안쪽에서 고블린 아이들의 비명과 돌봄이의 절박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낙석이 그대로 쏟아진다면 부족 전체가 흔적도 없이 으스러질 판이었다.


‘안 돼!’


나는 본능적으로 마력 가닥을 뻗어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낙하하는 돌의 엄청난 질량과 가속도에 내 마력 가닥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툭툭 끊겨 나갔다.


“윽……!”


영혼의 중심부가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내상이 덮쳐왔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코어의 빛이 급격히 흐려졌다. 정면으로 맞서 막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질량과 중력의 법칙을 마법적인 힘만으로 억누르기엔 내 등급이 너무 낮았다.


‘생각해라, 박민우. 너는 생태학자다. 물리적 충격을 완화할 방법을 찾아!’


찰나의 순간, 내 시선이 둥지 바닥을 뒤덮고 있는 두꺼운 황토 진흙 지대에 닿았다. ‘1층 동굴 황토’. 수많은 미생물과 정령의 기운이 섞여 있는, 점성이 매우 높은 대지의 기본 토대였다.


‘힘으로 막을 수 없다면, 충격을 흡수하면 된다!’


나는 코어의 남은 에너지를 오버클럭하여 F+급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지의 권능을 강제로 이끌어냈다. 영혼 코어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차가운 마력이 역류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지반 유동화’의 주문을 대지에 투사했다.


[경고: 허가되지 않은 상위 권능 강제 가동.]

[코어 내구도가 미세하게 하락합니다.]

[‘지반 유동화(Mud Fluidization)’ 권능이 일시적으로 구현됩니다!]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둥지 바닥의 황토 지대가 순식간에 끓어오르는 호수처럼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황토 입자 사이의 마력 결속이 이완되며, 대지가 거대한 점토 수렁이자 천연 완충 매트로 변모했다.


동시에 나는 낙석들이 떨어지는 궤적의 공기 흐름을 미풍으로 조율하여 미세하게 굴절시켰다.


“콰아아앙—!”


집채만 한 바위들이 초록 둥지 바로 옆 황토 수렁 위로 사정없이 추락했다. 하지만 상상했던 끔찍한 뼈 부서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낙석들은 단단한 암반에 부딪혀 깨지는 대신, 고도의 점성을 지닌 부드러운 황토 모래늪 속으로 ‘푸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깊숙이 가라앉았다. 수렁이 낙석의 엄청난 운동 에너지를 부드럽게 흡수하며 사방으로 진흙을 튀겼을 뿐이었다. 고블린들의 움집 두 동이 진흙 범벅이 되어 파손되었지만, 다친 고블린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크으으…….”


대피소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강철발이 떨리는 눈으로 진흙 속에 완전히 박혀버린 거대한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대지가 자신들을 살렸음을 깨달은 고블린들의 눈에 경외감이 서렸다.


지반 붕괴의 충격을 완충하는 것과 동시에, 내가 아래에서 끌어 올린 지하수맥의 거센 물줄기가 마침내 서쪽 구석의 메마른 대지를 뚫고 솟구쳤다.


“콰아아아—!”


맑고 차가운 수자원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사막화되어 가던 황토 벌판을 적셨다. 그리고 그 물길의 중심에 서 있던 수호목 바움의 뿌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갈증에 시달리던 고대의 뿌리들이 갈라진 대지 틈새로 뻗어 나와 물줄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모세관 현상을 타고 차가운 생명수가 바움의 두꺼운 몸통을 거쳐 메마른 가지 끝까지 초고속으로 타고 올라갔다.


바스스스—.


바움의 갈라진 회색 껍질 사이로 황금빛 마력의 수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옹이 얼굴이 서서히 평온하고 자애로운 미소로 펴졌다. 마른 나뭇가지마다 에메랄드빛 새싹이 돋아나더니, 이내 눈부신 황금빛 잎사귀들이 폭발하듯 피어나며 웅장한 왕관 같은 수관을 형성했다.


[알림: 고대 수호목 ‘바움’이 기적적으로 소생하였습니다!]

[바움의 뿌리가 던전 1층 서쪽 지반을 단단히 고정합니다. 물리 방어력의 기초가 확립되었습니다.]


부활한 바움은 줄기를 곧게 세우며 우뚝 일어섰다. 그 거대한 뿌리들이 동굴 천장을 단단히 움켜쥐자, 조금 전까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동굴 전체의 진동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완벽한 물리적 안정이었다.


하지만 감동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수맥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이동한 여파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바움이 빨아들이고 남은 수류의 일부가 지하 지층의 갈라진 틈새를 타고 더 깊은 곳, 인간들이 무단으로 파괴해 놓은 동굴 하층부의 블랙스톤 채굴지 영역까지 흘러 들어간 것이다.


꾸르륵, 쿠르르.


동굴 하층부와 연결된 바위 틈새에서 기분 나쁜 수압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코를 찌르는 지독한 화학 약품 냄새와 썩은 유기물의 악취가 동굴 공기 중에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바위 틈새에서 솟구쳐 나오기 시작한 것은 투명한 지하수가 아니었다. 인간들이 채굴 과정에서 무단으로 버린 기름때와 중금속, 그리고 정체불명의 폐기물이 섞여 시커멓게 썩어버린 검은 오염수였다.


검은 오염수는 독극물 안개를 피워 올리며, 던전 생물들의 유일한 식수원이자 생명줄인 중앙 오아시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흘러내려 가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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