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초록 피부의 피난민들
빛을 되찾은 푸른 정원 너머, 어두운 동굴 통로의 끝에서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타다닥, 타다다닥!”
축축한 흙바닥을 거칠게 내딛는 기괴한 발소리가 동굴 벽면에 부딪히며 메아리쳤다. 제단 주변에 이제 막 피어난 야광 버섯의 은은한 푸른빛이 흔들렸다. 갓 발아한 균사체들이 내뿜는 달콤하고 맑은 마력의 향취가 바람을 타고 동굴 통로 깊은 곳까지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록색 피부를 가진 왜소한 괴물들, 고블린 무리였다.
하지만 내가 현대 지구의 판타지 소설이나 헌터 학술지에서 보았던 교활하고 사악한 괴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의 꼴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 사막화로 인해 갈라진 피부, 그리고 굶주림에 지쳐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그들은 침략자가 아니라, 붕괴하는 던전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매던 ‘피난민’들이었다.
“키에에엑! 끄으으……!”
무리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단단한 가죽 갑옷을 걸친 고블린, ‘강철발’이 이빨을 드러내며 야광 버섯 군락을 향해 돌격했다. 그의 눈은 굶주림으로 인한 극심한 광포화 상태에 빠져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삼십여 마리의 고블린들 역시 이성을 잃고 오직 눈앞의 푸른 버섯들을 뜯어먹기 위해 폭주하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어렵게 복원한 야광 버섯 군락지가 순식간에 파헤쳐져 사막화 정화율이 다시 제로로 가라앉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들을 몰살해야 하는가? 내 코어의 잔여 마력은 겨우 15%. 전투용 함정을 발동할 마력도 부족할뿐더러, 생태학자로서 무분별한 학살은 내 신념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이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생태계의 일원으로 포섭해야 한다.’
나는 즉시 내 영혼의 권능인 ‘생명 공감 텔레파시’를 가동했다. 실체 없는 푸른 불꽃에서 뻗어 나간 무형의 마력 가닥들이 돌격하는 고블린 무리의 뇌파에 가만히 접촉했다.
그 순간, 내 의식 속으로 지독할 정도의 고통이 밀려들었다.
- 배고파. 아파. 타들어 갈 것 같아. 살려줘.
그것은 날것 그대로의 굶주림이었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레이드로 던전 상층부의 초식 몬스터들이 씨가 마르자, 이 하급 잡식 몬스터들은 동족상잔의 위기까지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 고통의 선율 속에서, 유독 처절하게 찢어지는 비명이 내 영혼을 흔들었다. 무리의 후방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달리던 암컷 고블린 하나가 털썩 주저앉으며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임산부 고블린, ‘돌봄이’였다.
starvation(기아)으로 인해 영양 상태가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무리한 기동을 한 탓에, 그녀는 심각한 유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녀의 배 속에서 꺼져가는 작은 생명의 불꽃이 내 코어의 파동과 공명했다. 돌봄이는 마른 흙을 손톱이 깨지도록 움켜쥐며 비장하게 신음했다. 강철발이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며 울부짖었으나, 그의 뇌파 역시 광포화의 붉은 안개에 잠겨 있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몬스터 비살상 제압 수칙을 적용한다.’
나는 전임자 그린디르가 남긴 일지의 공식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연산했다. 물리적인 장벽이 없는 지금, 이들을 멈출 유일한 방법은 야광 버섯 자체의 진정 성분을 극대화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코어의 마력을 짜내어 ‘정화의 미풍’ 권능을 시전했다.
스으으으.
제단 주변의 공기가 부드럽게 요동치며 따뜻한 대류가 형성되었다. 나는 미풍의 결을 조율하여 야광 버섯들의 갓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버섯 끝자락에서 미세한 에메랄드빛 진정 포자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공기 중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는 정밀한 기류 제어로 이 포자 안개를 돌격하는 고블린들의 호흡기를 향해 정확히 유도했다.
“쿠우…… 끄으으?”
포자 안개를 들이마신 고블린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뇌를 지배하던 핏빛 광포화의 안개가 야광 버섯의 진정 성분에 의해 부드럽게 씻겨 내려갔다. 강철발의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서서히 맑은 은색으로 돌아왔다. 고블린들은 취한 것처럼 제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폭력 본능을 잠재웠으니, 이제는 그들의 근본적인 굶주림을 해결해 줄 차례였다.
나는 마력 실가닥을 뻗어 제단 뒤편에서 자라난 가장 크고 영양이 풍부한 영양 야광 버섯 한 송이를 부드럽게 꺾었다. 그리고 미풍에 실어 쓰러져 신음하는 돌봄이의 코앞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먹어라. 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내 따뜻한 의지가 담긴 텔레파시가 돌봄이의 머릿속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돌봄이는 떨리는 손으로 푸른 빛을 발하는 버섯을 쥐고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갔다. 맑은 정화 마력과 영양분이 그녀의 메마른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그녀의 뒤틀린 마력 회로가 안정을 찾았고 배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꺼져가던 태아의 불꽃이 다시 힘차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르르…… 끄아아…….”
강철발은 그 모든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무형의 위대한 의지가 자신들을 학살하는 대신, 진정시키고 심지어 반려자와 배 속의 아이를 살려주었다는 사실을.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무딘 나무 몽둥이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내 영혼의 코어가 빛나는 제단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단단한 이마가 차가운 흙바닥에 닿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삼십여 마리의 고블린 피난민들 역시 일제히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어둡던 동굴 안이 고블린들의 경외감 어린 침묵으로 가득 찼다.
[알림: 고블린 부족이 던전의 의지체에 깊은 경외와 충성을 바칩니다.]
[던전 자치 세력 ‘초록둥지 고블린 자치회’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정화 마력의 순환 효율이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내 가슴속에 묵직한 책임감과 함께 묘한 성취감이 피어올랐다. 이들은 단순한 사냥감이 아니다. 이 던전의 생태계를 함께 가꾸어 나갈 첫 번째 소중한 식구들이었다.
그러나 평화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키이이이익—!”
천장에 매달려 있던 정찰 박쥐 ‘초음파’가 고주파의 비명을 지르며 내 의식을 강하게 때렸다.
동굴 하층부,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붉고 노란 횃불의 불빛들이 기괴하게 흔들리며 다가오는 것이 감지되었다. 쇠사슬이 쓸리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거친 인간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쪽이다! 고블린 냄새가 나니까 서둘러! 한 마리당 마석 한 개씩이니까 싹 다 잡아들여!”
불법 채굴꾼 ‘블랙스톤’ 길드의 행동대장 ‘강철두’가 이끄는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이 고블린 부족을 학살하고 마석을 짜내기 위해 횃불을 든 채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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