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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 없는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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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지하 깊은 곳, 습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보랏빛 안광들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재상 바르톨로메오가 보낸 사설 정보부 ‘검은 뱀’의 정예 살수들, 일명 ‘그림자 이빨’이었다. 그들이 쥔 단검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암흑 마력이 좁은 통로를 가득 메웠다.


“죽여라. 흔적도 남기지 말고 소멸시켜라.”


살수장의 차가운 명령과 함께 서너 명의 자객들이 소리도 없이 공간을 미끄러지듯 들이닥쳤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휠체어에 무력하게 앉아 있는 백발의 황자, 데미안이었다.


“전하, 제 뒤로 피하십시오!”


가웨인 경이 대검을 뽑아 들며 포효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빛 강철 투기가 뿜어져 나와 좁은 통로를 가로막았다.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음이 지하 감옥을 흔들었다. 가웨인의 검은 자객 두 명의 공격을 완벽하게 받아쳐 냈지만, 자객들은 정면 승부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살수가 가웨인의 방어벽을 우회해 데미안의 심장을 향해 독화살을 날렸다.


슈우욱!


공기를 가르는 불길한 파공음. 휠체어에 앉은 데미안은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뒤틀린 마력 회로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육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대로 끝날 순 없다.’


데미안, 아니 국제 변호사 이서준의 뇌 세포가 초고속으로 회전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새겨진 뜨거운 낙인, 방금 전 바르칸과 맺은 영혼 계약을 떠올렸다. 심상 세계의 심연에서 잠자고 있던 용인족 대장군 바르칸의 영혼이 그의 의지에 반응해 눈을 떴다.


[꼬마야! 내 힘을 보여주마. 네 나약한 그릇이 버틸 수 있을지 시험해 보아라!]


바르칸의 호탕한 사념이 뇌리를 때리는 순간, 데미안은 영혼 공조율을 10%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가슴의 낙인이 불타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기형적인 마력 회로의 우회 경로를 통해 이질적이고 뜨거운 붉은색 에테르가 흘러넘쳤.


“에테르 장벽(Ether Barrier).”


데미안이 낮게 읊조렸다.


웅――!


순간, 데미안과 그의 옆에서 사색이 되어 있던 서기 루카스를 감싸는 반투명한 crimson빛 반구형 방어막이 현현했다. 살수가 날린 독화살이 에테르 장벽에 닿는 순간, 거대한 열기에 녹아내리듯 불꽃을 튀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벽을 직접 타격하려던 자객의 단검 역시 뜨거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이, 이 힘은 대체……!”


자객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성(0성)의 폐위된 황자가 용인족 특유의 고밀도 화염 장벽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자객들이 방심한 그 짧은 찰나를 가웨인이 놓치지 않았다.


“하압!”


가웨인의 기사 서약 검이 거대한 궤적을 그리며 회전했다. 6성급 최정상 기사의 검기가 지하 통로의 벽면을 쓸어버릴 듯 폭발했다.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습격해 온 ‘검은 뱀’의 자객 세 명이 벽에 처박히며 피를 토했다. 가웨인의 무자비한 검격에 퇴로가 열리자, 데미안은 냉정하게 외쳤.


“루카스, 가웨인 경!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들이 경보를 울리기 전에 도서관 지상 출구로 돌파한다!”


그들은 전력으로 비밀 통로를 질주했다. 가웨인은 휠체어를 번쩍 들어 올린 채 계단을 뛰어올랐고, 루카스는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따랐다. 마침내 황실 대도서관의 무거운 철문을 밀치고 나왔을 때,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그들을 맞이한 것은 또 다른 거대한 장벽이었다.


달빛이 비치는 도서관 앞 광장. 그곳에는 황국의 근위대 대신, 붉은 가죽 갑옷을 입고 금빛 뿔을 드러낸 용인족 전사들이 광장을 삼엄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구의 사내가 거대한 결투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용인족 젊은 강경파의 수장이자 차세대 대장군 후보, 자하르였다.


“결국 쥐새끼처럼 지하에서 기어 나오는군, 인간 황자.”


자하르가 이글거리는 금안으로 데미안을 내려다보며 침을 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을 향한 극도의 멸시와 살기가 가득했다.


“우리 대장군님의 흔적을 쫓아 이 지하까지 침입했다지? 비열한 황국 놈들이 대장군님을 어딘가에 숨겨두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러운 벌레 놈들, 당장 대장군님의 신변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이 황성을 피로 씻어내겠다!”


자하르의 기세는 방금 전 지하의 살수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6성급 최정상 용인 전사가 뿜어내는 날것의 위압감에 루카스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고, 가웨인은 기사 서약 검을 고쳐 잡으며 데미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전하, 이 자는 제국의 법을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제가 상대하겠으니 뒤로 물러서십시오.”


그러나 데미안은 가웨인의 검을 휠체어 바퀴로 툭 치며 제지했다.


“멈춰라, 가웨인 경. 결투의 규칙상 제삼자가 개입하는 순간 조약의 정당성은 완전히 소멸한다. 저자가 노리는 것은 우리가 먼저 무력을 사용해 평화 조약을 파기하는 명분을 주는 것이다.”


데미안은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자하르를 응시했다. 심상 세계 속에서 바르칸의 사념이 낮게 웅얼거렸다.


[저 애송이는 내 군부의 젊은 장수 자하르다. 힘만 믿고 날뛰는 전형적인 무투파지. 머리는 나쁘지만 육체의 파괴력만큼은 진짜다. 조심해라, 꼬마야.]


데미안은 바르칸의 조언을 가슴에 새기며 휠체어에서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자하르 장군. 당신은 지금 황국의 영토 내에서 외교 사절의 신분을 망각하고 무력 시위를 벌이고 있소. 이는 명백한 조약 위반이오.”


“하! 조약? 약해 빠진 인간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종잇장 따위가 우리 용인족의 분노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자하르가 거대한 결투 도끼를 지면에 쾅 내리찍었다. 대리석 바닥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엄청난 진동이 일었다.


“좋다. 인간 황자여. 네놈이 그토록 떳떳하다면, 우리 용인족의 전통에 따른 명예 결투를 제안하마. 마력도 없고 칼 한 자루 쥘 힘도 없는 병약한 몸이라 들었으니, 내 친히 자비를 베풀어 ‘투기 없는 결투’를 청하지. 오직 순수한 육체의 힘과 기세로만 겨루는 결투다. 네놈이 내 도끼를 세 번 버텨낸다면, 대장군님의 음모론을 거두고 물러가 주마. 하지만 버티지 못한다면…… 그 목을 베어 전쟁의 깃발로 삼겠다!”


“전하! 절대 안 됩니다! 저 사악한 기만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루카스가 울부짖으며 데미안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용인족의 육체적 힘은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한다. 마력과 투기를 쓰지 않는다 해도, 거구의 자하르가 휘두르는 도끼 한 방이면 데미안 같은 병약한 인간은 흔적도 없이 으스러질 터였다.


그러나 데미안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전직 국제 변호사로서, 그는 상대방이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드는 순간을 포착했다.


“좋소. 그 명예 결투, 서약의 이름으로 수락하겠소.”


데미안은 품 안에서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를 꺼내 허공에 펼쳤다. 양피지에서 은은한 백색 광채가 흘러나와 결투장 주변을 감쌌다.


“단, 결투의 조건은 ‘양측 모두 투기 및 마력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결투’다. 만약 단 한 줌의 마력이라도 사용하는 자가 있다면, 고대 만국 조약법 제7조에 의거해 엄중한 인과율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건에 서약하겠는가?”


자하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마력 없이도 이 나약한 인간 황자쯤은 가볍게 밟아 죽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크하하! 좋다. 서약하마! 용인족의 명예를 걸고, 투기 없이 네놈을 으스러뜨려 주지!”


자하르가 서약의 양피지에 자신의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서약이 성립되는 순간, 결투장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럼, 첫 번째다!”


자하르가 대지를 박차고 도약했다. 마력은 실려 있지 않았지만, 용인족 특유의 초인적인 근력만으로도 그의 도끼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도끼가 데미안의 머리 위로 일직선으로 낙하했다.


가웨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침을 삼켰고, 루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데미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 순간, 데미안의 심상 속에서 바르칸의 날카로운 전술적 훈수가 울려 퍼졌다.


[왼쪽으로 반 보, 휠체어의 왼쪽 바퀴를 뒤로 빼라! 궤적이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데미안은 바르칸의 지시에 몸을 맡겼다. 무의식적인 감각으로 휠체어의 왼쪽 바퀴를 뒤로 슬쩍 굴리며 몸을 비틀었다.


스으으윽――!


거대한 도끼날이 데미안의 백발을 스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단 몇 밀리미터 차이의 회피였다. 대리석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데미안의 몸에는 단 한 군데의 상처도 나지 않았다.


“……!”


자하르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마력도 없는 인간이 자신의 필살의 일격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피한 것이다. 주변의 용인족 전사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 우연일 뿐이다! 두 번째다!”


자하르가 분노하며 도끼를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횡으로 베어오는 무자비한 참격.


[고개를 숙이고 상체를 앞으로 45도 기울여라! 도끼의 원심력이 너무 강해 하단이 비어 있다!]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상체를 앞으로 푹 숙였다. 도끼날이 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굉음을 냈다. 도끼가 허공을 가른 반동으로 자하르의 자세가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말도 안 돼……! 네놈, 대체 어떻게 내 궤적을 읽는 것이냐!”


자하르는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료 전사들과 인간 기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력도 없는 병약한 황자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허공만 가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오만한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이 벌레 같은 놈이 감히 나를 기만해?! 죽여버리겠다!”


이성을 잃은 자하르의 전신에서 붉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투의 서약을 어기고 그가 강제로 방출한 ‘적룡의 투기’였다. 거대한 결투 도끼가 붉은 화염을 두르며 폭발적인 열기를 뿜어냈다.


“전하! 저 자가 서약을 어겼습니다! 피하십시오!”


가웨인이 검을 뽑으며 돌격하려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단호하게 외쳤.


“가웨인 경, 멈춰라! 개입하는 순간 결투의 법칙이 오염된다! 저자의 위선은 이미 증명되었다!”


자하르의 도끼가 적룡의 투기를 두른 채 데미안의 목을 향해 무자비하게 날아왔. 이번 일격은 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광역적인 파괴력을 지닌 마법적 참격이었다.


‘바르칸, 지금이다!’


데미안은 심상 속 바르칸의 영혼과 공조율을 급격히 30%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가슴속 새겨진 붉은 계약 문양이 살을 찢는 듯한 열기를 내뿜었고, 그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가 과부하로 인해 괴사하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지만, 그는 정신 장벽을 극한으로 유지하며 권능을 발동했다.


“용인족의 에테르 장벽(Ether Barrier)!”


콰아아앙――!


자하르의Blazing 도끼가 데미안의 눈앞에 전개된 단단한 crimson빛 에테르 장벽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엄청난 화염 폭풍과 충격파가 광장을 휩쓸며 도서관의 유리창들을 모조리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데미안의 장벽은 단 한 치의 균열도 없이 자하르의 투기 참격을 완벽하게 소멸시켰다.


“이, 이 붉은 마력은…… 대장군님의?! 네놈이 어떻게 우리 용인족 최고의 마력을 부리는 것이냐!”


자하르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데미안의 차가운 흑안이 자하르의 영혼을 꿰뚫어 보았다. 인과율의 시야 속에서, 자하르의 전신으로부터 결투의 서약을 위반한 ‘붉은 위선의 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하르 장군. 당신은 ‘투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명예 결투의 서약을 명백히 위반했다.”


데미안이 최초의 조약서 양피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초국가적 사법 권능이 실려 광장에 울려 퍼졌다.


“조약의 서약자로서 선포하노니, 계약을 기만하고 사기를 일삼은 자에게 인과율의 단죄를 내리노라!”


“조약의 백색 사슬, 강제 현현!”


스스스슥――!


허공에 균열이 가며, 백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인과율의 사슬들이 솟구쳐 나왔. 사슬들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자하르의 거대한 결투 도끼를 휘감아 단숨에 박살 내버렸고, 그의 거구와 사지를 촘촘하게 결박했다.


“으아아아악! 이, 이 사슬은 대체 뭐냐! 내 마력이…… 내 회로가 막힌다!”


자하르가 비명을 질렀다. 백색 사슬이 그의 몸을 조여 올 때마다, 그의 내면에 흐르던 적룡의 투기가 강제로 압착되며 소멸해 갔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결박이 아니었다. 세계의 근원 마력이 보증하는 ‘계약 위반에 대한 사법적 강제 집행’이었다. 자하르의 마력 회로는 강제로 폐색되었고, 그의 육체는 힘을 잃고 대지 위에 무릎을 꿇었다.


인과율의 사슬 구속 등급이 일시적으로 B급으로 각성하며, 6성급 최정상 무인의 무력을 완벽하게 무력화한 것이다. 자하르는 온몸을 묶은 백색 사슬의 위엄 앞에 짓눌린 채, 단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광장에 모인 용인족 전사들과 황국의 기사들은 그 기적적인 사법적 징벌의 광경을 보며 깊은 경외감과 공포에 휩싸여 침묵했다. 무력도 없는 병약한 황자가 말 한마디로 용인족의 강력한 장군을 무릎 꿇린 것이다.


그러나 대역전의 카타르시스도 잠시, 데미안의 육체는 한계에 다다랐다.


동기화율 30%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가 용혈 마력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파열되었고, 심장에 극심한 과부하가 걸렸다.


“우윽……!”


데미안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혈류가 역류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한 움큼의 어두운 붉은 피를 바닥에 토해냈다. 전신을 찢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빠르게 흐려졌다. 마력 회로 폐색율이 위험 수치로 치솟으며 그의 심장이 일시적으로 고동을 멈추려 했다.


“전하!”


가웨인이 사색이 되어 소리치며 쓰러지는 데미안을 부축했다. 루카스 역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데미안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용인족 온건파 원로 카일의 경악에 찬 눈빛을 마지막으로 보며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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