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 평화 조약의 첫 사슬
고대 조약의 제단 지하는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공간을 찢어발길 듯 요동치던 검푸른 오염 마력의 폭풍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직 미세한 에테르의 잔해만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은빛 먼지처럼 부유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구원이 아닌, 죽음의 침묵에 가까웠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
가웨인 경의 절규가 좁은 지하 틈새의 석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평소 강철 같던 6성급 최정상 기사의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데미안을 품에 안고 그의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박동이 없었다.
데미안의 가슴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고, 은빛 예복은 전신의 혈관이 미세하게 파열되며 뿜어낸 검붉은 선혈로 무참히 물들어 있었다. 목덜미의 자상에서 흘러내린 피가 쇄골을 적셨고, 기형적인 마력 회로를 억제해 주던 은빛 제비궁 펜던트는 완전히 산산조각 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억제기가 사라진 체내에서는 용인족 대장군 바르칸의 뜨거운 화염 마력이 통제를 잃고 그의 세포 하나하나를 불태우며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주군……! 눈을 뜨십시오! 제발……!”
바르그 역시 무릎을 꿇은 채 데미안의 마른 손을 움켜쥐었다. 야수적인 완력을 지닌 늑대 수인족 전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핏빛 모래 위로 떨어졌다. 그 옆에 주저앉은 엘프 극단주의자 카일라는 자신이 저지른 테러의 결과와, 그것을 목숨 바쳐 막아낸 인간 황자의 처절한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력 회로 폐색율 85% 돌파. 물리적인 심정지 상태.
의학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완벽한 죽음의 도래였다. 지상 제단 위에서 대기하던 용인족 사신단장 볼카르와 황국의 온건파 관료들 역시 지하에서 전해진 침묵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로만 백작의 사병들이 백색 사슬에 묶여 무력화되었음에도, 조약을 이끌어가던 유일한 중재자이자 서약 대리인인 데미안의 죽음은 평화 협상의 원천적인 파국을 의미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데미안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져 있던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가 기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양피지에 새겨진 초대 신들과 이종족 수장들의 피의 서약 문양이 스스로 타오르듯 눈부신 백색 광채를 뿜어냈다.
스으으으――
눈을 멀게 할 만큼 순결한 백색의 에테르 파동이 양피지에서 뿜어져 나와 쓰러진 데미안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의 멈춰 있던 가슴속 깊은 곳, 괴사했던 심장에 박혀 있던 무형의 마법 낙인이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약의 심장 작동 매커니즘’이었다.
만국 평화 조약은 단순한 정치적 합의서가 아닌, 세계의 근원 마력이 보증하는 절대적인 계약 마법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이 조약의 공식적인 ‘서약 대리인’이자 보증인이었다. 고대 조약법의 규칙에 따르면, 보증된 계약의 거래가 완전히 성립되거나 공식적으로 기각되기 전까지, 서약 대리인은 임의로 계약을 파기하거나 사망할 수 없었다. 만약 대리인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망하려 할 경우, 조약 마법 자체의 인과율이 대리인의 육체를 강제로 붙잡아 두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즉, 레드클리프 공동 개발 조약이 최종 조인되기 전까지, 세계의 법칙은 데미안의 죽음을 ‘절차적 오류’로 규정하고 기각한 것이다.
두근――!
데미안의 가슴속에서 뇌성벽력 같은 박동이 울려 퍼졌다. 백색의 사법적 마력이 그의 멈춰 있던 심장을 강제로 박동시키며 뒤틀린 회로를 따라 에테르를 강제로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터져 있던 혈관들이 백색 마력의 실에 의해 정교하게 봉합되었고, 바르칸의 사나운 화염 마력 역시 조약의 사슬에 묶여 그의 심장 밑바닥으로 강제 수렴되었다.
“헉……!”
데미안이 상체를 급격히 일으키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입가에서 고여 있던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흐려져 있던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명징한 빛을 되찾았다. 오른쪽의 깊은 흑안과, 영혼 공조의 대가로 완벽히 고착화된 왼쪽의 이글거리는 금안—기이한 오드아이가 지하의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전, 전하……? 소생하신 겁니까?”
가웨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데미안은 여전히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둔탁한 통증을 느꼈지만, 현대 변호사 시절 수없이 겪었던 한계 상황 속에서 다듬어진 정신 장벽(Mental Shield Class 2)을 즉시 전개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고통을 이성 뒤편으로 격리했다.
“……말했지 않은가, 가웨인 경. 나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고.”
데미안은 피 묻은 입가를 소매로 닦아내며 가녀린 다리에 힘을 주려 했으나, 육체의 괴사도는 여전히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는 바르그의 보조를 받아 부서진 휠체어 대신 가웨인의 어깨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저앉아 떨고 있는 카일라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카일라. 자네는 제1황자 에드워드의 추악한 기만을 목격했네. 자네들의 신념은 그저 인간들의 전쟁 명분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지.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이대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할 텐가, 아니면 내 뒤에 서서 진짜 배후의 목을 벨 사법적 물증이 되겠는가?”
카일라는 데미안의 오드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을 향한 천년의 증오가,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하고 진실을 밝혀준 이 인간 황자의 압도적인 이성 앞에서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지상으로 올라가 증언하게. 자네가 겪은 모든 기만과 제1황자의 지령을 양국 대표 앞에서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 그것이 자네가 성지 엘프하임을 지킬 유일한 길이자, 내게 진 빚을 갚는 방법이네.”
데미안은 루카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루카스는 떨리는 손으로 자크의 비자금 장부와 에드워드의 지령문을 품에 안았고, 바르그는 카일라의 신변을 확보했다. 가웨인은 균열이 간 자신의 기사 서약 검을 칼집에 꽂으며 데미안의 휠체어를 대신해 그를 부축했다.
“지상으로 간다. 이 연극의 마지막 막을 내릴 시간이다.”
***
고대 조약의 제단 지상은 혼란의 극치였다.
로만 백작의 사병들이 백색 사슬에 묶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변경 영주 로만 백작은 제단 바닥에 주저앉아 이성을 잃고 발악하고 있었다. 용인족 사신단장 볼카르와 카일 원로는 붉은 발톱 전사들을 경계 태세로 정렬시킨 채 황국의 관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평화 조인은 완전히 무산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 지하 통로의 무거운 석문이 열리며 가웨인의 부축을 받는 데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예복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고, 왼쪽 눈은 용인족의 황금빛으로 이글거리는 기이한 몰골이었지만,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법적 위엄은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격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무기를 거두고 자리에 정렬하라.”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냘팠지만, 성대에서 울려 퍼진 백색의 마력 파동—사법적 발언권(Judicial Voice)의 권능이 제단 전체를 강타했다. 소란스럽던 제단 위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제3황자 전하……! 살아 계셨군요!”
황국의 온건파 관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반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로만 백작은 귀신을 본 듯 눈을 부릅떴.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어째서 아직 살아 있는 거냐! 제1황자 전하의 군대가 분명 너를 비명의 계곡에서……!”
“로만 백작. 자네가 믿던 제1황자의 음모는 여기까지네.”
데미안은 루카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루카스가 단상 앞으로 나아가 자크의 금고에서 압수한 비자금 세탁 장부와 에드워드 황자의 친필 비밀 지령문을 높이 치켜들었다.
“여기 증거가 있네. 로만 백작 자네가 불법으로 에테르 원석을 채굴해 폐수를 방류하고, 그 이익을 재상 바르톨로메오의 비자금으로 세탁한 장부일세. 또한, 제1황자 에드워드가 엘프 극단주의 조직 ‘검은 잎’을 배후에서 자금 지원하여 오늘 이 조인식장에 폭탄 테러를 기획했다는 명백한 지령문도 확보했네.”
장내가 술렁였다. 용인족 전사들과 황국 관료들 모두가 경악 어린 눈빛으로 장부를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바르그의 뒤에 서 있던 카일라를 앞으로 밀어냈다.
“이 자는 오늘 테러를 실행하려 했던 검은 잎의 최정예 자객 카일라네. 그녀가 직접 제1황자의 기만과 테러 사주를 증언할 것이네.”
카일라가 한 걸음 나아가 용인족의 카일 원로와 볼카르 사신단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인간 황자의 말이 맞다. 우리는 인간 제1황자 에드워드가 제공한 자금과 마법식으로 세계수의 오염된 씨앗 폭탄을 제작했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과 용인족 모두를 몰살하고 성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기폭 장치에 이중 암호화 덫을 심어 우리까지 함께 폭사시키려 했다. 인간 황자가 목숨을 걸고 에테르 장벽으로 폭발을 막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물론 세계수의 뿌리까지 완전히 썩어 없어졌을 것이다.”
카일라의 떨리지만 확고한 증언이 제단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용인족 온건파 원로 카일의 깊은 눈동자에 서늘한 분노가 감돌았다. 그는 백성들을 기만하고 전쟁을 조장한 황국의 강경파 세력의 추악한 진실을 완벽히 간파했다. 볼카르 사신단장 역시 오만한 태도를 완전히 거두고 데미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3황자 데미안 전하. 인간의 황실이 이토록 추악한 음모를 꾸몄을 줄은 몰랐소. 전하께서 목숨을 걸고 우리 사신단과 조약의 신성함을 지켜주신 것에 깊은 경의를 표하오.”
데미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로만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로만 백작. 자네의 불법 채굴과 환경 파괴 범죄, 그리고 국가 반역 혐의는 이 장부와 증언을 통해 명백히 입증되었네.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법 제7조에 의거하여, 자네의 모든 영지 자치권과 레드클리프 광산의 소유권을 합법적으로 압수 및 박탈하노라. 또한, 이 음모의 배후인 재상 바르톨로메오 역시 황성 법정에서 실각하여 사법적 단죄를 피하지 못할 것이네.”
“으, 으아아악! 이럴 수는 없다! 황제 폐하께서 나를 구해주실 것이다!”
로만 백작이 절규했으나, 가웨인 경과 국경 수비대 기사들이 그를 거칠게 포박하여 제단 아래로 끌고 내려갔. 사병들 역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제국 강경파가 국경 지대에 심어두었던 거대한 음모의 싹이 데미안의 치밀한 사법적 칼날 앞에 완전히 잘려 나간 순간이었다.
데미안은 뺨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를 제단 중앙의 천칭 석상 위에 올려놓았다.
“볼카르 사신단장. 그리고 황국 대리 관료들이여. 이제 방해물은 모두 제거되었네. 양국의 번영과 평화를 보증할 ‘레드클리프 공동 개발 조약’에 최종 서명할 시간일세.”
볼카르 사신단장이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 나와 정령의 깃펜을 쥐었다. 황국의 온건파 수석 관료 역시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았다.
스사사사――
두 대표의 서명이 양피지 위에 새겨지는 순간, 정령의 잉크가 그들의 영혼 마력을 흡수하여 조약서에 붉고 선명한 인장을 찍어냈다. 개정 조약서에 숨겨진 ‘서약 불이행에 따른 영혼 소멸 법칙’이 양국의 최고 지도부 영혼에 실시간으로 각인되어 연동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사적인 탐욕을 위해 이 조약을 파기하려 들 수 없었다. 위반하는 즉시 영혼이 분쇄될 터였으니까.
최종 서명이 완료되는 순간, 고대 조약의 제단 전체가 눈부신 백색 광채로 뒤덮였다.
쿠구구구――!
하늘의 구름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갈라졌고, 그 틈새에서 태고의 신들이 보증한 초자연적인 인과율의 백색 사슬들이 끝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철그렁! 철그렁!
장엄한 쇠소리가 대륙의 국경 지대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백색 사슬들은 레드클리프 광산과 황혼의 장막 국경 지대 전체를 웅장하게 휘감으며 천천히 지면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군대나 성벽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상호 불가침의 법적 평화 결계의 완성 서막이었다.
백성들과 기사들은 하늘을 수놓은 백색 사슬의 경이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경외감을 표했다. 무력의 지배가 아닌, 단 한 장의 조약서와 법률적 합의가 군대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여 전면전의 위기를 완전히 종식시킨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데미안은 휠체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1단계의 거대한 위기를 해결하고 생존을 쟁취해 냈다. 전 세계에 제3황자 데미안이라는 이름이 위대한 수호자이자 외교관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평화의 여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조약의 사슬이 국경 지대의 대지 속으로 완벽히 고정되어 빛을 발하는 바로 그 찰나.
데미안의 가슴속 깊은 곳, 조약의 결계와 완벽히 동화되어 고동치던 ‘서약의 심장’이 기이한 진동을 일으켰다.
쿵――!
그것은 바르칸의 뜨거운 화염 마력이 아니었다. 차갑고, 음산하며,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이질적인 녹색의 정령 마력 파동이었다. 방금 전 지하에서 소멸했던 세계수의 오염된 씨앗 폭탄에서 흘러나와 데미안의 심장으로 유입되었던 극소량의 독소 마력이, 국경의 결계를 타고 저 멀리 서쪽 영토와 공명하고 있었다.
‘아아…… 타들어 간다…… 대지가 침묵한다…….’
데미안의 뇌리 깊은 곳에서, 전생의 기억마저 뒤흔드는 거대하고 숭고한 영혼의 울부짖음이 흘러들어왔.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세계의 마력을 지탱해 온 존재, 엘프 성지 엘프하임의 고대 수호수 위그드라실의 비명이었다.
세계수의 마력 순환 정지 징후.
국경의 오염이 지하 수맥을 타고 세계수의 뿌리를 건드렸고, 성지의 세계수가 말라 죽어가며 엘프하임 전체가 마력 붕괴의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는 강력한 영적 경고였다.
데미안의 왼쪽 금안이 불길한 녹색의 빛을 머금으며 미세하게 요동쳤다. 그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가 새로운 독소에 반응하여 다시금 날카로운 통증을 보내왔다.
‘나의 자아 분열과 회로 괴사를 치료할 유일한 해독제인 세계수의 눈물……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다음 행선지는 정해졌군.’
데미안은 서쪽 하늘, 은빛 정령 마력이 흐릿하게 바래져 가는 엘프 성지의 방향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새로운 외교 생존기의 서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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