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제비궁의 숨겨진 칼날
지독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데미안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화려한 황국의 의사당이 아니었다. 얼룩덜룩한 이끼가 낀 차가운 돌벽, 틈새로 황량한 가을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낡은 천장. 황성에서 가장 외지고 황폐한 곳에 위치한 그의 유폐 처소, 은빛 제비궁(은빛 제비궁)이었다.
“……하아.”
짧은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릿한 피비린내가 맴돌았다. 마력 회로 폐색율 80%. 고대 조약 마법의 인과율 피드백을 받아낸 대가는 참혹했다. 기형적으로 뒤틀린 체내의 회로들이 마치 성난 불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때, 코끝을 스치는 맑고 차분한 향기가 있었다. 머리를 찌르던 두통이 미세하게 가라앉는 느낌에 데미안은 고개를 돌렸다.
침상 옆 작은 탁상 위, 은빛 백합 정제유(은빛 백합 정제유)가 담긴 청동 향로가 잔잔한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거칠고 파괴적인 제국의 에테르 마력 속에서, 오직 정신을 안정시키고 탁한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정제된 향이었다.
“황자님! 정신이 드십니까?”
연갈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은 젊은 여성이 다급히 다가왔다. 은빛 제비궁의 약제사이자 데미안의 유일한 아군, 클로에(클로에)였다. 그녀는 하얀 약제사 앞치마를 두른 채,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데미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황국 의사당에서 쓰러지셨을 때, 가웨인 경이 황자님을 업고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심장이 아예 멈추는 줄 알았어요.”
데미안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옷자락 너머로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대장장이 휴고가 뒤틀린 마력 회로의 폭주를 막기 위해 특수 제작해 준 마력 억제 은빛 펜던트(마력 억제 은빛 펜던트)였다. 펜던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진동이 심장에 가해지는 압박을 간신히 완화해 주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데미안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마력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지만, 현대의 국제 분쟁 전문 변호사 이서준으로서의 날카로운 지성은 이미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반나절 동안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다행히 마력 중화수와 은빛 백합 정제유 덕분에 회로의 폭주는 가라앉혔지만, 육체가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어요. 황자님, 대체 의사당에서 무슨 마법을 쓰신 겁니까? 마력이 전혀 없는 몸으로 그런 초자연적인 사슬을 소환하다니요.”
클로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데미안의 몸을 돌보는 약제사였기에, 그의 신체적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무리했다면 심장이 터져 사망했을 터였다.
데미안은 대답 대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정신 장벽 강도 (Mental Shield Class 2)를 전개해 몰아치는 육체적 고통과 영혼의 피로를 격리했다. 감정을 거세하고 차가운 이성을 유지해야 했다. 용인족 사신단장 볼카르에게 얻어낸 유예 기한은 단 3일. 그 안에 용인족 대장군 바르칸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황국과 용인족의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터질 것이고, 그 책임을 뒤집어쓴 자신 역시 단두대로 향하게 된다.
‘시간이 없다. 3일이라는 리세스(휴회)는 적들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 재상과 제1황자는 가만히 있지 않을 터.’
그때, 낡은 침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백발의 늙은 집사 토마스(토마스)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약탕 그릇과 마른 빵 몇 조각이 들려 있었다. 평소 황실의 품위를 유지하려 애쓰던 꼿꼿한 집사였으나, 오늘만큼은 그의 어깨가 유난히 처져 있었다.
“황자님,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토마스는 쟁반을 내려놓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데미안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 토마스.”
데미안의 차분한 질문에 토마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시종부에서 이번 달 제비궁에 배정된 겨울철 땔감과 약재 예산을 전면 삭감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황실 약제실에서 보내오던 클로에의 약초 보급마저 끊겼습니다. 이대로라면 황자님의 치료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클로에가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예산을 차단하다니요? 황자님은 황국의 공식 황자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재상 각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임시 조약 대리인이십니다!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는 분의 약재를 끊겠다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잖아요!”
“세실리아 황비(세실리아 황비) 측의 사주일세.”
데미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어조에는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변호사 특유의 건조함만 가득했다.
황비 세실리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제1황자 에드워드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방해물이 되는 데미안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굶겨 죽이려 해왔다. 이번 예산 삭감 역시 데미안이 의사당에서 보여준 사법적 천재성에 위협을 느끼고 가한 즉각적인 보복이자 압박이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실행의 손발이 누구인지, 데미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똑, 똑.
규칙적이고도 오만한 노크 소리가 제비궁의 고요를 깨뜨렸다. 문이 열리며 단정한 검은 시종복을 입은 노신사가 소리 없이 걸어 들어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띤 사내, 황실 시종 통제관 베르너 시종장(베르너 시종장)이었다.
“제3황자 전하, 혼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시종부를 대표해 안부를 여쭈러 왔습니다.”
베르너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존경심도 없었다. 그의 눈빛은 침상에 누워 있는 병약한 황자를 마치 곧 폐기될 쓰레기를 보듯 차갑게 훑고 있었다.
토마스 집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베르너 시종장! 안부를 여쭈러 왔다는 자가 제비궁의 겨울철 보급품과 치료용 약재를 전면 압수하라는 지시를 내린단 말인가? 황자님의 건강이 어떤지 알면서 이럴 수는 없네!”
베르너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소매를 정리했다.
“토마스 집사, 말을 삼가시오. 이것은 황비 전하의 공식적인 황성 재정 효율화 지침에 따른 것이오. 마력도 없고 황국에 기여하는 바도 없는 처소에 과도한 에테르 코인과 희귀 약재를 낭비할 여유는 황실에 없소. 더구나 반역죄로 조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 아니오?”
베르너는 데미안을 힐끗 바라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용인족과 내통하여 가짜 조약서로 사신단을 기만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재상 각하께서 그대에게 전권 대리인의 직위를 주신 것은 그저 실수를 수습할 기회를 준 것뿐이니, 분수를 아시오.”
클로에는 주먹을 꽉 쥐었고, 토마스는 억울함에 전신을 떨었다. 전형적인 기득권의 압박이었다. 법적인 권한이 없는 시종장이 황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사법적, 신체적 억압을 가해오는 전형적인 궁정의 기싸움.
이서준으로서 수많은 법정 분쟁을 조율해 온 데미안은 이 상황이 지극히 익숙했다. 상대가 규칙의 테두리 밖에서 폭력을 행사하려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상대가 속한 시스템의 ‘명문화된 규칙’으로 그 손발을 묶어버리는 것이다.
데미안은 침상에서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클로에가 부축하려 했으나,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제지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베르너 시종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베르너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늘 주눅 들어 바닥만 보던 병약한 황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상대를 꿰뚫어 보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와 법적 결함을 낱낱이 해체하려는 서늘하고 이성적인 눈빛.
데미안은 정신 장벽을 유지한 채,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베르너 시종장. 황실 가례 조항 제14조 3항을 알고 있는가?”
“……예?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시는 겁니까?”
베르너가 인상을 찌푸렸다.
“황실 가례 조항 제14조 3항에 명시되기를, ‘황실의 직계를 수여받은 황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품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보급과 황실 의료진이 보증하는 치료 약재를 국가의 재정으로 상시 보장받는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동 조례 제5항은 ‘이를 인위적으로 제한하거나 고의로 지연시키는 자는 황실 구성원에 대한 신체적 위해 시도로 간주하여, 즉시 직위를 박탈하고 황실 사법재판소에 회부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데미안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의사당에서 법을 읊조릴 때처럼 기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베르너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조항일 뿐입니다! 지금은 황비 전하의 특별 재정 지침이…….”
“특별 지침이 황실의 성법(成法)보다 우위에 서는가?”
데미안이 베르너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며 휠체어로 몸을 옮겨 앉았다. 그의 목에 걸린 은빛 펜던트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현재 바르톨로메오 재상 각하께서 공식 임명하신 ‘임시 조약 대리인’이다. 용인족과의 외교 협상을 전담하는 특사라는 뜻이지. 황국 외교 수호 조례 제8조에 따르면, 외교적 임무를 수행 중인 특사의 신체적 안전과 보급을 방해하는 행위는 ‘외교 사무 방해죄’이자,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대역죄’에 준하여 처벌한다.”
데미안이 휠체어 바퀴를 천천히 굴려 베르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베르너 시종장. 당신이 지금 행하는 예산 차단과 약재 보급 중단은 황비의 개인적인 지침이라는 핑계 뒤에 숨은, 황국 외교 특사에 대한 명백한 사법적 태업이자 신체적 위해 시도다. 내가 이 사실을 당장 재상 각하와 용인족 사신단장 볼카르에게 공식 서한으로 전달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나?”
“윽……!”
베르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인간 황국의 법률과 외교 조례를 칼날처럼 들이미는 데미안의 변론 앞에서는, 황비의 권세조차 합법적인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만약 용인족 사신단이 ‘황국이 협상을 고의로 지연시키기 위해 특사를 독살하려 약재를 끊었다’고 오해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베르너 개인이 져야 했다. 재상 바르톨로메오 역시 전쟁을 피하기 위한 명분으로 베르너의 목을 가볍게 칠 터였다.
데미안의 눈에 인과율의 시야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베르너의 목덜미와 전신에서 비열한 거짓과 극도의 두려움이 뒤엉킨 붉은 실들이 거미줄처럼 피어올라, 스스로의 목을 죄어오는 환영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당신이 황비 세실리아와 재상 각하 사이를 오가며 제비궁의 동태를 밀고한 대가로 에테르 코인을 챙겼다는 장부 역시 황실 가례 규정상 철저한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게.”
데미안이 쐐기를 박았다. 베르너는 전신을 사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병약한 황자는 단순히 책만 읽은 바보가 아니었다. 황국의 모든 법률 체계와 궁정의 생리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무서운 괴물이었다.
“……내,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시종부의 재정 검토 과정에서 행정적 착오가 있었던 듯하니, 예산과 약재는 원래대로 정상 보급하도록 하겠소.”
베르너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착오를 바로잡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겠지. 오늘 저녁까지 보급품이 당도하지 않는다면, 내 서기 루카스를 시켜 사법재판소에 정식 기소장을 제출하겠다.”
“알겠소! 즉시 조치하겠소!”
베르너 시종장은 도망치듯 제비궁의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오만하던 뒷모습은 간데없고, 오직 파멸의 공포에 질린 비참한 쥐새끼의 형상만 남았을 뿐이었다.
“황자님…… 대단하십니다.”
토마스 집사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평생 황실의 핍박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제비궁의 노복들에게, 데미안의 사법적 승리는 눈물겨운 구원이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안도하지 않았다. 말을 마친 순간, 기형적인 마력 회로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꼬이며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우윽.”
데미안이 짧은 신음과 함께 가슴을 움켜쥐었다. 클로에가 급히 다가와 은빛 백합 정제유의 향을 그에게 더 가까이 대어주며 그를 침상에 눕혔다.
“황자님, 무리하지 마세요! 방금 전의 말다툼만으로도 회로에 엄청난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제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적들은 내게 숨 쉴 틈을 주지 않는군.”
데미안은 침상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베르너를 말 한마디로 쫓아냈으나, 배후에 도사린 황비와 재상의 적의는 여전히 제비궁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사법적인 절차가 아닌, 더 음험하고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노릴 터였다.
잠시 후, 안정을 취한 데미안을 위해 클로에가 주방에서 정성스럽게 달인 따뜻한 약탕 그릇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황자님, 기력을 회복하셔야 하니 우선 이 약을 드세요. 회로의 안정을 돕는 약재들을 모아 특별히 달인 탕약입니다.”
클로에가 그릇을 건넸다. 데미안은 약탕 그릇을 건네받아 입가로 가져가려 했다.
스스슥.
그 순간, 데미안의 인과율의 붉은 실 시야(인과율의 붉은 실 시야)가 예기치 않게 번뜩였다.
검붉은 탕약의 표면 위로, 아주 미세하고 희미한 핏빛의 실 한 가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약재에서 나올 수 없는, 기만과 독살의 의도가 깃든 인과의 실타래였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약탕 그릇에서 풍기는 은밀하고도 이질적인 향기. 그것은 평범한 약재의 냄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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