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테러의 저지선
허공을 가르는 차가운 쇠소리와 함께, 제단 바닥을 뚫고 솟구친 백색의 사슬들이 폭동을 일으키려던 사병들의 창끝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아악!”
“이, 이게 무슨……! 내 마력이!”
지상 제단을 포위하고 돌격하려던 로만 백작의 사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서 원본에서 뻗어 나온 인과율의 백색 사슬은 단순한 쇠사슬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약의 신성한 성역 내에서 폭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의 에테르 흐름을 강제로 압착하여 봉인하는 사법적 징벌의 실체화였다. 사슬에 스치기만 해도 온몸의 마나 회로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사병들은 무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마력도 없는 폐물 황자가 어째서 이런 힘을……!”
로만 백작이 뒤로 자빠지며 단명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위선과 기만의 붉은 실들이 백색 사슬의 광채에 닿아 한 올 한 올 불타 없어지고 있었다. 요한 대법관의 사법 인장과 최초의 조약서가 결합하여 만들어 낸 압도적인 사법적 위엄 앞에, 백작의 사설 군대는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승리를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목덜미에서 흐르는 붉은 선혈이 그의 은빛 예복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의 기이한 오드아이—오른쪽 흑안과 왼쪽 금안—는 제단 바닥의 갈라진 틈새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지상의 폭동은 묶었으나, 진짜 파멸은 발밑에 있다.’
쿠구구구――!
제단 전체를 뒤흔드는 음산한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대리석 바닥 틈새에서 피어오르는 검푸른 마력의 아지랑이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직접 관통하고 있는 ‘세계수의 오염된 씨앗 폭탄’의 기폭 장치가 임계점에 달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휠체어 바퀴를 직접 굴려 제단 지하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 입구로 향했다. 바르그가 신속하게 휠체어 뒤를 잡고 밀었고, 가웨인 경이 검을 쥔 채 주위를 경계하며 그 뒤를 따랐. 가웨인의 손에 들린 기사 서약 검의 검신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이 음산한 진동에 공명하듯 바르르 떨렸다.
지하 틈새로 내려서자, 검푸른 오염 마력의 악취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그곳에는 엘프 극단주의 조직 ‘검은 잎’의 요원인 카일라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손끝은 이미 붉은빛으로 타오르며 마지막 1분의 카운트다운을 가리키는 기폭 장치를 향해 있었다.
“해체할 수 없어…….”
카일라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는 절망과 배신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데미안이 보여준 제1황자 에드워드의 비밀 지령문과 금융 거래 장부 사본이 그녀의 발치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에드워드 황자가 심어둔 이중 암호화 장벽이야. 우리가 폭탄을 기동하는 순간, 해체 코드는 원천적으로 차단되도록 설계되어 있었어. 처음부터…… 처음부터 우리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거야. 인간들과의 전면전을 위한 불씨로 우리를 태워 없애려 한 거라고!”
루카스가 자신의 행정용 깃펜과 마법 해독용 도구들을 쥔 채 이마에 땀을 흘리며 폭탄의 마법식을 해체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깃펜 끝이 폭탄의 붉은 회로에 닿을 때마다 기분 나쁜 불꽃이 튀며 그의 마력을 밀어냈다.
“안 됩니다, 전하! 제국의 군사 암호식과 엘프의 고대 정령 마법식이 기괴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마법식을 해체하려면 최소한 반나절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루카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폭탄 중앙의 붉은 정령석이 맥박치듯 고동치며 남은 시간이 단 1분도 채 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검푸른 오염 마력이 폭발하는 순간, 제단 위의 용인족 사신단과 제국 관료들은 물론, 지하 수맥을 통해 엘프 성지 엘프하임의 세계수 뿌리까지 통째로 썩어 들어갈 터였다.
가웨인 경이 이를 악물며 검을 치켜들었다.
“전하, 제가 이 폭탄을 대검으로 내리쳐 결계를 강제로 파괴해 보겠습니다!”
“멈추게, 가웨인 경.”
데미안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가웨인을 제지했다.
“정령 마력의 폭탄을 물리적인 충격으로 파괴하려 드는 것은 기폭 장치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네. 검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을 잊었는가? 자네의 검이 먼저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 걸세. 그리고 폭발의 여파를 물리적인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어.”
“그렇다면…… 이대로 모두가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바르그가 야수적인 으르렁거림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카일라 역시 눈을 감으며 다가올 파멸을 받아들이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데미안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목덜미의 자상에서 흐르는 피가 칼라를 타고 내려와 차가운 쇄골을 적셨다. 머릿속에서 마력 회로 폐색율이 82%, 83%를 향해 치솟으며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맑았다.
‘물리적인 해체가 불가능하다면, 인과율의 규칙을 우회한다. 폭발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그 폭발이 미치는 공간적 범위를 초자연적인 마력 장벽으로 격리하여 피해를 제로로 만든다.’
데미안은 눈을 감고 자신의 깊은 심상 세계로 진입했다.
그곳은 거대한 백색 사슬들이 얽혀 있는 차갑고 고요한 전당이었다. 그리고 그 전당의 중심에, 거대한 붉은 불꽃의 오라를 두른 용인족 대장군 바르칸의 영혼이 이글거리는 금안으로 데미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약한 인간 놈. 기어이 네놈의 그 얄팍한 지성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파멸의 순간이 왔구나. 내 힘을 빌려 제단을 포위한 놈들을 전부 불태워 버리겠느냐?]
바르칸의 거친 사념이 심상을 뒤흔들었다.
“아니, 바르칸. 내게 필요한 것은 학살의 불꽃이 아니다.”
데미안은 심상 속에서 바르칸의 거대한 실루엣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 그의 영혼 자아는 백발의 황자 데미안이 아닌, 현대의 냉철한 변호사 이서준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자네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용인족의 명예와 조약의 가치가 저 밑바닥의 오염된 폭탄 하나에 재가 되어 사라지려 하고 있네. 저 폭탄이 터지면 양국의 평화는 영원히 종식되고, 자네의 종족 역시 더러운 음모의 희생양이 될 걸세. 내게 자네의 가장 단단한 수호의 권능을 빌려주게.”
바르칸의 영혼이 침묵했다. 이윽고, 용인족 대장군의 거대한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힘이 없는 자가 세상을 지키겠다고 버티는 꼴이라니. 좋다, 변호사 놈아. 네놈의 그 꺾이지 않는 오만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내 똑똑히 지켜보지. 계약은 성립했다!]
쿠웅――!
데미안의 심장 깊은 곳에서 붉은 용인족의 계약 문양이 선명하게 타오르며, 폭발적인 에너지가 그의 뒤틀린 마력 회로를 타고 현실의 육체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영혼 공조율이 위험 수치인 40%를 향해 급격히 상승했다.
“아아악!”
데미안의 입에서 비명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형적으로 꼬여 있던 그의 회로에 8성급 최강자였던 바르칸의 뜨거운 용혈 마력이 강제로 흘러들어가자, 전신의 혈관이 터질 듯이 팽창하며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의 왼쪽 눈동자가 완벽한 금빛으로 타오르며 오드아이의 광채를 발산했다.
“전하!”
“주군!”
가웨인과 바르그가 경악하여 데미안을 붙잡으려 했으나, 데미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색 마력의 오라가 그들의 접근을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데미안은 피가 섞인 가래를 바닥에 뱉어내며, 폭탄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마력이 깃들지 않았지만, 그의 심상과 연결된 인과의 실타래가 허공에서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며 회전했다.
“용인족의 에테르 장벽(Ether Barrier)――!”
데미안의 선포와 함께, 기폭 장치의 타이머가 ‘0’을 가리켰다.
콰아아아아――!
폭탄 중앙의 오염된 정령석이 기괴한 검붉은 빛을 발하며 마침내 대폭발을 일으켰다. 세계수의 오염된 씨앗에서 뿜어져 나온 파괴적인 충격파와 검푸른 독소 마력이 사방으로 무자비하게 팽창하려던 바로 그 찰나.
데미안이 전개한 반구형의 단단한 적룡 마력 장벽이 폭탄의 외곽을 완벽하게 감싸 안았다.
쾅! 쾅! 쾅! 쾅!
장벽 내부에서 엄청난 폭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붉은 결계의 벽면을 사납게 타격했다. 검푸른 독소와 핏빛 화염이 장벽 내부를 가득 채우며 팽창하려 발악했지만, 바르칸의 영혼이 보증한 에테르 장벽은 단 한 줌의 폭발 여파도 외부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폭발의 모든 물리적 충격과 오염 마력이 장벽 내부의 좁은 공간에 강제로 갇힌 채, 스스로의 에너지에 짓눌려 서서히 소멸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적적인 테러 저지이자, 공간을 격리한 사법적 집행이었다.
지하 감옥은 미세한 먼지만이 날릴 뿐,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고요함을 유지했다. 카일라는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눈앞에서 완벽하게 격리되어 소멸한 폭탄의 흔적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커헉……!”
폭발의 엄청난 반동을 영혼으로 고스란히 받아낸 데미안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의 전신 혈관이 미세하게 파열되며 은빛 예복이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마력 회로 폐색율은 위험 임계점인 85%를 돌파하여 그의 심장 박동을 강제로 멈추려 들었다.
쩍, 쩌적――
데미안의 목에 걸려 있던 은빛 제비궁 펜던트에 날카로운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체내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를 억제해 주던 유일한 방어구가 파손되자, 심상 속 바르칸의 거칠고 뜨거운 붉은 용 마력이 통제를 잃고 데미안의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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