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마력천의 심판
“……이것이 네가 신뢰하던 제1황자의 진짜 얼굴이다.”
지하 제단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툭, 하고 던져진 양피지 뭉치들. 그 서류들은 어둠 속에서도 제1황자 에드워드의 푸른색 마력 인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단검을 쥔 카일라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은빛 예복을 적시는 데미안의 붉은 선혈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더 이상 단검에 힘을 주지 못했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는 허공에 흩뿌려진 제1황자의 비밀 지령문과 금융 거래 장부 사본을 응시한 채 정지해 있었다.
“거짓말…… 인간들의 비열한 이간질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령의 언어로 새겨진 저 장부의 서명마저 위조라 할 셈인가? 너희 ‘검은 잎’의 수장이 제국 군부로부터 받은 에테르 코인의 고유 마력 파형은 오직 황실 금고에서만 주조되는 것이다. 너희는 성지를 지키기 위해 이 폭탄을 설치했겠지만, 실상은 너희를 몰살하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인간 황자의 완벽한 장기말이었을 뿐이지.”
데미안의 오른쪽 흑안과 왼쪽 금안이 기이한 대비를 이루며 카일라의 영혼을 꿰뚫어 보았다. 정신 장벽 Class 2가 작동하며 목덜미의 쓰라린 통증을 이성 너머로 격리했다.
쿠우우웅――!
그때, 머리 위 제단에서 묵직한 대지의 진동과 함께 거친 군화 소리가 지하 통로의 대리석 벽면을 흔들었다. 변경 백작 로만의 사병들이 지상을 장악하기 시작한 신호였다. 남은 시간은 고작 5분.
“카일라. 이 폭탄의 기폭을 잠시 유예해라. 지상에서 벌어지는 연극을 보면 내 말이 진실인지 네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카일라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단검을 거두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만약 네 말이 거짓이라면, 내 손으로 직접 이 제단과 함께 너를 가루로 만들겠다.”
“현명한 선택이군.”
데미안은 흐르는 피를 은빛 손수건으로 대충 누르며 휠체어 바퀴를 돌렸다. 곁을 지키던 수인족 전사 바르그가 신속하게 휠체어를 밀어 지상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올랐다. 가웨인 경이 검자루를 꽉 쥔 채 그들의 뒤를 호위했다. 가웨인의 손에 들린 기사 서약 검의 검신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이 지하의 음산한 빛을 받아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데미안의 전신을 덮쳤다.
고대 조약의 제단 위, 웅장한 천칭 석상 아래에는 이미 일촉즉발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화려한 붉은 사절단 의복을 입은 용인족 사신단장 볼카르와 깊은 주름을 지닌 온건파 원로 카일 원로가 붉은 발톱 전사들을 대동한 채 서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비대한 체구에 화려한 털코트를 걸친 변경 영주 로만 백작이 수십 명의 중장갑 사병들을 거느리고 제단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곳 레드클리프 광산은 대대로 제국의 영토이자 나 로만 백작의 영지다! 황실의 나약한 폐물 황자가 이종족 놈들과 야합하여 영토를 공동 개발하겠다는 조약 따위는 제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다!”
로만 백작이 탐욕스러운 안광을 번뜩이며 가죽 장화를 신은 발로 제단 바닥을 쿵, 하고 구르며 소리쳤. 그의 손에는 누렇게 바랜 고문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보아라! 이것은 초대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영토 영유권 고문서다! 이 레드클리프의 모든 마력 광석은 오직 제국의 것이며, 이를 이종족에게 단 한 톨도 넘겨줄 수 없다!”
용인족 전사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카일 원로의 조용하고 깊은 붉은 눈빛에도 서서히 불쾌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뻔뻔한 탐욕에 대한 천년 묵은 불신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고문서의 서명은 위조된 것이네, 로만 백작.”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제단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병들의 틈을 헤치고 데미안의 휠체어가 단상 중앙으로 진입했다. 목덜미에 붉은 선혈이 묻은 채, 백발을 휘날리며 등장한 제3황자의 모습에 장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그의 기이한 오드아이는 용인족 전사들에게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데미안 황자……! 각혈을 하고 쓰러져 죽어간다더니, 기어이 기어 나왔군!”
로만 백작이 코방귀를 뀌며 위조된 고문서를 흔들었다.
“어디서 감히 영유권을 논하는가? 이 문서는 황실 사법부의 공인까지 받은 절대적인 물증이다!”
데미안은 품 안에서 요한 대법관의 사법 인장을 꺼내 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사법 인장의 문양이 허공에 요한 대법관의 사법 권위를 상징하는 마법적 홀로그램을 띄웠다.
“황국 건국 초기의 공식 서체와 초대 황제의 마력 낙인 문양은 둥근 호를 그리는 형태네. 하지만 자네가 들고 있는 고문서의 낙인은 직선형이지. 황실 기록실의 시몬 서기가 보관 중인 진짜 건국 조서와 대조해 본 결과, 자네의 문서는 백 년 전 사법부의 부패한 하급 관료가 위조한 가짜임이 판명되었네. 사법 인장의 권위로 선포하노니, 그 고문서의 증거력은 원천 무효일세.”
“이, 이 건방진 놈이……!”
로만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사병들의 창끝을 겨누며 윽박질렀.
“증거의 양식이 어찌 되었든, 이곳은 제국의 영토다! 이종족 놈들이 신성한 국경을 침범해 우리의 광산을 강탈하려 하는데, 황자라는 자가 나라를 팔아먹으려 드는구나!”
“강탈이라니. 로만 백작, 자네가 말하는 그 ‘강탈’의 진짜 의미를 밝혀볼까?”
데미안은 휠체어에서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 사법적 발언권의 미세한 파동이 실려 청중들의 귀에 명확하게 박혔다.
“용인족이 분노하여 이 제단을 포위한 진짜 원인은 영토의 크기 때문이 아니네. 바로 자네가 저지른 신성모독에 가까운 환경 범죄 때문이지.”
데미안의 시선이 용인족 온건파 원로 카일 원로를 향했다.
“카일 원로여. 용인족이 마력을 보충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신성한 온천, ‘붉은 마력천’이 검게 오염되어 전사들이 마력 역류로 고통받았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카일 원로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인간들의 탐욕이 신들의 분노를 사서 마력천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로 인해 우리 전사들의 원한이 극에 달했다.”
“그것은 신들의 분노가 아닙니다.”
데미안이 루카스에게 손짓했다. 루카스가 가방에서 핏빛 모래가 묻은 가죽 장부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지하 투기장 ‘피의 피트’의 금고에서 압수한 자크의 비자금 세탁 장부이자, 로만 백작의 불법 채굴 기록서였다.
“이 장부를 보십시오. 로만 백작은 레드클리프 광산의 불법 채굴권을 숨기기 위해, 광산 지하 깊은 곳에 축적된 맹독성 에테르 폐수를 용인족의 영토인 ‘붉은 마력천’ 지하 수맥으로 무단 방류했습니다. 방류된 날짜와 양, 그리고 그 대가로 재상 바르톨로메오의 비자금 계좌로 흘러 들어간 에테르 코인의 일련번호가 여기에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장부의 내용이 데미안의 목소리를 통해 낭독되자, 제단 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용인족 온건파 원로 카일 원로의 깊고 조용한 붉은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가 짚고 있던 거대한 지팡이가 지면을 강하게 때리며 파괴적인 마력 파동을 일으켰다.
“인간 영주여……! 감히 우리 종족의 신성한 오아시스를 너희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쓰레기통으로 삼았단 말이냐!”
로만 백작의 전신에서 위선과 거짓의 붉은 마력 실이 폭발하듯 뻗어 나왔다. 인과율의 붉은 실 시야를 통해 그 추악한 형태를 똑똑히 지켜보던 데미안은 쐐기를 박았다.
“이것이 바로 용인족 '붉은 마력천' 오염의 진짜 원인입니다. 로만 백작은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용인족의 분노를 ‘영토 침탈’로 왜곡하고, 제국 백성들에게 전쟁을 선동한 것입니다. 자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제국의 군대와 용인족의 전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한 죄, 결코 가볍지 않네.”
“이…… 이 쓸모없는 병약한 쓰레기 황자 놈이 감히 나를 모함하는구나!”
로만 백작이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데미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카일 원로와 용인족 사절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일 원로여, 그리고 용인족의 전사들이여. 제국은 이 범죄를 묵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나는 임시 조약 대리인의 권한으로, 양국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조약 조항을 제안합니다.”
데미안이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눈부신 백색 신성 마력이 양피지에서 뿜어져 나와 제단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첫째, 분쟁 광산 레드클리프를 양국의 ‘공동 개발 구역’으로 선포합니다. 둘째, 이곳에서 채굴되는 마력 광물에 대해 양국 간의 무역 시 관세를 상호 면제하는 ‘호혜적 에테르 관세 면제 조항’을 신설합니다. 셋째, 공동 개발 수익의 일부를 강제로 적립하여, 로만 백작이 파괴한 ‘붉은 마력천’의 환경 복구 기금으로 영구 신탁할 것을 약속합니다.”
호혜적 에테르 관세 면제 조항.
그것은 단순한 영토 할양이 아니었다. 용인족에게는 잃어버린 신성한 마력천의 완전한 복구와 경제적 실리를 제공하고, 제국에게는 영토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안정적인 마력 공급을 보장하는, 현대 통상법과 환경법의 완벽한 융합이었다.
카일 원로의 눈동자가 깊은 감동과 경탄으로 떨렸다. 인간의 탐욕을 혐오하던 용인족의 대현자가, 마력이 전혀 없는 나약한 황자의 날카로운 공정함 앞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공평하군. 힘의 논리가 아닌, 정당한 법과 약속으로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인간의 의지를 내 평생 처음 보았다. 데미안 황자여, 그 조약이라면 우리 용인족 평의회 역시 기꺼이 서명할 것이다.”
“원로님! 저 비열한 인간들의 감언이설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로만 백작이 광분하여 사병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얼굴은 극도의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의 불법 채굴과 환경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조약이 체결되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영지 몰수와 황실 법정에 의한 참수형뿐이었다.
“조약 따위는 필요 없다! 저 건방진 황자 놈이 이종족 괴물들과 결탁하여 제국을 배신했다! 사병들은 들으라! 제단을 쓸어버려라! 저 나약한 제3황자와 도마뱀 놈들을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라!”
로만 백작의 가혹한 명령에, 5성급 마력 전사들로 구성된 변경 사병 수십 명이 살기 어린 투기를 뿜어내며 제단 위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주군을 시해하려는 반역도당들은 내 검을 먼저 거쳐야 할 것이다!”
가웨인 경이 포효하며 가신 서약 검을 뽑아 들고 데미안의 휠체어 앞을 가로막았다. 검신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이 그의 단단한 강철 투기와 공명하며 날카로운 파찰음을 냈다. 수인족 전사 바르그 역시 은빛 야수 마력을 폭발시키며 사병들의 진격을 육체적으로 가로막았다.
일촉즉발의 무력 폭동의 현장.
데미안은 휠체어에 앉은 채,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품 안의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왼쪽 금안이 태고의 신들이 남긴 인과의 기운과 공명하며 눈부신 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로만 백작. 공정함을 잃은 자여, 계약의 무게를 견뎌라.”
데미안의 나직한 선포와 함께, 제단의 허공이 기하학적인 백색 균열을 일으키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신들이 보증한 최초의 조약법을 위반하고 폭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을 단죄할, 인과율의 백색 사슬들이 차가운 쇠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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