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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식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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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게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스며든 것은 은은한 은빛 광채였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지독한 이명이 서서히 가라앉고, 코끝을 스치는 맑은 향기가 뒤틀린 마력 회로의 통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데미안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약제사 클로에의 얼굴이었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클로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데미안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전신을 관통하는 뻐근한 무력감에 이마를 찌푸렸다. 가슴팍에 남아 있는 미온적인 온기. 그것은 단순한 마력 중화수의 기운이 아니었다. 은빛의 고운 가루가 그의 은빛 예복 깃 위에 아주 미세하게 남아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살아 있군."


"아르웬 대원로께서 남겨주신 '세계수의 정화 가루' 덕분입니다. 비명의 계곡에서 회로를 강제로 우회하신 탓에 전신의 혈관이 파열되고 심정지 직전까지 가셨어요. 이 가루가 없었다면 영혼의 기생 반동을 버텨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클로에가 다급히 마력 중화수가 담긴 약병을 건넸다. 데미안은 그것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액체가 뒤틀린 회로를 이완시키자, 비로소 막혔던 숨이 크게 터져 나왔다.


침상 옆에는 낡은 청색 갑옷을 단정하게 정돈한 가웨인 경과 은빛 털을 지닌 수인족 전사 바르그가 묵묵히 서 있었다. 가웨인의 어깨에 새겨져 있던 그림자 이빨의 검푸른 독 상처는 정화 가루의 잔여 마력 덕분에 완전히 해독되어, 기사 특유의 굳건한 투기가 완벽히 복원되어 있었다. 바르그 역시 데미안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나직한 으르렁거림을 흘렸다.


"전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가웨인이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버틸 만하네.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국경의 상황은 어찌 되었지?"


데미안의 물음에 서기 루카스가 두꺼운 양피지 서류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재상 바르톨로메오는 전하께서 가사 상태에 빠졌다는 베르너의 거짓 보고를 완벽히 믿고 방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1황자 에드워드가 움직인 흔적이 있습니다. 국경 수비대와 제1기사단의 매복은 격퇴했으나, 조인식장 주변의 기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용인족 사신단장 볼카르와 온건파 원로 카일은 이미 제단에 도착해 조인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마침내 결전의 무대에 도달했군."


데미안은 뺨에 남아 있는 흉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광장에서 백성들이 던진 돌에 찢겼던 상처는 붉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이 상처와 품 안의 세무 장부, 그리고 바르칸의 전술 지휘도는 오늘 조인식장에서 제국 강경파의 목을 벨 가장 완벽한 사법적 칼날이 될 터였다.


"가세. 휠체어를 가져오게."


***


황혼의 장막 국경 지대, 해발 수천 미터의 험준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고대 조약의 제단'.


태고의 신들이 이세계의 종족들과 최초의 평화를 약속하며 세웠다는 거대한 대리석 제단은 웅장하면서도 기묘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황국의 온건파 관료들과 붉은 가죽 갑옷을 입은 용인족 사절단이 제단 양옆으로 삼엄하게 도열해 있었고, 제단 중앙의 거대한 천칭 석상 아래에서는 최종 조약서 서명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제단에 들어선 데미안은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음미했다. 그의 오른쪽 흑안과 왼쪽 금안이 기이한 대비를 이루며 빛나고 있었다. 바르칸의 영혼과 한계 이상으로 동조했던 여파로 고착화된 오드아이는 보는 이들에게 신비로운 위압감을 주었다.


'이건 단순한 외교의 현장이 아니야.'


데미안은 정신 장벽 Class 2를 전개하며 인과율의 붉은 실 시야를 개안했다.


보통 기만이나 거짓을 품은 자들의 전신에서는 붉은 마력 실이 뻗어 나오기 마련이었다. 저 멀리서 비열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변경 영주 로만 백작의 전신에서도 붉은 실들이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데미안의 눈길을 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제단의 신성한 대리석 바닥 틈새, 그리고 천칭 석상의 기둥 주변을 따라 기괴하고 음산한 보랏빛 마력 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령 마력을 다루는 자의 흔적이었으나, 극도로 오염되어 뒤틀려 있었다.


'보랏빛 실…… 이건 용인족의 마력도, 황국의 에테르도 아니다. 엘프의 정령 마력이야. 하지만 왜 이토록 불길하게 타락해 있는 거지?'


데미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즉시 휠체어 옆에 서 있는 루카스를 불렀다.


"루카스. 이 제단의 상세 구조도를 가지고 있는가?"


"예, 전하. 요한 대법관님의 서고에서 필사해 둔 고대 제단의 지하 설계도가 있습니다."


루카스가 가방에서 낡은 양피지 지도를 꺼내 펼쳤다. 데미안은 인과율의 시야로 감지되는 보랏빛 실의 흐름과 지도의 구조를 빠르게 대조했다. 실들의 근원은 제단 중앙의 천칭 석상 바로 아래, 세계수의 뿌리 줄기가 미세하게 뻗어 나온 지하 비밀 틈새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령 마력의 왜곡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군. 루카스, 나를 저 석상 뒤편의 지하 통로로 인도하게."


"전하, 조인식이 곧 시작됩니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지하로 가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가웨인이 걱정스레 만류했다.


"가웨인 경, 이 왜곡을 방치하면 조인식 자체가 피로 물들 걸세. 경은 제단 위를 주시하며 로만 백작의 사병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바르그와 루카스만 데리고 다녀오겠네."


데미안의 단호한 태도에 가웨인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기사 서약 검을 꽉 쥐었다.


***


제단 뒤편의 좁고 어두운 대리석 틈새를 지나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자, 지상의 엄숙함과는 전혀 다른 음산한 냉기가 엄습했다.


바닥은 축축했고, 세계수의 미세한 뿌리들이 벽면을 타고 뻗어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그 뿌리들은 본래의 은빛 정기를 잃은 채, 검푸른 오염 물질에 물들어 비틀려 있었다.


데미안은 정령의 음성 감응도를 전개했다. 그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가 지하의 오염된 공기와 반응하며 미세하게 찌릿거렸다. 귀청을 찢는 듯한 정령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뇌리에 직접 박혀왔다.


[아파…… 더러워…… 모든 것을 태워버려라…….]


"이건 정령 폭주를 유도하는 마법식이야."


데미안이 휠체어 바퀴를 멈추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지하 틈새 중앙에는 세계수의 뿌리를 직접 관통하고 있는 기괴한 형상의 장치가 보였다. 검은 나무 상자 형태의 장치 위에는 보랏빛 문양들이 기괴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세계수의 오염된 씨앗 폭탄.'


엘프하임의 금단 구역에서나 나올 법한 테러용 마도 병기였다. 이 폭탄이 기폭하는 순간, 제단 위의 모든 이들이 몰살당할 뿐만 아니라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오염이 성지 전체로 번져 인간과 이종족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루카스, 마법 수식을 분석할 수 있겠나?"


루카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장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이, 이건 엘프 고대 문자로 새겨진 정령 제어식입니다. 하지만 수식이 이중으로 암호화되어 있어 제 지식으로는 해독하는 데 최소 몇 시간은 걸립니다. 기폭 타이머의 정령 마력 흐름으로 보아…… 남은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물리적 해체가 불가능한 상황.


그때, 데미안의 만국 고대 언어 통달 권능이 뇌리에서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장치 표면에 깜빡이는 보랏빛 정령 문자들의 배열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현대 한국어의 계약 조항처럼 완벽하게 치환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의 숨결을 빌려, 대지의 분노를 봉인하고, 계약의 파기를 선언하노라……."


데미안이 나직하게 읊조린 문장은 단순한 해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카일라가 폭탄을 설계할 때 사용했던 정령어의 근원적인 모순을 역추적하는 사법적 반론의 시작이었다.


바스락.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바람의 장막이 걷히며 차가운 살기가 데미안의 목덜미를 덮쳤.


검은 가죽 옷을 입고 복면을 쓴 날렵한 체구의 여성. 그녀의 손에 쥔, 정령의 바람이 깃든 예리한 단검이 순식간에 데미안의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


"움직이지 마라. 소리를 내는 순간, 이 제단과 함께 모두가 먼지가 될 테니."


차가운 은빛 눈동자를 지닌 엘프 극단주의 간첩, 카일라였다.


"전하!"


지하 통로 입구에서 대기하던 가웨인이 기겁하며 제단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카일라는 단검을 데미안의 목에 더 세게 밀착시키며 숲의 정령어로 날카롭게 외쳤.


"오지 마라!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이면 이 자리에서 폭탄의 기폭 스위치를 강제로 작동시키겠다!"


가웨인은 검을 쥔 채 제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카일라의 손가락은 이미 장치 중앙의 붉게 깜빡이는 코어 스위치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였다.


데미안은 목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칼날의 감각 속에서도 심박수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그의 왼쪽 금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카일라. 네가 이 폭탄을 터뜨려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지?"


데미안이 구사한 언어는 완벽한 고대 엘프어였다. 그것도 엘프의 고귀한 사제들만이 사용하는 품격 있는 억양이었다. 카일라의 은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인간 따위가 어떻게 우리의 언어를……! 닥쳐라! 너희 탐욕스러운 인간들과 오만한 용인족들이 이 신성한 제단에서 가짜 평화를 속삭이는 꼴을 더는 볼 수 없다. 너희가 공멸하는 것만이 우리 성지 엘프하임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가짜 평화라……."


데미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외우는 정령의 기도는 숲의 수호를 말하고 있지만, 네가 품은 이 폭탄은 세계수의 뿌리를 직접 오염시키고 있다. 동포를 구하겠다는 명분으로 성지의 심장을 스스로 썩히는 것, 이것이 네가 말하는 정의인가? 자가당착이군."


"우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제국의 인간들이 국경의 세계수 뿌리를 베어내 마력을 찬탈하고 있고, 성지의 물은 검게 죽어가고 있어! 이건 너희 인간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다!"


카일라의 목소리에 깊은 증오와 트라우마가 섞여 있었다. 데미안은 그녀의 영혼 속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실들을 바라보며, 그녀의 내면에 새겨진 비참한 기억의 편린을 읽어냈다.


"제국의 인간들이 숲을 오염시켰다는 것, 그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그 침략의 배후가 누구인지 아는가?"


데미안은 품 안에서 위조된 국경 영토 할양 조약서 사본과 제1황자의 비밀 지령이 담긴 문서의 사본을 천천히 꺼내 보였다.


"너희 '검은 잎' 조직에 막대한 자금과 오염된 마력 폭탄의 원료를 제공한 자. 인간과 용인족의 전쟁을 유도해 성지의 장벽을 허물려 한 진짜 배후는…… 다름 아닌 황국의 제1황자 에드워드다."


"뭐……?"


"너희는 성지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고 믿었겠지만, 실상은 너희를 몰살하려는 인간 황자의 장기말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이 문서를 보아라. 너희 조직의 수장이 제국 군부와 맺은 자금 거래 내역이다. 너희의 복수심은 철저히 기만당했다."


카일라의 눈동자가 혼란과 공포로 휩싸였다. 그녀가 쥔 단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걱.


그 짧은 흔들림 속에서 단검의 날카로운 끝이 데미안의 목덜미를 살짝 긁고 지나갔다. 데미안의 하얀 목덜미에서 붉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려 그의 순백의 외교관 예복 깃을 붉게 물들였다. 피비린내가 좁은 지하 틈새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데미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카일라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선택해라, 카일라. 기만당한 채 성지를 파멸의 불꽃으로 몰고 갈 것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진짜 배후의 목을 칠 사법적 증거가 될 것인가."


카일라의 이성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그 순간, 장치의 보랏빛 타이머는 여전히 째깍거리며 '5분'이라는 파멸의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 제단 지상에서 쿵쾅거리는 수많은 군화 소리와 함께 변경 백작 로만의 사병들이 제단을 포위하기 시작하는 무거운 진동이 지하 공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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