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의 계곡, 불꽃의 수호성
쿠구구구구!
머리 위 절벽에서 쏟아지는 핏빛 투기는 비명의 계곡 전체를 집어삼킬 듯 흉포했다. 제1기사단장 울리히 경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랑 투기’는 단순한 살기를 넘어 대기를 얼려버릴 듯한 압박감으로 마차를 짓눌렀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거대한 철퇴. 그 끝에 서린 강철 투기는 마차 지붕뿐만 아니라 그 안에 탄 데미안의 목숨마저 단숨에 지워버릴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전하!”
가웨인 경이 포효했다. 그는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마차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 쥔 ‘가웨인의 기사 서약 검’이 눈부신 청색 투기를 뿜어내며 낙하하는 철퇴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콰아아앙――!
강철과 강철이 충돌하는 파열음이 협곡 사이에 메아리쳤다. 충격파로 인해 마차의 사방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웨인은 6성급 최정상 기사다운 저력을 발휘해 철퇴의 직격을 비껴내려 했으나, 7성급에 육박하는 울리히 경의 압도적인 물리적 완력과 중력 가속도까지 더해진 일격은 무거웠다.
쩍, 쩌적!
가웨인의 발밑을 받치고 있던 마차 지붕이 무참히 가라앉았다. 가웨인의 입가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낡은 청색 갑옷 이음새에서 투기가 거칠게 흔들렸다.
“하찮은 쓰레기 황자의 가신이 제법 버티는구나!”
울리히 경이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가볍게 착지했다. 그의 손에 쥔 거대 철퇴가 대지를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그의 눈빛에는 오직 제1황자 에드워드의 지령을 완수하겠다는 무자비한 살의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제1기사단의 철벽 앞에 그 나약한 방패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그와 동시에, 협곡 양옆의 바위 틈새에서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제1기사단의 정예 살수들이 쇠뇌를 재장전하며 쏟아져 나왔. 설상가상으로 마차의 오른쪽 앞바퀴가 험한 바위에 걸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고립이었다.
“크르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주군을 노리는가!”
바르그가 야성적인 포효와 함께 마차 뒷문을 박살 내며 뛰어나갔다. 그의 전신에서 은빛 오라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바르그는 초인적인 속도로 도약하여 마차를 향해 날아오는 쇠뇌 화살들을 완력으로 쳐내고, 다가오는 중장기사들의 방패를 맨손으로 찢어발겼다.
그러나 적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협곡의 지형은 아군에게 극도로 불리했다.
“이봐, 황자님! 상단주에게 돈을 받은 만큼은 일해주겠지만, 저 괴물 기사단장을 상대로 정면 승부는 미친 짓이야!”
붉은 가죽 갑옷을 입은 용병 대장 사라가 쌍검 ‘아퀼라’를 휘두르며 울리히 경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쌍검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의 마력이 울리히 경의 목덜미를 겨누었으나, 울리히 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걱!
바람의 검격은 울리히 경의 전신을 감싼 흑랑 투기의 강철 피부에 닿는 순간, 불꽃만 튀긴 채 힘없이 산산조각 났다. 울리히 경이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묵직한 마력 파동이 사라를 덮쳤다.
“앗……!”
사라는 급히 쌍검을 교차해 방어했으나, 압도적인 완력에 밀려 뒤로 수십 미터를 미끄러지며 바위에 부딪혔다. 그녀의 입가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가웨인 경 역시 울리히 경의 집요한 철퇴 연격에 밀려 점차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가웨인의 기사 서약 검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무력의 격차는 명백했다. 이대로라면 5분도 버티지 못하고 모두가 비명의 계곡의 이슬로 사라질 판이었다.
마차 안, 데미안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각혈을 참아내고 있었다. 마력 회로 폐색율은 이미 81%를 가리키며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번뜩였다.
데미안은 인과율의 붉은 실 시야를 개안했다.
울리히 경의 전신을 흐르는 강철 마력의 순환계가 시각화되어 보였다. 빈틈이 없는 완벽한 방어벽처럼 보였으나, 그 마력의 속성은 극도로 차갑고 기계적인 ‘금속’과 ‘대지’에 치우쳐 있었다.
‘금(金)의 속성은 화(火)의 열기에 극도로 취약하다. 저 단단한 투기막을 깨부수려면 평범한 투기가 아닌, 개념을 녹여버릴 태초의 불꽃이 필요해.’
황국 내부에서 그런 불꽃을 다룰 수 있는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존재, 데미안의 심상에 기생하고 있는 그 영혼을 제외하고는.
데미안은 눈을 감고 자신의 심층 세계로 의식을 침잠시켰. 거대한 백색 사슬들이 얽혀 있는 심상 세계의 중앙, 붉은 용의 뿔을 지닌 거대한 무장 바르칸의 사념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데미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약한 인간 황자여. 드디어 나의 힘이 필요해졌는가? 나의 적룡 투기를 방출하면 저 애송이 기사단장 따위는 단숨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단, 그 대가로 네 육체의 주도권을 내게 넘겨라!]
바르칸이 광기 어린 사념을 뿜어내며 데미안의 의식을 잠식하려 들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정신 장벽 Class 2를 전개해 그의 정신적 침식을 차갑게 밀어냈다.
“착각하지 마라, 바르칸 대장군. 이건 거래다. 당신의 영혼은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에 묶여 있고, 내가 죽으면 당신 역시 영원히 소멸한다. 당신의 명예를 더럽힌 제1황자의 사냥개를 단죄하고 싶다면, 순순히 내 지시에 따라 마력을 대여해라.”
[크하하핫! 나를 협박하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로군! 좋다, 버텨낼 수 있다면 가져가 보아라!]
동의가 이루어진 순간, 데미안의 가슴에 새겨진 용인족의 계약 문양이 선명한 핏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현실로 눈을 떴다. 그의 왼쪽 눈동자가 완벽한 용인족의 금안(金眼)으로 변해 오드아이의 형상을 띠었다.
“가웨인 경! 검을 내밀게!”
데미안이 각혈을 토해내며 마차 문을 열고 외쳤. 그의 목소리에는 사법적 발언권의 파동이 실려 있어, 전장의 소음을 뚫고 가웨인의 영혼에 직접 꽂혔다.
가웨인은 본능적으로 주군의 명령에 복종하여, 울리히 경의 철퇴를 막아내던 기사 서약 검을 데미안의 방향으로 비스듬히 뻗었다.
데미안은 마차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가웨인의 검자루를 잡고 있는 그의 단단한 손목을 자신의 마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순간, 기형 마력 회로의 임시 우회 기술이 발동했다.
“아아아아악!”
데미안의 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뒤틀려 있던 그의 체내 마력 회로에, 바르칸의 8성급에 육박하는 초월적인 적룡의 화염 마력이 강제로 우회하여 흘러들어왔다. 우회 경로로 사용된 데미안의 미세 혈관들이 실시간으로 파열되며 전신의 피부 위로 붉은 반점들이 솟구쳤다. 전신이 불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데미안의 입가와 코에서 검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망가진 육체를 단순한 ‘도도관(전도체)’으로 삼아, 바르칸의 붉은 용혈 마력을 가웨인의 검에 직접 주입했다.
치이이이익!
가웨인의 낡은 기사 서약 검이 순식간에 붉은 용의 비늘 형상을 한 반투명한 에테르로 뒤덮였다. 검신을 따라 태고의 용인족 화염이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가웨인의 평범한 청색 투기가 적룡의 화염 마력과 공명하며, 폭발적인 파괴력의 화염 검기로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이, 이 힘은……!”
가웨인의 눈동자가 경악과 희열로 물들었다. 그의 검에 깃든 에너지는 이미 7성급 최정상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울리히 경! 주군의 이름으로, 너를 단죄하노라!”
가웨인이 대검을 치켜들고 허공을 향해 내리쳤.
적룡의 불꽃 검기가 거대한 용의 형상을 그리며 비명의 계곡을 붉게 물들였다. 울리히 경은 눈앞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불꽃의 위압감에 경악하며, 급히 자신의 거대 철퇴를 교차해 흑랑 투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말도 안 되는…… 크아아아악!”
쿠우우웅――!
붉은 화염 검격이 울리히 경의 철퇴에 닿는 순간, 울리히 경이 자랑하던 철벽의 강철 투기가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뒤이어 태고의 화염이 울리히 경의 거대한 무쇠 철퇴를 정면으로 관통했다.
쩌어억! 쾅!
용을 베었다는 전설적인 무기조차 모방한 울리히 경의 중장 철퇴가 수십 개의 파편으로 갈라지며 공중에서 산산조각 났다. 화염 검기의 여파는 울리히 경의 검은 철갑을 통째로 그을리고 가슴팍을 찢어발겼다.
“커헉……!”
울리히 경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수십 미터를 날아가 협곡 벽면에 처박혔다. 그의 철갑은 붉은 불꽃에 녹아내려 연기를 피우고 있었고, 6성급 무인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기, 기사단장님이 패하셨다!”
“괴물이다! 용의 불꽃이다!”
살수들과 남은 기사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에 치명상을 입은 울리히 경은 겨우 숨을 몰아쉬며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어둠 속으로 퇴각했다. 기적적인 대역전승이었다.
스으으으…….
가웨인의 검에 서려 있던 붉은 화염이 사라지고, 가웨인은 승리의 전율 속에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대역전의 카타르시스는 길지 않았다.
툭.
데미안의 손이 가웨인의 손목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마력 우회의 대가는 가혹했다. 데미안의 전신 혈관이 일시적으로 파열되어 그의 은빛 예복은 전신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서약의 심장은 불규칙하게 요동치다 이내 맥박이 극도로 희미해졌다.
“전하! 데미안 전하!”
가웨인이 급히 말에서 내려 쓰러지는 데미안을 품에 안았다. 데미안은 전신을 덜덜 떨며 검붉은 피를 토해냈고, 그의 흐려져 가는 오드아이 눈동자는 국경 지대의 하늘을 응시한 채 서서히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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