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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으로 향하는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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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그의 숭고한 충성 서약이 지하 투기장의 핏빛 모래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은빛 털을 지닌 거구의 수인족 전사가 백발의 병약한 황자 앞에 무릎을 꿇은 광경은, 그 자체로 기묘한 엄숙함을 자아냈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성(0성)의 황자가 오직 법리와 이성, 그리고 신들이 보증한 최초의 조약서 한 장으로 수도 지하의 가장 거대한 불법 노예 카르텔을 해체하고 최강의 야수 전사를 가신으로 영입한 순간이었다.


“바르그, 일어나게.”


데미안은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하얀 실크 손수건으로 가볍게 훔쳐내며 휠체어 등받이에 기대었다. 조약의 사슬을 강제로 현현시킨 반동으로 심장이 터질 듯 고동치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오히려 얼음처럼 투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체내 마력 회로 폐색율 81%.


심장 깊은 곳에서 바르칸의 붉은 영혼이 요동치며 마나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정신 장벽(Mental Shield Class 2)이 작동하여 그 끔찍한 고통을 이성에서 완벽히 격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네. 자크의 금고에서 압수한 장부를 챙기게. 재상 바르톨로메오의 비자금 세탁 흐름과 국경 광산 수탈 비리가 적힌 이 장부야말로 황성으로 돌아가 그들을 단죄할 결정적 스모킹 건이 될 걸세.”


데미안의 지시에 서기 루카스가 떨리는 손으로 붉은 가죽 장부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가웨인 경은 기사 서약 검을 거두며 주위를 경계했고, 해방된 바르그는 묵묵히 데미안의 휠체어 뒤로 가 마른 손잡이를 잡았다. 야수 특유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6성급 마력이 데미안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수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둘러 지하 투기장 ‘피의 피트’를 빠져나와 은빛 제비궁으로 복귀했다. 국경 지대로 향할 외교 마차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


같은 시각, 황성 중앙 집무실.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에서 재상 바르톨로메오가 보랏빛 장포를 걸친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은빛 제비궁의 시종장 베르너가 보낸 비밀 밀서가 쥐어져 있었다.


[제3황자 데미안, 국경 지대 관사에서 각혈하며 쓰러짐. 마력 회로가 완전히 폐색되어 가사 상태에 빠졌으며, 목숨이 경각에 달해 내일 오전으로 예정된 국경 조인식에 참석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함.]


“흐흐흐…… 나약한 폐물 놈, 결국 신들이 보증한 조약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했구나.”


바르톨로메오는 밀서를 촛불 위에 올려 태우며 비열하게 웃었다. 데미안이 위독하다는 베르너의 가짜 위독 보고 수령은 재상의 눈과 귀를 완벽히 가려놓았다. 데미안이 수도 지하에서 자신의 돈줄인 ‘피의 피트’를 박살 내고 바르그를 구출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재상은 데미안이 국경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방심에 빠졌다.


하지만 제1황자 에드워드는 달랐다.


황태자 자리를 노리는 군부의 수장이자 오만한 전쟁 영웅인 그는 재상보다 훨씬 치밀하고 잔인했다. 설령 데미안이 죽어간다 할지라도, 용인족과의 국경 조인식 자체가 평화롭게 타결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용인족과의 전쟁을 유도해 더 큰 군공을 세워야만 했다.


“울리히 경.”


에드워드의 부름에 검은 늑대 문양의 철갑을 입은 거구의 기사, 제1기사단장 울리히 경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무릎을 꿇었다.


“예, 황태자 전하.”


“제3황자가 위독하다는 보고가 있으나, 그 영악한 놈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른다. 제1기사단을 이끌고 국경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라. 만약 데미안의 마차가 보인다면, 황명의 체포령을 핑계로 그 자리에서 사살해라. 국경 지대는 이미 계엄령 하에 있으니, 군사법에 따라 반역죄로 즉결 처형했다고 보고하면 그만이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울리히 경이 허리에 찬 거대한 철퇴를 쓸어내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철혈 친위기사단의 최정예 병력이 어둠을 틈타 황성 외곽의 험준한 협곡, ‘비명의 계곡’으로 은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


새벽녘의 차가운 안개를 뚫고, 은빛 제비궁의 낡은 외교 마차가 국경 지대인 레드클리프 광산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의 운전석에는 가죽 모자를 깊게 눌러쓴 늙은 마부 한스가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소심해 보이던 노인이었으나, 고삐를 잡은 그의 굳은살 박인 손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굳건했다. 험난한 바위길과 가파른 경사로에서도 마차는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 험지 야전 운전의 대가다운 신들린 솜씨였다.


덜컹거리는 마차 내부.


데미안은 기형적인 마력 회로의 통증으로 인해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클로에가 조제해 준 마력 중화수를 한 모금 들이켜자, 타들어 가던 가슴속 열기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전하,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조금만 쉬어 가시는 것이…….”


루카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으나,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쉬어 갈 시간은 없네. 재상이 베르너의 거짓 보고에 속아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국경에 도달할 유일한 기회야. 하지만 에드워드 제1황자는 분명 군대를 움직였을 걸세. 그자는 사법적인 절차보다 무력을 맹신하는 자니까.”


데미안의 왼쪽 눈동자가 기이한 금빛으로 빛나며 오드아이의 형상을 띠었다. 바르칸의 영혼 마력이 체내에 안착하며 생긴 신체적 변이였다.


그때, 마차 창밖을 지키며 달리던 가웨인 경이 고삐를 당기며 마차 안을 향해 긴박하게 외쳤.


“전하! 후방에서 거대한 투기의 파동이 감지됩니다! 황실 제1기사단…… 철혈 친위기사단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두두두두――!


대지를 뒤흔드는 거친 말발굽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마차 뒤편의 지평선 위로, 검은 철갑을 두르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수십 명의 정예 중장기사들이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거대한 철퇴를 어깨에 걸친 제1기사단장 울리히 경이 타고 있었다.


“제3황자 데미안은 마차를 멈춰라! 황제 폐하의 직속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울리히 경의 사자후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며 메아리쳤. 6성급 기사의 투기가 담긴 목소리는 마차의 마필들을 위협하며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한스! 속도를 올리게!”


데미안이 차갑게 명령했다.


“이 늙은이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전하를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랴아!”


한스가 정령의 마법 채찍을 허공에 휘둘렀다. 채찍 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 바람의 마력이 말들의 다리를 감싸 안았고, 마차는 기적적인 속도로 가속하며 협곡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비명의 계곡(비명의 계곡)의 입구였다.


양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는 좁고 험난한 협곡. 울리히 경은 마차가 협곡으로 진입하자 사납게 웃었다.


“어리석은 놈들, 스스로 막다른 길로 기어들어 가는구나! 기사단, 포위 대형을 전개하라! 마차의 바퀴를 쇠뇌로 쏘아라!”


기사들이 일제히 쇠뇌를 겨누어 특수 가공된 강철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 비가 마차 뒷면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바르그, 가웨인 경!”


데미안의 지시와 동시에, 마차 뒷문이 열리며 은빛 털의 수인족 전사 바르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주군의 마차에 손대지 마라, 인간 놈들!”


바르그가 야수적인 괴성과 함께 허공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의 전신에서 실버빛 오라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며, 날아오던 강철 화살들을 완력으로 쳐내고 투기 장벽으로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가웨인 경 역시 말 위에서 기사 서약 검을 휘두르며, 마차의 취약한 바퀴 쪽으로 날아드는 화살들을 완벽하게 격퇴했다.


울리히 경은 수인족 전사의 등장을 보고 경악했다.


“수인족의 최정예 전사라니? 제3황자가 이종족의 괴물들을 가신으로 거느리고 반역을 꾀한 것이 사실이었군! 전군,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마라! 즉각 사살하라!”


울리히 경이 직접 자신의 중장 워호스에 투기를 불어넣으며 마차 바로 옆까지 추격해 왔다. 그의 거대한 철퇴가 마차의 측면을 내리치기 위해 붉은 투기를 뿜어내며 치솟았다.


데미안은 마차 창문을 열고, 바람에 휘날리는 백발 사이로 오드아이의 차가운 눈빛을 울리히 경에게 고정했다. 그의 손에는 황국 건국 초기 요한 대법관에게 전수받은 사법적 무기이자, 황국의 헌법이 명시한 절대적인 방패가 들려 있었다.


“제1기사단장 울리히 경! 그 무도한 철퇴를 거두어라!”


데미안의 목소리에 사법적 발언권(Judicial Voice)의 마력이 실렸다. 비명의 계곡 좁은 협곡 벽면에 공명하며 퍼져나간 그의 목소리는, 추격하던 기사들의 영혼을 직접 강타하며 심박수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나의 행보는 황국과 용인족 양국이 보증하는 ‘초국가적 외교 행위’이자, 만국 평화 조약의 갱신을 위한 Plenipotentiary(전권 대리인)의 합법적인 출정이네! 내 품에 들린 이 ‘용인족 국경 통행증’이 보증하는 바, 이를 방해하는 자는 양국 간의 조약을 파기하려는 반역자로 규정되어 즉각 처형당할 수 있네!”


“시끄럽다! 황제 폐하와 제1황자 전하의 체포령이 우선이다!”


울리히 경이 소리쳤으나, 기사들의 기마 대형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용인족 왕실의 마력이 각인된 통행증의 백색 신성 파동이 기사들의 마력을 위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지체하지 않고 최종 법적 카드를 꺼내 들었다.


“황국 헌법 제32조 ‘황명 초법적 거부권’을 선포하노라! 황국의 존망이 걸린 급박한 외교적 위기 상황에서, 전권 외교관은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마저 일시적으로 보류하고 독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초법적 권한을 지닌다! 울리히 경, 자네가 들고 있는 체포령은 이 헌법 조항에 의해 합법적으로 ‘효력 정지’되었네! 법을 어기고 나를 체포하려 든다면, 자네 역시 사법부의 단두대를 피하지 못할 걸세!”


“으, 윽……!”


울리히 경이 이를 갈았다. 황국의 헌법을 조목조목 인용하며 체포령 자체의 합법성을 흔들어버리는 데미안의 천재적인 법리적 공격에, 그의 철퇴가 허공에서 미세하게 멈칫했다. 기사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틈을 타, 늙은 마부 한스가 마차를 더욱 거칠게 몰았다.


“전하! 협곡의 가장 좁은 지형입니다! 꽉 잡으십시오!”


한스가 고삐를 꺾으며 마차를 바위 틈새로 아슬아슬하게 통과시켰다. 뒤따르던 중장기사들은 좁은 지형에 걸려 서로 충돌하며 대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바르그는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바위들을 야수적 완력으로 쳐내며 마차의 후방을 완벽하게 보호했다.


그러나 제1기사단장 울리히 경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대형이 무너지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강력한 투기를 다리에 집중해 절벽 벽면을 타고 마차보다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마차의 전방을 직접 타격해 멈춰 세우는 것이었다.


쿠구구구――!


마차의 바퀴가 비명의 계곡 험난한 바닥에 깔린 거대한 돌부리에 걸려 비정상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마차 내부의 루카스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데미안 역시 휠체어에서 밀려나며 기형적인 마력 회로에 극심한 과부하 통증을 느꼈.


“윽……!”


입가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차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절벽 위 어둠 속에서, 제1기사단장 울리히 경의 거대한 체구가 달빛을 등진 채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의 양손에 쥐어진 거대한 철퇴가 핏빛 살기와 강철 투기를 뿜어내며 폭풍처럼 회전했다.


“데미안! 여기서 끝이다!”


울리히 경의 포효와 함께, 마차 전체를 박살 내고 데미안의 목숨을 앗아갈 거대한 철퇴가 마차 지붕을 향해 무자비하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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