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피트, 어둠의 돈줄을 끊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어둠이 수도 룬가르드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밑바닥, 하층민 구역의 골목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사이로 마차의 바퀴가 축축한 진흙을 짓밟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덜컹거리는 외교 마차의 내부, 제3황자 데미안은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왼쪽 눈동자는 용인족 대장군 바르칸의 영혼 동조율이 상승함에 따라 차가운 금빛(金眼)으로 물들어 있었고, 오른쪽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흑색이었다. 기이한 오드아이의 시선이 안개 속을 예리하게 갈라놓았다.
“황자 전하, 이 앞입니다.”
마차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누더기 옷을 걸친 날렵한 체구의 소년이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수도 지하 정보 길드 ‘쥐굴’의 대장, 로이였다. 소년의 눈빛은 밤하늘처럼 어두웠으나, 데미안을 바라볼 때만큼은 기묘한 경외감으로 반짝였다.
“재상 바르톨로메오가 국경 지대에 배치할 사설 용병단을 고용하기 위해 움직인 자금줄…… 그 원천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이 하수도 밑바닥에 숨겨진 불법 지하 투기장, ‘피의 피트’입니다.”
데미안은 마른 손가락으로 무릎 위에 놓인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세계수의 정화 가루 덕분에 마력 회로의 폭주는 잠시 가라앉았으나, 전신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통증과 80% 수준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회로 괴사율은 그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노예상 자크가 운영하는 곳이군.”
“예, 전하. 자크는 재상의 묵인하에 국경 지대에서 불법으로 이종족들을 납치해 이곳 투기장의 노예로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베팅과 노예 밀매로 벌어들이는 ‘황국 에테르 코인’의 양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재상의 사설 군대 자금은 전부 그 자크의 금고에서 세탁되어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전생에 국제 분쟁 전문 변호사로서 수많은 불법 금융 카르텔을 해체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강력한 무력을 지닌 재상이라 할지라도, 그 무력을 유지할 ‘어둠의 돈줄’이 끊어진다면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질 터였다.
“가웨인 경.”
“예, 전하.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차 구석에서 낡았으나 먼지 하나 없이 닦인 푸른빛 갑옷을 입은 사내가 묵직하게 대답했다. 가웨인 경의 어깨 독 상처는 정화 가루의 잔여 마력 덕분에 완벽히 해독되어, 그의 전신에서는 6성급 최정상 기사 특유의 단단한 투기가 은은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가세. 적들이 국경에서 칼날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서 그들의 심장을 먼저 쥐어짜 주지.”
***
하층민 구역의 무너진 창고 지하, 비밀 철문을 지나 내려간 지하 세계는 지상과는 전혀 다른 광기와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축축한 대리석 벽면을 따라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피비린내와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둥글게 파인 거대한 모래 경기장, 일명 ‘피의 피트’ 주변에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귀족들과 부패한 상인들이 광기에 찬 함성을 지르며 에테르 코인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철창 너머로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경기장 중앙에서는 이종족 노예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고, 관중석의 인간들은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보며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데미안은 휠체어에 앉아 그 광경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인과율의 시야가 활성화되자, 투기장 전체를 휘감고 있는 핏빛 기만의 실타래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 경기장 구석의 가장 크고 튼튼한 쇠창살 안쪽에서 데미안의 시선이 멈췄다.
그곳에는 전신이 은빛 털로 덮인 거구의 늑대 수인족 전사가 쇠사슬에 묶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온몸에 채찍질과 고문의 흔적이 가득했고, 흘러내린 피가 은빛 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처참한 몰골 속에서도, 늑대 수인의 눈동자만큼은 사그라지지 않는 야성적인 자부심과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수인족 전사, 바르그였다.
“저 수인은…….”
가웨인 경이 검자루를 쥐며 낮게 중얼거렸다.
“6성급에 달하는 야수 혼을 지닌 전사입니다. 저 정도의 강자가 마력 억제 족쇄에 묶여 짐승처럼 구경거리가 되고 있군요.”
데미안은 바르그의 목덜미와 사지에 채워진 검은 쇠사슬을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사슬이 아니었다. 수인족의 야수 마력을 강제로 억압하여 전신을 마비시키는 저주받은 마도 구속구였다. 바르그는 쇠창살 밖의 인간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으나, 사슬이 조여들 때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전신을 가르르 떨었다.
“누가 감히 허가도 없이 내 신성한 투기장에 발을 들이미는가?”
그때, 화려한 벨벳 모피 코트를 걸치고 손가락마다 값비싼 마력 보석 반지를 낀 비대한 체구의 사내가 사병들을 거느리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 노예상 연합의 수장, 자크였다. 그의 입가에는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호, 이게 누구십니까? 황성에서 유폐되어 숨만 쉬고 계신 줄 알았던 폐물 황자, 제3황자 데미안 전하가 아니십니까? 이런 더러운 지하 세계에는 무슨 일로 왕림하셨는지요?”
자크의 경비병 수십 명이 순식간에 데미안과 가웨인의 사방을 포위했다. 그들이 쥔 마도 창과 쇠뇌에서 살기 어린 에테르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일촉즉발의 위기였으나, 데미안은 휠체어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크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크. 자네가 재상 바르톨로메오에게 매달 납부하는 비자금의 세부 내역서, 그리고 레드클리프 광산에서 불법으로 밀수한 마력 결정을 이곳 투기장의 판돈으로 세탁한 장부 사본을 확보했네.”
데미안의 차분한 목소리에 자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자크는 코웃음을 치며 주머니에서 채찍을 꺼내 들었다.
“장부 사본이라니요? 전하, 무슨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곳의 수인족들은 모두 황국의 국경 수비대와 합법적으로 맺은 ‘전쟁 포로 인도 계약서’에 의거해 데려온 자들입니다. 제국 군사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합법적인 노예들이란 말입니다!”
자크는 품 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양피지 서류를 꺼내 흔들었다. 변경 백작들과 군부의 서명이 담긴 가짜 포로 계약서였다. 적들은 자신들의 불법 행위를 황국의 군사법이라는 제도적 장벽 뒤에 숨겨두고 있었다.
“합법이라…….”
데미안은 품 안에서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를 꺼내 천천히 펼쳤다. 양피지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백색 광채가 지하 투기장의 어두운 피비린내를 정화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
“자크. 자네가 신봉하는 그 황국의 군사법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만국 평화 조약’의 초국가적 상위법 우선 원칙 앞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네. 이 조약의 제14조 ‘만국 이종족 노예제 제한령’에 따르면, 합법적인 국가 간의 전쟁 선포 없이 국경 지대에서 무단으로 납치된 이종족은 즉시 석방되어야 하며, 이를 위반한 자의 모든 자산은 동결 및 압수당한다고 명시되어 있지.”
데미안은 루카스가 밤새 작성한 공식 사법 압수장을 들어 올렸다. 전임 수석 대법관 요한의 붉은 사법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공식 문서였다.
“이 시간부로 ‘피의 피트’에 존재하는 모든 황국 에테르 코인과 불법 자산을 전량 압수하노라. 또한, 불법 노예 밀매 및 세금 포탈 혐의로 자네를 사법 기소하겠네.”
자크의 얼굴이 분노와 당황으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보석 반지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
“미친 황자 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이곳은 황성이 아니다! 황법이 미치지 않는 어둠의 세계란 말이다! 경비병들, 저 쓰레기 황자와 늙은 기사 놈의 목을 베어 경기장 모래밭에 처박아라!”
자크의 명령과 함께 수십 명의 사병들이 마도 무기를 치켜들며 데미안을 향해 돌격했다. 마도 창 끝에서 푸른색 에테르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웨인 경.”
“수호하겠나이다!”
가웨인 경이 앞으로 나서며 기사 서약 검을 지면을 향해 꽂았다.
쿠구구궁――!
가웨인의 전신에서 눈부신 강철 투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데미안의 휠체어 사방을 감싸는 단단한 ‘강철 투기 장벽’을 형성했다. 사병들이 날린 에테르 창격과 쇠뇌 화살들이 가웨인의 투기 장벽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으나, 장벽은 단 한 치의 균열도 없이 완벽하게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6성급 최정상 기사의 압도적인 무력이 지하 공간을 진동시켰다.
“이, 이 기사는 대체……!”
사병들이 가웨인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자크는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쇠창살 뒤에 갇혀 있던 바르그를 가리켰다.
“바르그! 저 백발의 황자 놈을 찢어 죽여라! 그러면 오늘 밤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 죽여라!”
자크가 지배의 붉은 채찍을 휘두르며 바르그의 족쇄에 연결된 마법 제어 장치를 가동했다. 찌르르한 전류 마력이 바르그의 온몸을 강타했고, 늑대 수인은 고통스러운 포효를 지르며 쇠창살 문을 부수고 경기장 모래밭으로 뛰쳐나왔.
바르그의 거구에서 야수적인 살기가 폭발했다. 그의 날카로운 발톱이 모래를 움켜쥐며 데미안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 채, 오드아이의 눈빛으로 다가오는 바르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정신 장벽(Mental Shield Class 2)이 전개되어 바르그가 내뿜는 야수적인 살기 압박을 완벽히 무력화했다.
데미안은 인과율의 시야로 바르그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늑대 수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인간들의 배신과 기만으로 가득 찬 비참한 트라우마와,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숭고한 전사의 명예가 서려 있었다.
데미안은 손을 들어 가웨인의 검을 제지하고, 바르그를 향해 나지막하지만 장내를 진동시키는 목소리로 외쳤.
“수인족의 전사여. 저 비열한 노예상의 거짓 약속에 속지 말라. 그는 자네를 풀어줄 생각이 없네. 자네가 나를 죽이는 순간, 자네는 황자 시해범이 되어 영원히 어둠 속에서 처형당할 뿐이네. 내가 자네에게 진짜 ‘합법적인 해방’과 명예를 주지.”
바르그는 데미안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거대한 늑대 발톱이 데미안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허공을 갈랐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바르그는 데미안의 차갑고도 진실된 오드아이의 눈빛,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의 신성한 인과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것은 태고의 신들이 자신들의 종족과 맺었던 숭고한 언약의 냄새였다.
크르르르…….
바르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자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늑대 수인은 자신을 지배하려던 채찍을 든 노예상을 향해 분노의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이 짐승 놈이 감히 누구를 노려보는 거냐!”
자크는 당황하여 채찍을 미친 듯이 휘둘렀으나, 바르그는 더 이상 그의 제어 장치에 굴복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천천히 휠체어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백발이 지하의 바람에 흔들렸고 목에 새겨진 조약의 사슬 흔적이 붉게 빛났다. 그는 쇠창살에 갇힌 바르그의 목덜미에 채워진 검은 마력 차단 족쇄를 가리켰다.
“노예상 자크. 자네가 채워둔 그 족쇄와 위조된 포로 계약서는, 신들이 보증한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제14조를 위반한 명백한 불법 물증이네.”
데미안은 품 안에서 요한 대법관의 사법 인장이 찍힌 공식 압수장을 자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 시간부로 수인족 전사 바르그의 신변을 황국 임시 조약 대리인의 권한으로 합법적 압수 및 인도할 것을 선포하노라. 자네의 어둠의 돈줄은 여기서 끝이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