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유산과 은빛 가루
아르웬 대원로가 약병의 마개를 열자, 은빛 가루가 데미안의 가슴 위로 아련하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가루가 아니었다. 태초의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품은 가장 순수한 정화의 에테르. 데미안의 살갗에 닿은 은빛 입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미세한 정령들처럼 그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읍……!"
의식을 잃은 데미안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체내에서는 폭주하던 용인족 대장군 바르칸의 붉은 마력과, 데미안 본연의 뒤틀린 마력 회로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육체를 사정없이 파괴해가던 참이었다. 하지만 은빛 정화의 가루가 닿는 순간, 날뛰던 두 마력이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 고요한 은빛 장막이 내리덮이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데미안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깊은 새벽이었다. 천막 안의 공기는 차분했고, 은은한 백합 향과 약초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침상 곁을 지키던 약제사 클로에가 급히 다가왔다. 그녀의 눈가는 밤을 지새운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클로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엘프의 대원로께서 주고 가신 은빛 가루 덕분에 폭주하던 마력 회로가 기적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회로 폐색율이 85%를 넘어가며 심장이 멈추기 직전이었는데, 지금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으셨어요."
데미안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쇠약했지만, 심장을 짓누르던 타오르는 듯한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목덜미에 새겨진 조약의 낙인 흔적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때 침상 구석에서 가웨인 경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웨인의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던 검푸른 독소의 기운은 이미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가웨인 경의 상처는 정화 가루의 잔여 마력과 제가 준비한 해독약을 조합해 완벽히 치료했습니다. 이제 투기를 운기하시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
클로에가 덧붙였다. 데미안은 자신의 가슴팍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클로에에게 물었다.
"내 마력 회로에 대해…… 더 알아낸 것이 있나?"
클로에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깊은 슬픔과 분노가 교차했다.
"전하…… 사실 전하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는 선천적인 질병이 아닙니다."
"호오.
데미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체내 마나 흐름을 정밀 분석한 결과, 전하께서 갓 태어나셨을 때 누군가 의도적으로 회로의 중심을 뒤틀어 놓은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정교하고 잔인한 마법적 훼손이었습니다. 이 배후에는…… 황비 세실리아와 당시 황실 수석 의원이었던 레온이 있습니다."
황비 세실리아. 그리고 이미 소멸한 주치의 레온.
데미안의 친모인 아리아 황녀의 성국 혈통을 경계한 황비가, 데미안이 비범한 신성 마력을 각성하지 못하도록 태어나자마자 그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이었다.
데미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나를 평생 병약한 폐물로 유폐시킨 자들의 짓답군. 하지만 그 뒤틀린 회로 덕분에 역설적으로 바르칸의 영혼 마력을 우회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되었으니, 인과율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야."
그때, 천막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은빛 제비궁의 늙은 집사 토마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황자 전하! 큰일났습니다. 베르너 시종장이 움직였습니다!"
베르너 시종장. 황비와 재상의 명령을 받아 데미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황성 내부의 뱀이었다.
"그자가 전하께서 각혈을 하며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재상 바르톨로메오에게 밀고하려 합니다. '제3황자 데미안이 위독하여 조약 대리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가짜 보고서를 작성해 전령을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토마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말로 타이르며 막아서려 했으나, 시종장은 저를 밀쳐내고 황비의 권위를 내세우며 당장 재상에게 밀서를 보내겠다고 날뛰고 있습니다. 이대로 밀서가 재상의 손에 들어가면, 내일 있을 국경 조인식은 무산되고 군대가 즉각 국경을 침공할 것입니다!"
데미안은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그의 왼쪽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금빛으로 번뜩였다.
"가세, 토마스. 가웨인 경, 바르그. 뱀의 목덜미를 낚아챌 시간이다."
***
임시 사절단 관사 복도.
베르너 시종장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밀서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품에 넣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웨인 경과 수인족 전사 바르그가 문 앞을 철벽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바르그는 야수적인 완력을 뿜어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비키시오! 나는 황비 마마의 명을 수행하는 시종장이다! 감히 몰락한 기사와 짐승 따위가 내 앞길을 막아서는가?"
베르너가 소리쳤다.
그때, 가웨인의 등 뒤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와 함께 데미안이 나타났다.
"베르너 시종장. 밤이 깊었는데 어디로 그리 바삐 가시는가?"
데미안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물리적인 마력은 전혀 실려 있지 않았지만, 베르너는 등 뒤로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황자 전하…… 몸도 편치 않으신 분이 침상에 누워 계시지 않고 무슨 짓입니까? 저는 지금 전하의 위독한 상태를 황성에 보고하려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황실 시종 통제관으로서의 정당한 임무입니다!"
"정당한 임무라."
데미안은 휠체어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변호사 시절, 상대방의 위증을 확신했을 때 짓던 버릇이었다.
"황비 세실리아와 재상 바르톨로메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정보를 팔아넘기는 것도 정당한 임무에 포함되나?"
베르너의 안색이 순간 흙빛으로 굳어졌다.
"무, 무슨 터무니없는 음해를……!"
데미안은 품 안에서 얇은 종이 뭉치를 꺼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에는 베르너의 친필 서명이 담긴 비밀 서신들과, 그가 마테오 상단의 밀수 루트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뇌물을 챙긴 장부 사본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은……!"
"자네가 황비 몰래 재상에게 제비궁의 정보를 밀고하고 챙긴 뇌물 수수 내역이네. 마테오 대행수의 상단 장부를 조금만 조사해 보니 자네 이름이 아주 보기 좋게 적혀 있더군."
베르너는 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바르그가 그의 등 뒤를 완벽히 차단했다.
"황자 전하! 설사 이 장부가 진짜라 한들, 저는 황비 마마의 직속 시종입니다! 전하 따위가 나를 사법적으로 처단할 권한은 없습니다!"
베르너가 황비의 권위를 내세우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
데미안의 흑안과 금안이 베르너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빛났다. 그의 손끝에서 백색으로 빛나는 미세한 '조약의 사슬'이 흘러나왔다. 사슬은 뱀처럼 베르너의 목덜미를 부드럽고도 서늘하게 휘감았다.
"황실 법령 제42조를 잊었나 보군. 황실 구성원을 기만하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 외부 파벌과 결탁한 자는 '황실 가례 연좌제'에 처해진다. 자네 한 명의 파멸로 끝나지 않아. 자네의 부모, 형제, 자식들까지 모두 광산의 노예로 팔려 가거나 처형당하게 되지. 황비가 자네의 가족들을 구해주리라 믿나? 아니, 꼬리를 자르기 위해 가장 먼저 자네 가족의 목을 벨 터이지."
베르너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데미안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철저한 황실 법령에 기반한 사법적 사형 선고였다.
"전, 전하…… 제발……."
데미안은 사슬을 조금 더 단단히 조이며 베르너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
"베르너 경. 자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지."
데미안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목숨을 건 삼중 첩자가 되게. 재상에게는 내가 위독하여 내일 조인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거짓 정보를 전하게. 만약 조금이라도 딴마음을 품는 순간, 이 사슬이 자네의 심장을 가장 먼저 으깨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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