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오아시스의 왜곡
붉은 안개가 대지 위를 낮게 기어 다니고 있었다. 황국과 용인족의 국경 지대인 황혼의 장막. 그 황량한 고원 한가운데 위치한 ‘붉은 마력천’은 마치 굳어가는 피처럼 검붉은 빛을 띠며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자극적인 유황 냄새와 정제되지 않은 에테르의 기운이 사방에 가득했다.
휠체어에 앉은 데미안의 백발이 건조한 고원의 바람에 흩날렸다. 그의 왼쪽 눈동자는 여전히 용인족의 그것과 닮은 금빛으로 빛나는 오드아이 상태였다. 광장에서 입은 뺨의 상처는 얇은 가죽 패치로 가려져 있었지만, 병색이 완연한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창백했다.
“전하, 이곳의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가뜩이나 회로 폐색율이 85%를 넘기셨는데, 이런 고농도 오염 마력 지대에 몸을 노출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클로에가 데미안의 어깨에 두꺼운 모피 담요를 여며주며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위 기사 가웨인 경의 상태 역시 온전치 못했다. 가웨인은 왼쪽 어깨를 붕대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는데, 그 붕대 틈새로 검푸른 독소의 기운이 어렴풋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난밤 철혈의 문서고에서 그림자 이빨의 독 단검에 스친 상처가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은 탓이었다.
가웨인은 뺨이 수척해진 상태에서도 이를 악물며 데미안의 곁을 굳건히 지켰다. 수인족 전사 바르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붉은 마력천 주변의 바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멈추시오! 이곳은 황국 친위대와 변경 수비대의 통제 구역이오. 황자라 할지라도 영지 내 자치법에 의거해 허가 없는 진입을 금하오!”
그때, 붉은 마력천으로 향하는 길목을 단단히 가로막은 무리가 있었다. 화려한 모피 코트를 걸치고 손가락마다 값비싼 마력 보석 반지를 낀 비대한 사내. 레드클리프 영지 전체를 지배하는 부패한 변경 영주, 로만 백작이었다. 그의 뒤에는 중장갑으로 무장한 사병 수십 명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창을 세우고 있었다.
로만 백작은 데미안의 휠체어와 가웨인의 상처를 훑어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제3황자 전하. 황성에서 무슨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 국경 지대는 용인족의 침공 위협이 도사리는 최전선입니다. 변경 영주인 저의 군사적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황실의 일원이라 해도 신변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당장 회차하십시오.”
명백한 적대감이자 기만이었다. 로만 백작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진입을 막아서는 이유를 데미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인과율의 붉은 실 시야를 개안하자, 로만 백작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핏빛 실들이 저 멀리 레드클리프 마력 광산의 지하 깊은 곳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탐욕의 흔적이었다.
데미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성대에서 잔잔한 백색 마력 파동이 퍼져나갔다.
“로만 백작.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실의 영장이나 변경의 자치법을 논하기 위함이 아니네.”
데미안은 품 안에서 붉은 가죽으로 감싸진 웅장한 문양의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용인족 사신단장 볼카르가 직접 서명하고 용인족 왕실의 마력이 각인된 최고 등급의 외교 문서였다.
“이것은 용인족 본국이 보증하는 ‘국경 통행증’이네. 이 문서가 가리키는 바는 단 하나. 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 대리인인 나의 행보는 황국과 용인족 양국 모두가 보증하는 초국가적 외교 행위라는 것이지. 이를 가로막는 자는 양국 간의 조약을 파기하려는 반역자로 규정되어 즉각 처형당할 수 있네. 자네의 사병들이 내 호위 기사들의 검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데미안의 서늘한 경고에 로만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웨인이 비록 독으로 인해 제 실력을 내기 힘들다 해도, 그 기세만큼은 6성급 최정상 기사의 그것이었다. 바르그 역시 야수적인 완력을 뿜어내며 으르렁거렸다. 로만 백작은 침을 삼키며 마지못해 길을 열었다.
“……실사를 하겠다는데 막을 명분은 없겠군요. 하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데미안 일행은 붉은 마력천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물가에 다다르자 유황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데미안은 휠체어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대기 중에 흐르는 미세한 정령 마력에 집중했다. ‘정령의 음성 감응도’ 권능이 발동하는 순간, 그의 귀에 숲과 대지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프다…… 타들어 간다…….’
그것은 붉은 마력천에 깃든 대지 정령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정령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데미안은 인과율의 시야를 통해 붉은 온천수 밑바닥으로 이어지는 검붉은 마력의 왜곡을 역추적했다. 온천의 오염은 용인족이 주장하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온천수 지하 깊숙한 곳, 바위 틈새로 숨겨진 거대한 철제 방류관이 보였다. 그 방류관은 레드클리프 마력 광산의 지하 채굴장에서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로만 백작이 광산에서 고밀도의 레드클리프 에테르 원석을 불법으로 채굴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맹독성 광산 폐수를 용인족의 신성한 온천인 붉은 마력천에 무단으로 방류해 온 것이었다. 이 오염으로 인해 용인족들이 마력 공급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것이 양국 간의 거대한 영토 분쟁의 도화선이 된 진짜 원인이었다.
“로만 백작. 자네가 숨기려던 진실이 바로 이것이었군.”
데미안이 방류관의 위치를 가리키며 로만을 매섭게 응시하자, 백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탐욕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이건 음해입니다! 저런 방류관 따위는 난 모르는 일――!”
백작이 발뺌하려던 바로 그 순간, 사전에 매수되어 있던 그의 심복 사병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데미안의 폭로를 막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방류관 내부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마력 폭발 장치를 강제로 가동했다.
쿠구구구궁!
지하에서 불길한 진동이 울리며 붉은 마력천의 물결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방류관 내부의 불안정한 에테르가 폭발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거대한 마력 폭풍이 지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로만 백작이 불법 채굴하던 레드클리프 에테르 원석의 폭주 마력이 더해진 파멸적인 에너지였다.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마력이 역류하고 있습니다!”
루카스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데미안은 피하지 않았다. 이 폭발이 일어나 방류관과 불법 장부가 파괴된다면, 내일 있을 조인식에서 용인족과의 신뢰를 다질 유일한 사법적 물증이 사라지게 된다. 전쟁을 막을 기회가 영구히 소멸하는 것이었다.
물리적인 마력이 전혀 없는 데미안은 자신의 심상 세계로 의식을 침투시켰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 기생하고 있는 용인족 대장군 바르칸의 붉은 영혼이 요동치고 있었다.
‘바르칸, 당신 종족의 신성한 온천을 파괴하려는 저들의 탐욕을 보고만 있을 셈인가? 내게 힘을 빌려라!’
데미안은 품 안에서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바르칸의 용혈 결정’ 촉매를 움켜쥐었다. 바르칸의 영혼이 데미안의 의지에 공명하며 뜨거운 마력을 뿜어냈다. 데미안은 자신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를 강제로 우회하여 그 붉은 에테르를 폭발의 중심부로 내리꽂았다.
웅――!
용혈 결정의 영적 촉매가 폭주하는 에테르와 반응하며, 거대한 폭발 에너지를 한순간에 억누르고 안정시켰다. 붉은 마력천의 소용돌이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고, 폭발 장치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무력화되었다. 데미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웨인을 시켜 방류관 입구에 걸려 있던 로만 백작의 인장이 찍힌 불법 채굴 및 폐수 방류 장부를 압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이럴 수가…… 마력이 없는 황자가 어떻게 그런 폭주를……”
로만 백작이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완벽한 물증을 확보한 데미안의 승리였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타 종족의 영혼 마력을 억지로 끌어다 쓴 반동과 오염된 마력에 직접 접촉한 충격이 데미안의 병약한 신체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그의 마력 회로 폐색율이 실시간으로 요동치며 심장에 극심한 과부하가 걸렸다.
“컥……!”
데미안은 허리를 꺾으며 거친 각혈을 쏟아냈다. 하얀 모피 담요 위로 검붉은 선혈이 튀었다. 그의 왼쪽 금안이 미친 듯이 흔들렸고, 머릿속에서 바르칸의 복수심 섞인 사념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와 그의 자아를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했다. 극심한 자아 분열의 고통이었다.
“전하! 전하!”
루카스와 클로에의 비명 같은 외침을 마지막으로, 데미안의 시야는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
***
그날 밤, 국경 지대에 마련된 외교 사절단의 임시 천막 안.
침상에 누운 데미안의 호흡은 실낱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클로에가 급히 달여온 마력 중화수도, 은빛 백합 정제유도 이번만큼은 아무런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바르칸의 영혼 기생으로 인한 자아 붕괴와 육체적 괴사가 임계점을 돌파해 생명이 경각에 달한 상태였다.
천막 내부의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불길한 죽음의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우던 그 순간.
스으으으…….
천막의 가죽 틈새로 신비롭고 차가운 은빛 마력의 바람이 소리 없이 흘러들어왔다. 은색 정령 마력의 입자들이 허공에서 아른거리며, 서서히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칼과 전신에서 맑은 정령 마력을 아른거리는 극도로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엘프 노부인. 성지 엘프하임의 대변인이자 대원로인 아르웬이었다.
아르웬 대원로는 침상 옆에 조용히 서서, 죽어가는 데미안의 얼굴을 깊고 조용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끝에는 신비로운 은빛으로 빛나는 정령의 가루가 든 약병이 쥐어져 있었다. 세계수의 정화 능력이 깃든 성물이었다.
아르웬은 데미안의 감겨진 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종족의 영혼을 품고도 이토록 공정함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영혼이라니…… 그대의 투쟁이 이 세계의 인과를 어디로 이끌지 지켜보겠노라.”
아르웬 대원로가 약병의 마개를 열자, 은빛 가루가 데미안의 가슴 위로 아련하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