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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의 사슬이 현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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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유황 냄새와 타오르는 오존의 열기가 폐부를 찢을 듯이 밀려들었다.


이서준은 격렬한 기침과 함께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낯선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뇌리를 헤집고 들어왔다.


‘이서준. 국제 분쟁 전문 변호사.’

‘그리고…… 데미안. 에테르 마력도 없는 황실의 수치이자, 은빛 제비궁에 유폐되어 있던 제3황자.’


상반된 두 개의 자아가 뒤엉키며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나 이서준은 본능적으로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시야가 붉게 번지며 거대한 대리석 기둥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황국의 심장부, 황국 의사당이었다.


“더 이상의 기만은 용납하지 않겠다, 인간들이여!”


귀를 찢는 듯한 호통이 의사당 장내를 뒤흔들었다.


이서준—아니,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붉은빛 비늘과 황금색 뿔을 거만하게 드러낸 거구의 용인족, 볼카르 사신단장이 오만한 눈빛으로 황국의 의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5성급 마력의 위압감에 의사당에 모인 황국 국수주의 의원 연합의 정치가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백발에 병색이 완연한 18세 청년의 육체. 목에는 붉은 조약의 쇠사슬 흔적이 낙인처럼 아른거리고 있었고, 체내의 마력 회로는 뒤틀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력 회로 폐색율 80%…….’


조금만 마력을 움직여도 심장이 터져 죽을 수 있는 최악의 병약한 신체였다. 하지만 데미안의 눈에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거나 계약을 위반하려는 자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인과율의 붉은 실이었다.


“바르칸 대장군이 실종된 것은 황국의 명백한 도발이다!”

볼카르가 붉은 가죽 양피지 조약서를 탁자 위에 거칠게 내던지며 외쳤다.

“이 시간부로 황혼의 장막 국경 지대에 위치한 레드클리프 마력 광산의 모든 영유권을 용인족에게 무상 영구 이전하라! 3일 내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용인족의 붉은 발톱 군단이 황도를 피로 물들일 것이다!”


전쟁 선포나 다름없는 협박이었다. 황국의 실권을 쥔 바르톨로메오 재상은 차가운 보랏빛 장포를 걸친 채 묵묵부답이었고, 다른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다. 그들은 이미 병약하고 쓸모없는 제3황자인 데미안을 이 자리에 앉혀 외교적 패배의 희생양으로 삼을 제물로 낙점한 상태였다.


“이 조약은 원천 무효입니다.”


그때, 의사당 구석에서 가냘프지만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휠체어에 앉아 있는 백발의 황자, 데미안에게 쏠렸다. 바르톨로메오 재상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볼카르 사신단장은 코웃음을 쳤다.


“무능한 제3황자가 감히 어디서 입을 여는가? 무력도 없는 나약한 인간 따위가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겠다는 것인가?”


데미안은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무릎 위에 얹어 두었던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것은 그가 은빛 제비궁 지하 깊은 곳에서 목숨을 걸고 발굴해 낸, 초대 황제와 이종족 수장들이 피로 서약한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였다.


“볼카르 사신단장. 당신이 들이밀고 있는 레드클리프 영토 할양 요구는 고대 만국 조약법 제7조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목소리에 현대 법학의 논리적 이성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인과율의 붉은 실 시야를 통해 볼카르의 목줄기에 얽힌 거짓의 실타래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고대 만국 조약법 제7조에 명시되기를, ‘양국 간의 국경 분쟁 시, 선제 군사 도발을 감행한 국가의 영유권 주장은 원천 무효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은 바르칸 대장군의 실종을 황국의 도발이라 주장하며 전쟁을 협박하고 있지요.”


“그것이 사실이 아닌가! 우리 대장군이 황국 국경 수비대에 의해 납치당했다!”


“거짓말입니다.”


데미안이 볼카르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바르칸 대장군이 실종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점은 사흘 전 밤입니다. 하지만 용인족의 선발대인 붉은 발톱 군단이 국경의 레드클리프 완충 지대를 침범해 진형을 구축한 것은 나흘 전 낮이지요. 즉, 당신들은 도발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국경 조약을 위반하고 군사를 움직였습니다. 이는 명백한 기망이자 선제 도발입니다.”


“무슨 억지인가! 증거가 있는가?”

볼카르가 격분하며 마력을 폭발시키려 했다. 5성급 용인족의 붉은 투기가 의사당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굴하지 않고 최초의 만국 평화 조약 원본 양피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 조약서는 단순한 종이가 아닙니다. 세계의 근원 마력이 보증하는 절대적인 계약 마법입니다. 이 조약의 서약자로서 선포하노니, 계약을 기만하고 거짓을 말하는 자의 마력을 봉인하라!”


순간, 고대 양피지 원본에서 눈부신 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스스스슥!


허공에서 인과율의 백색 사슬들이 물리적인 형태를 갖추며 현현했다. 사슬들은 거친 쇠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볼카르 사신단장의 전신과 황금빛 뿔을 휘감아 내렸다.


“끄아악! 이, 이게 무슨…… 내 마력이!”


볼카르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전신을 감싼 백색 사슬이 그의 붉은 투기를 강제로 압착하여 체내로 밀어 넣었다. 법과 계약의 정당성이 물리적인 힘을 압도하는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의사당 내부의 의원들과 재상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약법 제7조에 의거, 용인족의 즉각적인 영토 할양 요구는 법적으로 기각됩니다.”

데미안은 피를 말리는 고통 속에서도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다만, 바르칸 대장군의 신변에 관한 조사는 양국 공동으로 진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협상은 잠정 유예하며, 3일의 Recess(휴회)를 선포합니다.”


사슬의 압박에 질식해가던 볼카르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인간 황자의 나약한 육체 뒤에 도사린, 세계의 법칙을 지배하는 거대한 사법적 권능을 똑똑히 느꼈다.


“……좋다. 3일의 유예를 주마. 하지만 대장군의 신변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땐 정말 끝이다.”


볼카르가 사슬의 구속이 풀리자마자 헐떡이며 뒤로 물러섰다. 용인족 사신단은 기세가 완전히 꺾인 채 의사당을 빠져나갔다.


바르톨로메오 재상은 음험한 눈빛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놀라운 법리적 재능이군, 제3황자여. 그렇다면 이 국경 분쟁의 책임도 그대가 져야겠지.”


재상은 즉석에서 데미안을 황국의 ‘임시 조약 대리인’으로 임명하는 공식 서류를 내밀었다. 책임을 떠넘겨 처단하려는 교활한 정략적 올가미였다. 데미안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깃펜을 들어 서류에 자신의 진짜 서명을 새겼다.


스윽.


서명이 완료되는 순간, 고대 조약 마법의 거대한 인과율 피드백이 데미안의 기형적인 마력 회로를 강타했다. 심장이 강제로 박동을 멈추려는 듯한 극심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우윽……!”


데미안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하얀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마력 회로 폐색율 80%의 벽이 그의 생명력을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가웨인 경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데미안의 시야는 급격히 암전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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