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검이 남긴 한
낙일곡의 밤은 깊고 질척였다. 검총의 틈새를 메운 안개는 한낮의 피비린내를 지워내지 못한 채, 녹슨 철 냄새와 뒤섞여 소검헌(小劍軒)의 낡은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사야는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전신을 찢는 듯한 통증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흙먼지와 굳은 피로 범벅이 된 삼베옷 아래로, 거칠게 매여진 붕대가 보였다. 상처마다 쓰라린 한기가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급히 약초를 짓이겨 바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시야가 흐릿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방 한구석에 꼿꼿이 앉아 있는 노인의 실루엣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른팔 소매가 잘려 나가 허리띠에 묶인 외팔이 늙은이. 바람에 날리는 백발을 대충 묶어 내린 채, 깊게 눌러쓴 대나무 삿갓 너머로 오직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만검총의 묘지기, 모용고였다.
“……당신이 나를 구한 건가?”
사야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구멍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났다.
모용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 앞에 놓인 낡은 대나무 빗자루를 쓸어내릴 뿐이었다. 사야의 눈에 노인의 모습은 그저 초라하고 무력한 은둔자에 불과했다. 아버지를 참살한 황실 현철위와 그들의 사냥개인 뇌인방의 무시무시한 무공을 목격한 그녀에게, 이런 외팔이 노인이 베푼 자비는 하찮고 비참한 연명에 지나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사야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버님의 유품, 부러진 천강검(天罡劍)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반 토막 난 채 녹이 슬어 있는 검을 쥐는 그녀의 손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내 갈 길은 내가 간다. 뇌인방 놈들의 목을 베어 아버님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아. 당신 같은 쓸모없는 외팔이 늙은이가 지키는 무덤 구석에서 썩어갈 시간 따윈 없다.”
사야는 악에 받친 눈빛으로 모용고를 노려보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리 경맥에 남아 있던 타격의 여파와 극심한 탈진이 그녀의 전신을 덮쳤다.
“아윽……!”
짧은 비명과 함께 사야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그녀는 소검헌의 차가운 툇마루 바닥으로 사정없이 쓰러졌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시야가 암전되려 했으나, 그녀는 이빨을 악물고 부러진 천강검을 놓지 않았다. 쓰러진 조카를 바라보는 모용고의 외안광에는 잔잔한 슬픔과 회한이 교차했다.
모용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오른팔이 없는 비대칭의 실루엣이 달빛을 받아 길게 늘어졌다. 그는 말없이 사야의 손에서 힘없이 풀려난 부러진 천강검을 집어 들었다.
사야는 쓰러진 채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노인이 아버님의 검을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놓아……! 그 검에 손대지 마……!”
하지만 모용고는 그녀의 절규를 무시한 채, 소검헌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도자기 병을 가져왔다. 병마개를 열자 씁쓸하면서도 깊은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백년 침향나무의 수지로 만든 특수 기름, 검유 침향유(沉香油)였다.
모용고는 거친 가죽 천에 침향유를 듬뿍 묻혔다. 그리고 부러진 천강검의 칼날 표면에 조심스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기름이 철의 미세한 구멍 사이로 스며들며, 검신에 말라붙어 있던 아버님의 피와 검붉은 녹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노인의 손길은 지극히 부드럽고 경건했다. 마치 자식을 어루만지는 아비의 손길처럼 조심스러웠다.
그 정성스러운 손길을 바라보던 사야의 독기 서린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노인은 아무런 무공도 없는 청소부인 줄 알았으나, 검을 다루는 그의 태도에는 뼈에 사무친 깊은 예(禮)가 깃들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모용고의 왼손 끝이 천강검의 부러진 단면, 날카로운 상흔에 닿았다.
웅.
모용고의 단전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만검섭혼결 1성의 심법이 자극받으며, 그의 뇌리로 차갑고 날카로운 기류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검흔독억(劍痕讀憶).’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 속에서, 모용고의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부러진 검의 상흔이 그의 영혼에 과거의 기억을 강제로 투영하기 시작했다.
장엄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무쌍성의 언덕. 수십 명의 검은 갑옷을 입은 현철위 대원들이 쇠사슬을 휘두르며 한 사내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사내, 사야의 부친이자 모용고의 평생의 의형제였던 사무진이었다.
“모용 형제…… 검총을…… 지켜다오……!”
사무진은 온몸이 창칼에 찔려 피떡이 된 상태에서도, 부러진 천강검을 치켜들고 현철위의 대군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참격이 허공을 가르고, 사방에서 날아든 검은 쇠사슬이 그의 사지를 결박하는 비참한 광경이 모용고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무고한 피가 철이 되어 강호를 짓누르리니…….’
사무진의 최후의 절규가 뇌리를 때리자, 모용고의 가슴속 깊은 원한과 죄책감이 들끓었다. 그의 심장 주변에 깊숙이 박혀 있던 네 대의 빙심은침(冰心銀針)이 그의 감정 변화에 반응하여 차가운 한독을 뿜어냈다.
“흡…….”
모용고는 소리 없는 신음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전신 경맥이 얼어붙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그를 덮쳤다. 가볍게 내력을 통제하려 했을 뿐인데도, 왼손가락 끝마디가 서서히 딱딱해지는 기괴한 감각이 전해졌다. 석화(石化)의 열독이 그의 신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끓어오르는 한을 단전 깊은 곳으로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천강검의 날을 닦아냈다. 녹이 완전히 벗겨진 검신은 반 토막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달빛을 받아 처연하고도 맑은 백광을 뿜어냈다.
사야는 쓰러진 채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노인이 검을 닦는 동안 소검헌 내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고, 노인의 백발이 무형의 기류에 흔들리는 경이로운 광경을. 그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려 더 이상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밤이 깊어가며 소검헌 내부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사야는 툇마루 구석에 기대어 앉아 억지로 기혈을 정돈하려 애썼고, 모용고는 방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그의 왼손은 여전히 낡은 대나무 빗자루 자루를 가볍게 짚고 있었다.
스산한 밤바람이 검총의 협곡을 타고 흘러와 소검헌 처마 끝에 매달린 작은 쇠종, 소엽풍경(小葉風鈴)을 흔들었다.
딸랑.
은은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보통의 바람이 내는 소리와는 달랐다. 소리의 장단이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모용고의 감긴 눈꺼풀 아래로 외안광이 번뜩였다.
‘청검이청(聽劍異聽).’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바람의 흐름과 소엽풍경의 떨림만으로 소검헌 외부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 자욱한 밤안개를 뚫고, 검은 밀착 복장을 한 사내가 지붕 위에서 소리 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는 귀신같은 신법.
뇌인방 최고의 살수이자 어둠 속의 사냥개라 불리는 살수단주, 흑사(黑砂)였다.
흑사는 소검헌의 지붕 기와 한 장을 들어 올린 뒤, 소리 소문 없이 천장을 뚫고 방 안으로 낙하했다. 그의 손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반사하지 않는 암청색의 흑사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칼날 끝에는 스치기만 해도 온몸의 피를 검게 얼려버리는 치명적인 맹독이 발려 있었다.
사야는 기척을 느끼고 경악하며 부러진 천강검을 쥐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어라, 늙은이.”
흑사의 신형이 바람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의 단검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용고의 목덜미를 향해 최단 거리로 베어 들어갔다. 일류 초입에 달한 살수의 쾌검은 자비가 없었다.
그러나 모용고는 눈조차 뜨지 않았다.
쉬익!
단검의 칼날이 모용고의 목덜미를 스치기 직전, 모용고의 상체가 기이한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찰나의 순간, 몸의 무게중심을 왼발 뒤꿈치로 완벽히 이동시키는 무쌍보법의 회전 궤적이었다.
적의 칼날은 오직 허공만을 갈랐다.
“뭐냐……!”
흑사가 경악하며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연속적인 자격을 가해왔다. 암청색의 칼날이 모용고의 전신 급소를 향해 폭풍처럼 내리꽂혔다.
모용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 그대로, 왼손에 쥔 대나무 빗자루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깡! 까강!
낡은 대나무 빗자루가 흑사의 명검 단검과 부딪힐 때마다, 기이하게도 맑은 쇠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빗자루 내부에 박힌 무쌍철나무 심의 자력이 적의 칼날 궤도를 교묘하게 끌어당겨 비틀고 있었다. 흑사는 자신의 내력이 빗자루의 탄성에 의해 허공으로 흘러나가는 듯한 기괴한 무력감을 느꼈다.
‘이 늙은이가…… 절세고수다!’
흑사는 불리함을 깨닫고 소매 속에서 미세한 독침 암기 다섯 발을 사야와 모용고를 향해 동시에 발사했다.
스사사사삭!
모용고가 빗자루를 한 바퀴 크게 회전시켰다. 빗자루 끝이 그리는 둥근 원형의 기류가 자욱한 먼지와 바람막이를 형성했다. 공중을 날아오던 독침들이 그 무형의 바람 장막에 막혀 힘없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흑사가 뒤로 도망치려 발을 떼는 찰나, 모용고의 신형이 안개처럼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오직 소엽풍경의 미세한 떨림과 적의 살기 파동만을 읽어낸 그의 왼손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빗자루 혈도폐쇄(點穴).’
툭!
빗자루 자루 끝이 어둠을 가르고 흑사의 목뒤 아문혈(啞門穴)을 정확히 관통하듯 찔렀다.
“……!!”
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의 전신 경맥에 흐르던 내력이 단숨에 차단되며 온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들고 있던 흑사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마비되어 무릎을 꿇었다.
소검헌 내부에는 다시금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사야는 어둠 속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앞에서 벌어진 경이로운 신위를 바라보았다. 오직 바람의 떨림과 빗자루 하나만으로, 일류 살수를 눈도 뜨지 않은 채 완벽히 제압해 버린 외팔이 늙은이.
모용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차가운 외안광이 달빛 아래에서 고요하게 빛났다. 그는 쓰러진 자객을 내려다보며 빗자루를 다시 대지에 고정했다.
그의 왼손가락 끝에 다시 한번 극심한 차가운 통증이 밀려왔다. 심장에 심겨진 빙심은침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내색하지 않은 채, 묵묵히 사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야의 손에 들린 부러진 천강검이 노인의 기파에 반응하듯 처연한 백광을 발하며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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