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안개 속의 균열
낙일곡(落日谷)의 안개는 언제나 붉은 녹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해질녘의 태양이 협곡의 틈새로 피처럼 붉은 잔광을 들이밀 때면, 만검총(萬劍總)은 거대한 쇠붙이의 무덤으로 변했다. 사방에 비석처럼 박힌 수만 자루의 부러진 검들. 날이 깨지고 자루가 허물어진 전대 무인들의 유물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짤랑거리며 쓸쓸한 귀곡성을 질렀다. 그것은 한 시대를 호령했으나 결국 꺾여 은거한 자들의 장엄하고도 처절한 쇠울음이었다.
사락, 사락.
그 스산한 철의 심연 속에서, 오직 빗자루 쓰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모용고는 왼손 하나로 대나무 빗자루를 쥐고 묵묵히 흙바닥을 쓸어내렸다. 그의 나이 예순여섯. 마르고 굽은 등 위로 헤진 회색 삼베옷이 바람에 펄럭였다. 잘려 나간 오른팔 소매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허리띠에 고정되어 있었고, 바람에 날리는 백발 아래로 깊게 파인 주름과 거친 수염이 세월의 풍파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잃은 벙어리 청소부로 통했다. 하지만 그의 왼손에 쥔 대나무 빗자루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철기방의 장인 철대우가 은밀히 무쌍철나무 심을 박아 제련해 준 ‘무쌍철목 빗자루’였다. 웬만한 신병이기의 타격도 흔적 없이 막아내는 강도를 지녔으나, 모용고는 이를 그저 낙엽을 쓸고 녹가루를 다듬는 도구로만 썼다.
‘검총에 묻힌 검은 결코 사적인 이익을 위해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
‘침입자를 쫓되, 경계를 벗어나 쫓아가지 말라.’
‘검들에 깃든 원혼을 욕보이지 말라.’
모용고는 매일 아침 쓸어내리는 대지의 감각 속에서 초대 묘지기가 남긴 ‘검총 수호 삼계(三戒)’를 가슴속 깊이 되새겼다. 그것은 과거 황실의 음모에 휘말려 오른팔을 잃고 가문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자신의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숭고한 속죄의 굴레였다. 그는 만검섭혼결 1성의 심법을 운용하며, 매일 밤낮으로 부러진 검들을 닦아내고 그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였다. 대지 아래 흐르는 미세한 자력의 진동이 그의 단전과 연결되어 은은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만검총의 서쪽 경계선 너머에서 고요한 안개를 깨뜨리는 거친 파음이 들려왔다.
타타탓! 터벅, 털썩!
무겁고 불규칙한 발소리였다.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모용고의 콧날을 스쳤다. 모용고는 쓸어내리던 빗자루를 멈추고 안개 속을 응시했다.
안개를 헤치고 검총 경내로 굴러떨어진 것은 한 명의 어린 소녀였다. 먼지투성이 뺨과 헝클어진 머리칼, 온몸의 의복은 예리한 도검에 찢겨 피떡이 되어 있었다.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대지를 기어갔다. 그녀의 왼손에는 부러진 칼날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칼자루의 형상을 본 모용고의 외안광이 찰나의 순간 격렬하게 요동쳤다.
‘사무진의 검……!’
그것은 과거 자신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황실 현철위에 의해 참살당했던 의형제, 사무진의 애검 ‘천강검’이었다. 부러진 단면이 불규칙하게 꺾인 채 차가운 백광을 발하는 그 검을 쥔 소녀는 바로 사무진의 외동딸, 사야였다.
“잡아라! 저 계집년이 검총으로 기어 들어갔다!”
협곡 입구에서 횃불 불빛과 함께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낙일곡 주변을 장악한 잔인한 사파 조직, 뇌인방(雷刃帮)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황실의 철 징발령을 핑계 삼아 검총의 부러진 명검들을 고철로 약탈하려는 야욕을 품고 사야를 집요하게 추격해 온 자들이었다.
철컥, 철컥!
대도를 치켜든 뇌인방 무사 세 명이 자욱한 안개를 뚫고 검총 경내로 난입했다. 그들은 묘비처럼 박혀 있는 전대 고수들의 부러진 검들을 군화발로 무참히 짓밟으며 사야를 포위했다.
“흐흐흐, 막다른 골목이구나. 그 부러진 고철덩어리를 넘기고 순순히 따라오너라.”
선두에 선 뇌인방 무사가 비열하게 웃으며 대도를 들어 올렸다. 사야는 복수심과 적의로 가득 찬 매서운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보며 부러진 천강검을 고쳐 쥐려 했으나, 미숙한 내력과 깊은 상처 탓에 오히려 칼날이 허공에서 튕겨 나가며 툇마루 아래로 쓰러지고 말았다.
무사들의 대도가 사야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히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스윽.
회색 삼베옷을 입은 외팔이 노인이 소리 소문 없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모용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눌러쓴 대나무 삿갓 아래로 차가운 안광만을 빛내며, 낡은 대나무 빗자루를 비스듬히 쥐고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뭐냐, 이 병신 같은 늙은이는? 꺼져라! 방해하면 이 무덤의 고철들과 함께 갈아 마셔 주마!”
뇌인방 무사 세 명이 동시에 대도를 휘두르며 모용고를 향해 돌격해 왔다. 좁은 길목에서 세 자루의 도검이 가하는 참격은 매서웠다.
모용고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만검섭혼결 1성의 기류를 빗자루 끝으로 유도했다.
‘소엽쓸기(掃葉式).’
스사사사삭!
모용고가 왼손 하나로 대나무 빗자루를 대지에 대고 크게 쓸어내렸다. 순간, 바닥에 쌓여 있던 수십 년 묵은 붉은 녹가루와 흙먼지가 폭풍 같은 회오리를 일으키며 삼 장 높이의 거대한 장막을 형성했다. 자욱한 붉은 녹먼지가 적들의 시야를 완벽히 차단하고 그들의 안구와 호흡기를 사정없이 마비시켰다.
“쿨럭! 컥! 이게 무슨……!”
“눈이 안 보인다! 제길, 무작위로 베어라!”
뇌인방 무사들이 먼지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대도를 허공에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그 혼란의 장막 속에서, 모용고의 신형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그는 잘려 나간 오른팔의 신체적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오직 왼발의 축만을 단단히 고정하고 몸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그것은 무쌍보법의 원형 회전 궤적이었다.
스윽.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없이, 모용고는 찰나의 순간 적들의 등뒤 사각지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의 왼손에 쥔 무쌍철목 빗자루 자루 끝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툭, 툭, 툭!
정교하고 군더더기 없는 세 번의 타격음. 빗자루 끝이 뇌인방 무사들의 아문혈(啞門穴)과 대추혈(大椎穴)을 정확히 꿰뚫었다.
“어…… 윽?”
무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들의 전신 경맥이 단숨에 폐쇄되며 온몸이 돌처럼 마비되었고, 손에 쥐고 있던 대도들이 힘없이 흙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들은 마비된 채 무릎을 꿇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용고는 빗자루를 다시 수직으로 세워 대지에 고정했다. 그가 가볍게 내력을 운용한 대가로, 그의 왼손 손가락 끝에 찌릿한 차가운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석화(石化)의 미세한 전조였다. 그는 통증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빗자루를 쓸어내렸다.
붉은 녹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고요한 안개가 다시 검총을 덮었다.
쓰러져 있던 사야는 부러진 천강검을 움켜쥔 채, 눈앞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을 죽였다. 보잘것없는 외팔이 늙은이의 가벼운 빗자루질 한 번에 정예 사파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있는 모습.
사야는 경악어린 눈빛으로 모용고의 낡은 삿갓 아래 감춰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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