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계약서의 위력
그 소름 끼칠 정도의 차분함에, 마계 최강의 암살자 수장인 섀도우 보스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통 목덜미에 서늘한 뼈 단검이 닿으면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달라고 싹싹 빌거나, 혹은 마지막 발악으로 마력을 쥐어짜기 마련이다. 그것이 섀도우 보스가 지난 수백 년간 보아온 지극히 상식적인 피암살자들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밑에 앉아 있는 검은 단발머리의 인간 여자, 유은하는 달랐다. 그녀는 콧등에 걸친 블루라이트 차단 은테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툭 밀어 올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단 1그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수요일 새벽 2시에 퇴근을 방해받은 직장인의 깊고 어두운 심연의 빡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은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단검의 날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단검, 금속 탐지 결계에 안 걸린 걸 보니 마법적으로 정제된 야수 뼈로 만드신 모양이네요. 경량화는 잘 되어 보이는데, 그립감이 영 엉망이군요. 손잡이 붕대도 다 헤어졌고. 이래서야 장시간 대기할 때 손목 터널 증후군 오기 딱 좋습니다만."
"……뭐라?"
섀도우 보스의 안광이 당혹감으로 일렁였다. 마계 최강의 암살자 길드를 이끄는 그가 평범한 인간 계집에게 무기 그립감 지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거냐? 허세를 부려봤자 네 목숨은 내 손바닥 안이다. 세무관 그롬 님께서 네년의 목과 그 불온한 마법 태블릿을 완전히 파괴해 달라고 거액을 지불하셨다."
"아, 역시 그롬 씨였군요. 세금 전산화하니까 중간에서 떼먹던 수수료 횡령 길이 막혀서 아주 발악을 하시는군요. R&R(역할과 책임)도 구분 못 하고 사외 용역부터 부르다니, 참 전형적인 무능한 간부의 표상이에요."
은하는 메쉬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목에 닿은 뼈 단검이 미세하게 긁히며 은하의 목덜미 피부에 닿았지만, 은하가 입은 검은색 H라인 오피스 스커트 정장 주변에서 은은한 황금빛 글자들이 회전하며 살기를 부드럽게 튕겨냈다. 은하의 몸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 결계'였다. 업무상 재해로부터 근로자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마법적 인과율 방어막.
결계의 존재를 확인한 은하는 더욱 여유로운 표정으로 태블릿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섀도우 보스를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롬 씨가 이번 건당 수수료로 얼마를 제시하던가요?"
"……5만 마정석이다. 선금으로 1만 마정석을 받았지."
"5만 마정석이라."
은하가 코방귀를 뀌며 태블릿 화면을 섀도우 보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표와 꺾은선그래프가 실시간으로 렌더링되고 있었다.
"자, 계산기를 같이 두드려 보죠. 섀도우 보스 씨, 당신들 길드원이 총 몇 명이죠?"
"……정예 대원만 50명이다."
"그럼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은요? 천장을 부수고 들어온 낙하조 5명에 복도 대기조 10명, 총 15명이군요. 5만 마정석을 15명으로 나누면 인당 약 3,333 마정석입니다. 여기서 길드 수수료 및 운영비로 최소 40%는 공제하시겠죠? 그럼 대원들이 실제로 가져가는 건 인당 2,000 마정석 남짓이네요."
섀도우 보스는 자신도 모르게 은하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암살자 길드를 운영하면서 이런 식으로 단가 분석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번 작전으로 깨진 기획실 천장 마법 유리창 수리비가 청구될 겁니다. 저희 보안팀장 바르가스 씨가 이미 당신들의 얼굴과 마력 파장을 전산에 등록해 놨거든요. 구상권 청구 금액이 최소 2만 마정석입니다. 또한, 아까 제 미믹 캐비닛에 손가락을 물린 대원분의 치료비와 해독 포션 값은 길드에서 지원해 주나요?"
"……그건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거 봐요! 전형적인 악덕 프리랜서 계약이잖아요!"
은하가 책상을 탁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목에 닿아 있던 뼈 단검이 은하의 기세에 밀려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위험 수당 제로. 장비 소모품비 본인 부담. 업무 중 부상을 당해도 산재 보험 처리 불가. 심지어 작전 중에 사망하면 유가족 위로금이나 장례비 지원도 없죠? 건당 수수료만 보고 목숨을 거는 건 지독한 적자 사업입니다. 섀도우 보스 씨, 당신은 길드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대표로서 심각한 경영 태만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경…… 경영 태만이라고?!"
섀도우 보스의 안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복면 속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은하의 말은 뼈아픈 팩트였다. 매년 작전 중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대원들의 원망 섞인 눈초리와, 쪼들리는 길드 재정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우리는 어둠의 지배자다! 명예와 살육을 위해 움직인다!"
"명예가 밥 먹여 줍니까? 마정석 이자가 나옵니까?"
은하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당신들이 그롬 같은 부패 세무관의 일회성 소모품으로 쓰이고 버려질 때, 그롬 씨는 횡령한 국고로 매일 밤 고급 와인을 마시며 탕비실 믹스커피를 훔쳐 가고 있습니다. 이게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건……."
섀도우 보스는 말문이 막혔다. 은하의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절대자의 그것과 같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은하는 책상 서랍을 열어 정교한 마법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제레드가 특수 개조한 '만년필 형태의 마력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가볍게 돌렸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하나 하죠."
사각, 사각.
은하가 만년필로 양피지 위에 서명란과 조항들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만년필 촉 끝에서 푸른색 마력 잉크가 흘러나와 양피지 위에 절대적인 인과율의 궤적을 그렸다.
"마왕성 경영기획실 산하 '공식 보안팀 정규직 고용 계약서'입니다."
"정규직…… 고용 계약서?"
"네.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계 최저임금법을 준수하여 대원 1인당 월 기본급 5,000 규격 마정석 보장. 둘째, 야간 근무 및 비상 대기 시 야근 수당 1.5배 지급. 셋째, 업무 중 부상 시 리치 닥터의 무상 치료 및 마력 회복 포션 무제한 제공을 포함한 산재 보험 적용. 넷째, 연간 15일의 유급 연차 휴가 및 심연의 온천 리조트 이용권 지급. 마지막으로,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는 사내 식당에서 미노타우로스 셰프의 특제 K-제육볶음 곱빼기와 황금 비율 믹스커피가 무제한 제공됩니다."
"……!"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암살자 대원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열린 천장 틈새로 그들의 귀가 쫑긋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제…… 제육볶음 무제한? 거기에 믹스커피까지?"
암살자 대원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마왕성 탕비실의 노란색 봉지 커피가 지닌 악마적인 중독성과 피로 해소 효능은 이미 마계 지하 세계에서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것을 매일 공짜로 마실 수 있다니.
섀도우 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하지만 우리는 킬러다. 빛의 세계에서 일할 수 없다."
"누가 빛의 세계에서 일하랍니까? 기획실 보안팀의 R&R은 간단합니다. 밤낮으로 기획실의 기밀 장부와 태블릿을 노리는 불청객들을 그림자 속에서 감시하고 제압하는 것. 당신들의 은신 기술과 일격 필살 능력을 그대로 활용하는 합법적인 경비 업무입니다. 게다가 정규직 사원증 목걸이가 발급되므로, 더 이상 경비병들에게 쫓겨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은하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청동 빛 '경영기획실 사원증 목걸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청동 목걸이 표면에는 기획실의 공식 문양과 함께 '보안 요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사원증을 바라보는 섀도우 보스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범죄자이자 소모품으로 쫓기며 살아온 그들에게, 마왕성의 정식 일원으로서 신분을 보장받고 4대 보험과 퇴직금까지 챙길 수 있는 기회는 그야말로 신의 구원과도 같았다.
"……정말 퇴직금이라는 것을 주는가? 일하다 늙어도 버려지지 않는단 말인가?"
"마왕성 노동법 제15조에 의거, 근속 연수 1년당 30일분의 평균 임금을 퇴직금으로 누진 지급합니다. 제가 은퇴할 때 당신들도 함께 따뜻한 남쪽 온천가에서 연금을 받으며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해 드리죠."
은하의 목소리에는 지독한 현실주의와 자본주의의 달콤한 마력이 섞여 있었다. 섀도우 보스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툭.
그의 손에서 그림자의 뼈 단검이 떨어져 책상 위를 굴렀다. 섀도우 보스는 붕대로 감긴 손으로 은하가 내민 마력 만년필을 쥐었다. 그의 눈가에 미세한 물기가 어린 것을 은하는 놓치지 않았다.
"서명하겠다. 우리 섀도우 길드원 50명 전원, 오늘부로 마왕성 경영기획실의 정규직 보안 요원이 되겠다!"
사각, 사각, 사각.
섀도우 보스가 계약서 하단의 을(乙) 서명란에 자신의 마력 파장을 담아 빠르게 이름을 적었다. 서명이 완료되는 순간, 계약서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며 허공의 인과율 속으로 녹아들었다. 절대 깨질 수 없는 마법적 고용 계약이 체결된 것이다.
"환영합니다, 섀도우 팀장님. 첫 번째 업무 지시를 내리죠."
은하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문가를 가리켰다.
"기획실 밖 복도에서 당신들이 임무를 성공하고 태블릿을 가져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세무관 그롬 씨를 즉시 체포해 오십시오. 사내 기밀 탈취 사주 및 테러 교사 혐의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실장님. 정규직의 매운맛을 보여주지."
섀도우 보스는 즉시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장에 대기하던 대원들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
잠시 후, 복도 끝에서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 너, 너희들 왜 이러느냐! 내 돈을 받고 비서년의 목을 베어오라 했거늘!"
"닥쳐라, 비정규직 착취범 놈아! 우리는 이제 4대 보험이 보장되는 마왕성 정규직 보안 요원이다!"
철컥, 철컥.
단단한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질질 끌려 들어온 것은 세무관 그롬이었다. 꼬질꼬질한 임프 가방을 메고 비열한 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은 이제 공포와 억울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기획실 문가에서 순찰 중이던 인사팀장 카론이 거구의 몸을 이끌고 나타나 그롬의 덜미를 움켜쥐었다.
"세무관 그롬. 사내 기밀 유출 방지 규정 위반 및 야간 기습 테러 사주 혐의로 즉시 직위 해제 및 지하 감옥 수감을 선포한다. 감옥에서 평생 엑셀 기초 함수 깜지를 쓰며 반성하도록."
"이, 이럴 수가! 내가 어떻게 모은 비자금인데! 끄아아악!"
그롬은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데스나이트들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복도 너머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은하는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안경을 벗어 안경천으로 닦았다. 그리고 새로 지급받은 청동 사원증 목걸이를 목에 걸고, 거울을 보며 붕대 가면 위에 사원증을 삐딱하게 조율하고 있는 섀도우 보스를 바라보았다. 섀도우 보스의 눈동자는 정규직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정규직 사원증을 목에 걸고 싱글벙글 웃는 암살자 보스를 보며, 밧줄에 묶인 그롬이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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