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실 금고를 터는 손길
"당장 성의 마력이 끊겨 내 왕좌의 온돌이 식어가고 있다! 광산이 멈췄다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마왕 발락의 포효가 경영기획실의 높은 천장을 흔들었다. 검은 갑옷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의 열기가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곁에 서 있던 똑똑이 대리는 이미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은하의 책상 밑으로 완전히 기어 들어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유은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만성 피로로 뻑뻑해진 눈을 한 번 깜빡인 뒤, 콧등에 걸친 블루라이트 차단 은테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렸다. 그리고 품속에서 ‘마법 행정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마왕님, 진정하시고 이 그래프를 봐 주십시오."
은하가 태블릿 화면을 공중으로 슬라이드하자, 푸른색 마력으로 이루어진 3D 홀로그램 그래프가 발락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 그것은 은하가 밤을 새워 정리한 '노동 만족도와 채굴 효율의 상관관계 분석표'였다.
"이게 무슨 해괴한 그림이냐? 숫자가 가득하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빨간색 꺾은선은 리치 장로회가 임프들을 무임금으로 채찍질했을 때의 마력 채굴량입니다. 보시다시피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하강하고 있죠. 피로 누적과 지반 붕괴로 인한 인력 소실 때문입니다. 반면, 이 푸른색 상승 곡선은 제가 제안한 '최저임금법 및 안전 장구 보급'을 적용했을 때의 예상 생산성입니다. 초기 비용은 조금 들지만, 채굴 효율이 무려 300% 폭등합니다. 결과적으로 마왕님의 왕좌 온돌 온도는 기존보다 20% 더 따뜻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입니다."
"3... 300% 폭등이라고? 내 온돌이 더 뜨거워진단 말이냐?"
발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파산 트라우마'와 '추위'라는 두 가지 공포를 동시에 공략하는 은하의 엑셀 브리핑은 완벽했다. 은하는 쐐기를 박듯 기안서를 들이밀었다.
"장로회장의 구시대적 착취는 마왕성 재정을 갉아먹는 좀벌레일 뿐입니다. 여기 최저임금법 시행안에 최종 결재 도장만 찍어 주시면, 제가 즉시 파업을 수습하고 내일부터 뜨끈뜨끈한 마력을 국고에 채워 넣겠습니다."
발락은 홀린 듯 품속에서 '심연의 결재 인장'을 꺼내 은하가 내민 양피지에 쿵 하고 찍었다.
"좋다! 내 온돌이 식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당장 실행해라!"
마왕이 만족스러운 콧김을 뿜으며 퇴장하자, 은하는 즉시 임프 대장에게 타결 소식을 전했다.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은 임프 노조는 환호성을 지르며 바리케이드를 치웠고, 광산은 즉시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성 전체의 마법 조명이 다시 밝아지고 따뜻한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깊은 밤이 찾아온 오전 2시.
마왕성 신관 10층 경영기획실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은하는 '드워프제 사무용 메쉬 의자'에 깊숙이 묻혀 앉아 홀로 야근을 하고 있었다. 탕비실의 지옥의 믹스커피 머신에서 갓 뽑아낸 황금 비율의 믹스커피가 종이컵 안에서 은은한 온기를 품은 채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렸다.
"하아, 마계에 와서까지 이 시간까지 야근이라니.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은하는 지독한 스트레스성 편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태블릿 측면 슬롯에는 마왕성의 일급 기밀 장부와 전대 마왕의 비자금 단서가 담긴 '사내 보안 마법 USB'가 꽂혀 있었다. 파란색 마력이 깜빡이며 백업 작업이 98%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탁, 타닥.
갑자기 기획실 천장의 마법 조명이 불규칙하게 깜빡이더니, 이내 툭 소리를 내며 완전히 꺼져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무실을 덮쳤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었다. 은하의 오피스 정장 정면에 걸어둔 '사내 기밀 유출 방지 및 USB 반입 금지' 결계막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붉은색 경고 마법 문자를 공중에 띄웠다.
[경고: 비인가 마력 반응 감지. 미등록 금속 무기 반입 시도 포착.]
"침입자...?"
은하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무력이 전혀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악덕 중소기업에서 온갖 불법 사채업자와 악성 민원인들을 상대하며 다져진 깡다구가 있었다. 당황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은하는 즉시 태블릿에서 '사내 보안 마법 USB'를 뽑아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방 구석에 놓여 있던 '미믹 보관 캐비닛'을 향해 USB를 정확하게 던졌다.
"삼켜!"
철컥!
어둠 속에서 캐비닛 문이 스스로 열리며 날아온 USB를 낚아챘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날카로운 이빨과 보라색 혀가 스치듯 보였고, 이내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캐비닛이 이중으로 잠겼다. 은하의 지시 없이는 마왕 발락이라도 열 수 없는 살아있는 철제 금고가 완성된 것이다.
스우우우.
그림자 속에서 불길한 살기가 실바람처럼 피어올랐다. 은하의 목덜미 뒤로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비서실장 유은하. 네년의 그 건방진 주둥이와 태블릿을 오늘로 끝이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망토를 두른 자들이 소리 없이 허공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살기등등한 단검들이 쥐어져 있었고, 단검의 끝은 정확히 은하의 목덜미와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세무관 그롬이 고용한 마계 최악의 암살자 집단, '어둠의 섀도우 보스'의 정예 대원들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컵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야근 중에 잡상인 출입 금지라고 문 앞에 붙여놨을 텐데요. R&R(업무 분장)이 안 되어 있나 보군요."
"닥쳐라! 죽음 앞에서도 허세를 부리는구나!"
암살자들이 단검을 내리찌르려던 그 순간.
웅—!
경영기획실 입구의 바닥에서 거대한 기계음과 함께 청동 빛 결계막이 솟구쳤다.
"사내 보안 규정 제5조! 비인가 금속 무기 반입은 즉시 압수다, 이 쥐새끼들아!"
문가에서 웅크리고 있던 보안팀장 바르가스가 삼단봉을 바닥에 내리치며 '금속 탐지 결계'를 발동시켰다. 강력한 자력의 폭풍이 방 안을 휩쓸었다.
깡! 깡! 깡!
암살자들이 쥐고 있던 검은 강철 단검들이 일제히 손아귀를 벗어나 천장의 철제 대들보로 날아가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무기를 빼앗긴 암살자들이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바르가스 주임, 순찰 근무 중에 졸았습니까? 보고서에 기재하겠습니다."
"컥! 실장님, 그, 그게 아니라 잠시 눈 피로를 풀던 중이었습니다! 당장 진압하겠습니다!"
바르가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삼단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과연 마계 최강의 킬러들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잃었음에도 그림자 이동 마법을 사용해 바르가스의 공격을 유연하게 회피하며 은하의 책상 앞으로 쇄도했다.
그리고 천장이 거칠게 부서져 내렸다.
콰아앙!
기획실의 아름다운 마법 유리 천장이 산산조각 나며 하얀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 먼지 장막을 뚫고, 칠흑 같은 어둠 그 자체인 거대한 형상이 은하의 책상 바로 위로 착지했다.
검은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고, 안광만을 번뜩이는 사내. 어둠의 섀도우 보스였다. 그의 손에는 금속 탐지 결계를 우회한, 마력이 서린 날카로운 '그림자의 뼈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사방으로 유리 파편이 휘날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섀도우 보스는 단검을 은하의 코앞에 겨누며 낮게 읊조렸다.
"여기까지다, 인간."
차가운 뼛조각 단검이 은하의 하얀 목덜미에 닿기 직전의 절체절명의 대치 상황. 하지만 섀도우 보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칼끝이 목전까지 다가왔음에도, 눈앞의 인간 여자는 공포에 질리기는커녕, 마치 매주 월요일 아침 회의를 바라보는 듯한 지극히 지루하고 피곤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름 끼칠 정도의 차분함에, 마계 최강의 암살자 수장인 섀도우 보스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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