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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기 수리비가 날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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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신관 10층, 경영기획실의 아침은 원래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워야 마땅했다.


수석 비서이자 경영기획실장인 유은하는 드워프 장인 볼크가 특제 강철과 마수 가죽을 덧대어 만든 ‘사무용 메쉬 의자’에 요추를 완벽하게 밀착시킨 채 앉아 있었다. 180도 리클라이닝 기능이 탑재된 의자는 만성 허리 통증에 시달리던 K-직장인인 그녀에게 유일한 마계의 안식처였다. 은하는 탕비실에서 임프 말랑이가 황금 비율로 타온 따뜻한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인 백색의 ‘A4 복사 용지’ 더미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이번 분기 예산의 무려 20%를 투입해 인간계 한스 상단으로부터 독점 수입한 최신형 마법 복사기가 서 있었다. 은색 금속 동체에 복잡한 마법 회로가 각인된 복사기는 녹색 마력 불빛을 깜빡이며 정숙하게 대기 중이었다. 양피지 대신 이 얇고 하얀 종이 위에 엑셀 행정 문서를 대량으로 출력해 마계 전역에 뿌릴 생각을 하니, 은하의 메마른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쿵! 쿵! 쿵! 쿵!


복도 끝에서부터 마왕성 전체가 들썩거리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틀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경영기획실의 묵직한 참나무 문이 거칠게 박살 나며 안쪽으로 나뒹굴었다. 매캐한 먼지 바람을 뚫고 나타난 자는 거구의 야수, 바로 북부 오크 부족들의 우두머리인 ‘오크 족장 가르크’였다.


가르크는 상반신을 탈의한 채 거친 문신을 온몸에 새기고 있었고, 그의 오른손에는 기계를 때릴 때 파괴력이 배가된다는 지옥의 뼈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사무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가르크의 시선이 녹색 불빛을 내뿜으며 ‘웅-’ 하는 미세한 소음을 내는 마법 복사기에 꽂혔다.


“크오오오! 기획실의 건방진 인간 계집이 마왕성 깊은 곳에 은빛 피부의 철제 괴수를 키우고 있었구나! 하얀 잎사귀를 먹어 치우며 사악한 마력을 내뿜는 몬스터다! 내 부족의 명예를 걸고 이 괴수를 처단하겠다!”


“잠깐, 가르크 부족장님! 그건 몬스터가 아니라—!”


비서실 인턴 똑똑이가 비명을 지르며 말리려 했으나, 무식한 오크의 몽둥이가 더 빨랐다. 가르크가 거대한 뼈 몽둥이를 번쩍 들어 올려 복사기의 중앙 제어 패널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쳤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파괴음과 함께 최신형 마법 복사기가 단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났다. 동체 내부의 압축 마력 탱크가 터지면서 시커먼 마법 토너 잉크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뿜어 나왔다. 시커먼 먹구름 같은 토너 가루가 가르크의 녹색 얼굴과 다부진 가슴팍을 새까맣게 뒤덮었고, 복사기 트레이에 장전되어 있던 백색의 A4 복사 용지 수백 장이 나비처럼 허공으로 사방팔방 흩날렸다.


펄럭이며 떨어지는 하얀 종이 비 사이로, 검은 토너 잉크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서 있는 가르크의 황당한 비주얼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믹스커피 종이컵을 손에 든 채 석상처럼 굳어버린 유은하가 있었다.


은하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눈앞에서 흩날리는 백색 용지들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한스 상단에 지불한 수입 관세, 볼크에게 준 조립 공임비, 그리고 제레드가 밤새워 각인한 복사 마법진의 무형적 가치까지 합산된 ‘돈’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서 적자 계산기가 광속으로 튕기며 붉은색 경고등을 울려댔다.


은하의 눈빛이 지독한 야근 중독 모드에 돌입한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종이컵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마법 행정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톡톡 두드리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색 디지털 격자가 명멸했다.


“가르크 부족장님.”


은하가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차갑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지독한 이성적 살기가 서려 있었다.


“방금 파손하신 비품의 취득 원가는 마정석 5,000개, 인간계 수입 관세 1,200 골드, 소모된 A4 용지 및 토너 손실액 500 마정석. 그리고 마왕성 행정 마비로 인한 무형적 기회비용을 합산한 총 피해액은 15,000 마정석입니다. 이 금액에 대한 영수증을 끊어드릴 테니, 즉시 변제해 주시겠습니까?”


가르크는 얼굴의 검은 잉크를 거칠게 훔쳐내며 뼈 몽둥이를 다시 치켜들었다.


“시끄럽다, 인간 계집! 감히 전사에게 종이 쪼가리를 들이밀며 돈을 요구하느냐! 그 괴수와 함께 너도 뭉개주마!”


가르크가 포효하며 은하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뼈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몽둥이 끝에 서린 야만적인 투기가 공기를 찢으며 은하의 오피스룩 셔츠 깃을 세차게 흔들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똑똑이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고, 어제 감봉 처분을 받고 기획실의 동향을 살피러 왔던 군사부장 바르가스 역시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며 경악했다. 아무리 기획실의 권능이 강하다 한들, 무력이 전혀 없는 인간 여성이 오크 최강의 부족장이 휘두르는 일격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은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태블릿 화면의 ‘근로자 보호’ 탭을 가볍게 터치하는 순간, 그녀의 몸 주변으로 황금빛 반투명 장막이 구형으로 펼쳐졌다.


[근로기준법 결계 (Labor Barrier) 가동]


은하가 입은 검은색 H라인 스커트와 흰색 블라우스 주변으로 황금색 글자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계 근로기준법 제1조 근로 조건의 보장’, ‘제76조의2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110조 폭행 금지 및 형사 처벌’.


쿠우우웅—!


가르크의 거대한 뼈 몽둥이가 은하의 코앞 10센티미터 지점에서 황금빛 법조항 장막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연병장을 뒤흔들던 오크의 파괴적인 근력이 결계에 닿는 순간, 결계막이 기하학적인 그래프 문양을 그리며 충격파를 흡수했다. 그리고 이내, 물리 법칙을 완전히 비틀어버리는 인과율의 힘이 작동했다.


퍼어어엉—!


“크학?!”


자신의 완력이 100% 반사되어 역류하자, 가르크의 거구는 낙엽처럼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는 사정없이 뒤로 날아가 기획실 벽면에 설치되어 있던 철제 서류 캐비닛들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리며 처박혔다. 쿠르릉 쾅쾅 소리와 함께 캐비닛 속에 보관되어 있던 수천 장의 기안서 양식 양피지들이 가르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커흑…… 이, 이게 무슨 주술이냐…….”


가르크가 뼈 몽둥이를 놓친 채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의 두 손은 반사된 충격으로 인해 감각을 잃고 마비되어 있었다. 무력은 전혀 없지만, 행정과 법률 앞에서는 마왕조차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서늘한 이성적 결계의 힘이었다.


은하는 먼지를 털어내듯 정장 스커트를 가볍게 쓸어내린 뒤, 처참하게 무너진 서류 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정적만이 감도는 사무실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또각, 또각.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위반. 상급자 혹은 관계 우위를 이용해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방금 저지르신 행위는 사내 안전 규정 위반 및 폭행죄에 해당하며, 즉시 가해자 직위해제 및 징계 처분이 가능한 사안입니다.”


은하가 태블릿 화면을 가르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가르크 부족의 이름이 적힌 붉은색 기안서 문서가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가르크 부족이 매년 마왕성 국고로부터 지원받는 ‘겨울철 구휼 식량 및 돼지 가죽 보급 예산’ 기안서입니다. 기물 파손에 대한 손해배상금 15,000 마정석을 현금으로 일시 상환하지 않으실 경우, 기획실장의 권한으로 이 예산안에 반려(REJECT) 도장을 찍겠습니다. 즉, 귀 부족의 연간 식량 지원 예산은 전액 ‘보류’ 및 동결 처리됩니다.”


가르크의 검은 토너가 묻은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오크들은 강력한 전사들이지만, 척박한 북부 영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들이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은 마왕성 직원 식당과 연계된 식량 보급 예산뿐이었다. 예산이 동결된다는 것은 올겨울 그의 부족원 전체가 굶어 죽는다는 뜻이었다.


“식…… 식량을 끊겠다고? 전사의 명예도 없는 비겁한 주술사 년 같으니!”


가르크가 이 악물고 소리쳤지만, 은하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예는 통장 잔고와 배식 식판에서 나옵니다. 굶어 죽은 전사에게 명예가 무슨 소용이죠? 당장 내일 아침 식당에 부족원들이 줄을 서도 배식받을 식판이 없을 텐데요.”


가르크는 은하의 말에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예산 통제권은 완벽하게 저 나약해 보이는 인간 여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부족원들의 굶주린 얼굴을 떠올린 야만 부족장의 거대한 어깨가 무력하게 꺾였다.


“제발…… 부족원들은 죄가 없다. 내가 무식해서 괴수인 줄 알고 부순 것이다. 내가 책임질 테니 식량만은 끊지 말아다오.”


오크 최강의 부족장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은하는 태블릿에 새로운 계약서 양식을 띄웠다.


“좋습니다. 사내 기물 파손에 대한 대체 집행 및 사회봉사 명령을 선포합니다. 귀하를 오늘부로 경영기획실 소속 ‘사무실 청소 임시 계약직 요원’으로 임명합니다. 시급은 마왕성 최저임금으로 책정하되, 손해배상금 15,000 마정석이 전액 변제될 때까지 원천징수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도, 동의하겠다…….”


가르크가 눈물을 흘리며 은하가 내민 마법 펜으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잠시 후, 기획실 문틈으로 지켜보던 바르가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뼈 몽둥이를 휘두르며 기획실을 부수려던 무시무시한 오크 부족장 가르크가, 몸에 맞지도 않는 앙증맞은 분홍색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채 빗자루를 들고 울면서 사무실 바닥의 토너 가루를 쓸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석구석 깨끗이 쓰세요. 먼지 한 톨이라도 남으면 오늘 일당에서 차감합니다.”


은하의 냉혹한 지시가 떨어지자, 가르크는 “흐윽…… 알겠다……”라며 이 악물고 빗자루질을 해댔다.


그때, 노란색 안전모를 쓴 가고일 반장이 이끄는 ‘마왕성 시설관리팀’이 무너진 벽 벽돌과 수리 도구를 들고 기획실 안으로 신속하게 진입했다. 드워프제 정밀 측정 기기를 든 가고일 반장이 파손된 복사기 잔해를 살펴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님, 3시간 안에 드워프 기술로 완벽하게 복구 및 보수 완료하겠습니다. 안전 수칙 제1조에 의거해 공사 구역 결계를 가동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반장님.”


은하는 다시 자신의 메쉬 의자에 깊숙이 앉아 식어버린 믹스커피를 들이켰다. 가르크가 싹싹 빌며 빗자루를 잡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군사부장 바르가스는, 칼과 마법이 아닌 보이지 않는 자본과 행정의 권능에 온몸을 사르르 떨며 기획실의 위력에 완전히 혀를 내둘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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