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비실의 구세주와 황금 비율의 유혹
“예산을 보장하라! 영수증이 웬 말이냐! 전사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마왕성 신관 10층 복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붉은 피부의 오크 전사들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마수들, 그리고 머리에 붉은 띠를 질끈 동여맨 하급 임프들까지 수백 명의 군사부 소속 마수들이 복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떼창을 하고 있었다.
이른바 마왕성 사상 최초의 ‘단체 태업 및 단식 투쟁’이었다.
경영기획실의 깨진 참나무 책상 앞에 선 유은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4시 30분. 퇴근 시간인 6시까지 정확히 1시간 30분이 남아 있었다.
‘지독하네, 정말. 한국에서 대기업 노조 파업할 때도 퇴근 직전에는 다들 눈치 보면서 슬슬 해산 준비를 하던데. 이 무식한 괴물 놈들은 시간 개념이 없어서 그런지 퇴근 시간 지연시키기 딱 좋은 타이밍에 드러누웠단 말이지.’
은하의 이성이 짜증으로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주말 출근과 야근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K-직장인이었다. 이 야수들의 시위 때문에 자신의 ‘9-to-6 칼퇴근’ 일정이 꼬이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실, 실장님…… 저 덩치들이 기획실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어쩌죠? 저 지금이라도 지하 감옥으로 도망쳐서 먼지나 쓸까요? 키익!”
은하의 정장 바지자락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은 고블린 인턴 ‘똑똑이’였다. 녀석은 조금 전 반려 도장의 인과율 결계에 두들겨 맞고 마력이 반토막 난 채 쫓겨난 크롤 군단장의 비참한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에, 군사부의 보복이 두려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똑똑이 인턴, 직원이 그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면 정규직 전환은 꿈도 못 꿉니다. 그리고 저들은 지금 굶고 있어요. 마족들의 단식 투쟁이라니, 참 눈물겨운 노사 대립이네요.”
은하는 차분하게 블루라이트 차단 은테 안경을 밀어 올렸다. 무력이 전혀 없는 평범한 인간인 그녀였지만, 전 회사 악덕 최사장 밑에서 온갖 악성 민원과 노조 갈등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다져진 독기와 깡다구는 마왕성 전체를 통틀어도 독보적이었다.
“물리적인 진압은 하책입니다. 우리 기획실은 교양 있는 현대식 행정 부서니까요. 이럴 때일수록 ‘복리후생’이라는 당근을 던져서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은하의 시선이 기획실 안쪽에 새로 마련된 아늑한 공간, ‘마왕성 신관 탕비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기자기한 오렌지빛 마법 조명 아래, 드워프 장인 볼크가 은하의 설계도를 보고 연성해 낸 ‘지옥의 믹스커피 머신’이 위엄차게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기획실의 귀염둥이 보조 인턴인 ‘임프 A (말랑이)’가 은하가 준 앙증맞은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채 대기하고 있었다.
“말랑이 인턴, 종이컵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파이어 임프, 온수 온도는?”
“파앗! 파아앗!”
탕비실 온수 파이프 아래에서 불꽃 머리카락을 일렁이던 조그만 ‘파이어 임프’가 전용 오븐 장갑을 낀 손을 번쩍 들며 경례했다. 믹스커피의 맛을 가장 완벽하게 우려내기 위한 최적의 온도, 섭씨 85도가 정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은하는 탕비실 정수기 필터를 흘끗 바라보았다. 정수기 내부에는 수석 마법학자 제레드가 은하의 요청으로 장착해 둔 고대의 푸른 마정석, 즉 ‘이성 정화석’이 필터 성분으로 내장되어 있었다.
‘제레드가 필터에 넣어둔 고대 이성 정화석 덕분인지, 이 물을 마시면 마족 특유의 흉포한 뇌파가 가라앉고 극도로 이성적인 상태가 되지. 믹스커피의 화학적 중독성에 이성 정화석의 진정 효과까지 더해지면…… 저 난폭한 짐승들도 얌전한 계약서 노예가 될 수밖에 없어.’
은하는 은밀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개인 사물함 깊숙한 곳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두던 보물을 꺼냈다. 노란색 포장지에 친숙한 글씨가 적힌 한국산 ‘K-믹스커피’ 봉지였다. 마계로 소환될 때 가방 속에 들어있던 비상식량으로, 은하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귀한 자산이었다.
“오늘 이 무식한 군단장을 길들이기 위해 내 소중한 비상금 같은 커피를 5봉지나 소모해야 하다니. 크롤, 나중에 이 비용은 반드시 군사부 예산에서 징벌적으로 공제하겠어.”
은하는 믹스커피 봉지 끝부분을 톡 뜯어 종이컵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믹스커피 황금 비율 조제’ 스킬을 발동했다. 물은 정확히 70ml. 설탕 조절용 봉지 끝부분의 비율을 손가락 끝 감각으로 정밀하게 조율해 컵 안에 투하했다.
“똑똑이 인턴, 거기 온수 밸브를 아주 미세하게…….”
“키익! 예, 실장님! 제가 돕겠습니다!”
의욕이 앞선 똑똑이가 온수 손잡이를 홱 돌리려 하자, 열원 정령인 파이어 임프가 깜짝 놀라 불꽃을 크게 뿜어냈다. 홧김에 뿜어진 뜨거운 온수가 은하의 손등으로 쏟아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앗 차거! 똑똑이 인턴, 스톱! 불꽃 임프도 진정하세요. 탕비실 내 안전 수칙 제3조, 온수 취급 시 급발진 금지입니다. 벌점 0.5점 부과하기 전에 비키세요.”
은하의 서늘한 핀잔에 똑똑이는 얼른 귀를 접고 물러섰고, 은하는 침착하게 온수를 정확히 70ml 지점까지 채워 넣었다. 그리고 티스푼을 쥔 손을 현란하게 움직여 정확히 10회 고속 회전시켰다.
사각사각, 탁탁.
그 순간, 탕비실 내부를 넘어 복도 쪽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농축 당분과 지방, 그리고 은은한 카페인의 향이 섞인 완벽한 황금 비율의 믹스커피 향이었다.
“바람의 실프 정령왕님, 부탁해요. 환풍기 방향을 복도 쪽으로 180도 전환해서 이 향기를 널리 퍼뜨려 주세요.”
탕비실 환풍기 구석에서 둥둥 떠다니던 주먹만 한 크기의 투명한 요정왕, ‘바람의 실프 정령왕’이 심술궂게 웃으며 날개를 퍼덕였다. 순식간에 탕비실의 공기가 정화되는 동시에, 복도 쪽으로 달콤한 갈색 바람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나갔다.
“예산을 보장하…… 킁킁?”
복도에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단식 투쟁을 이끌던 오크 전사들의 구호가 뚝 끊겼다.
“이…… 이 냄새는 뭐지? 지옥의 용암보다 뜨겁고, 서큐버스의 붉은 입술보다 달콤한 이 향기는?”
“내 평생 이런 향기로운 자극제는 맡아본 적이 없다! 침이…… 침이 멈추지 않아!”
수백 명의 마수들이 일제히 코를 실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붉은 안광이 오직 한 곳, 기획실 탕비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세한 노란빛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시위대의 가장 맨 앞줄에는, 조금 전 은하에게 마력을 봉인당해 기운이 쭉 빠진 채 씩씩거리던 마수 군단장 크롤이 앉아 있었다. 크롤의 늑대 가죽 투구 아래로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이건…… 내 영혼을 흔드는 냄새다. 내 뼈마디가 이 향기를 원하고 있어…….”
크롤은 마치 마법에 걸린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거구는 본능적인 이끌림에 따라 기획실 문을 지나 탕비실 입구로 서서히 다가갔다. 문틈으로 탕비실 안을 슬쩍 들여다본 크롤의 눈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색 종이컵을 들고 서 있는 유은하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크롤 군단장님. 단식 투쟁 중이시라더니, 탕비실 냄새에 이끌려 오신 건가요?”
은하가 안경알을 반짝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인간 계집…… 내게 무슨 사악한 흑마법을 부린 것이냐! 이 향기는 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크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소리쳤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은하의 손에 들린 종이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독약은 아니니 안심하고 드셔도 좋습니다. 저희 경영기획실의 공식 사내 복지 음료, ‘K-믹스커피’라고 합니다. 피로 해소와 뇌 기능 활성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죠.”
은하가 종이컵을 크롤의 코앞으로 가볍게 내밀었다.
크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은하를 쏘아보았지만, 이미 그의 위장과 뇌는 이 달콤한 악마의 음료를 거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거친 털이 수룩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종이컵을 받아 쥐었다. 뜨끈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자, 크롤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꿀꺽.
크롤이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 순간, 크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입안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프림의 묵직한 유지방, 혀끝을 짜릿하게 때리는 정제된 설탕의 단맛, 그리고 그 뒤를 묵직하게 잡아주는 카페인의 쌉싸름한 쓴맛이 뇌하수체를 다이렉트로 강타했다. 평생 피비린내 나는 생고기와 끈적하고 쓴 마력 포션만 마셔온 마계의 장군에게, 이 정교하게 조율된 한국의 화학적 단맛은 그야말로 문명의 대폭발이었다.
“크, 크허어어억……!”
크롤의 입에서 기괴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바르르 떨리더니, 손에 쥔 종이컵을 입안으로 통째로 털어 넣듯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운 단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그의 뇌 속에서 도파민과 카페인이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반려 도장에 의해 반토막 났던 마력의 빈자리가, 믹스커피가 선사하는 인위적인 각성 버프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쿵—!
크롤의 거구 가 탕비실 바닥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참나무 바닥을 적셨다.
“이…… 이것은 지옥의 꿀인가? 천상의 이슬인가? 내 평생 전장만을 떠돌며 피를 흘려왔거늘, 이 부드럽고 달콤한 액체 한 모금에 내 영혼이 구원받는 느낌이구나! 으아아앙!”
마왕성 최전방을 호령하던 무자비한 마수 군단장이, 고작 종이컵 하나를 손에 쥐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하고 있었다.
탕비실 문밖에서 숨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백 명의 오크와 마수들이 일제히 경악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의 대장이 고작 인간 계집의 음료 한 잔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다니! 하지만 그들의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는 이미 그들의 이성마저 마비시키고 있었다.
은하는 울고 있는 크롤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미리 준비해 둔 서류철을 툭 던졌다.
“군단장님, 매일 아침 출근 카드를 찍고 기획실의 양식에 맞춰 영수증을 제출하는 성실한 사원들에게는, 이 K-믹스커피가 매일 아침 ‘무상 배급’됩니다. 하지만 규정을 어기고 무단 시위를 벌이는 불량 사원들에게는…… 단 한 방울도 허용되지 않죠.”
“내, 내가 쓰겠다! 영수증을 쓰겠다!”
크롤이 은하의 정장 구두 발끝을 붙잡을 기세로 소리쳤다.
“한스 상단의 영수증이 아니라, 세상 모든 종이 조각이라도 챙겨오겠다! 내 군사들의 사냥 비용 지출 내역을 소수점 아래 단위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오마! 그러니 제발…… 제발 매일 아침 이 노란색 봉지의 이슬을 내게 허락해 다오!”
“약속하시는 건가요?”
“약속한다! 내 전사의 명예와 도끼를 걸고 약속하마!”
은하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노사 합의가 타결되었네요. 똑똑이 인턴, 군사부의 단식 투쟁 해산 건을 태블릿에 기록하세요. 그리고 복도에 대기 중인 군사부 직원들에게도 오늘만 특별히 ‘웰컴 드링크’로 믹스커피를 한 잔씩 돌리도록 하죠.”
“키익! 즉시 집행하겠습니다, 실장님!”
복도에 드러누워 있던 마수들은 자신들에게도 달콤한 갈색 이슬이 배급된다는 소식에 만세를 부르며 즉시 시위를 해산했다. 기획실 복도를 가득 메웠던 험악한 살기는 눈 녹듯 사라지고, 탕비실 앞은 커피를 받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 마수들의 훈훈한 풍경으로 채워졌다.
은하는 탕비실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마계의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5시 50분. 퇴근 시간까지 딱 10분이 남아 있었다.
‘겨우 퇴근 시간은 맞췄네. 하지만 믹스커피 소문이 마왕성 전체에 퍼지면 내 비상용 커피가 며칠 못 가 바닥날 텐데. 조만간 한스 상단을 쥐어짜서 대량 수입망을 뚫어야겠어.’
은하는 가방을 챙기며 차가운 눈빛으로 복도를 응시했다. 무식한 야수들을 길들이는 법을 터득한 수석 비서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 단계의 숨 막히는 사내 규정들이 엑셀 시트처럼 촘촘하게 짜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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