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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유예와 할부금 독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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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경계 암시장의 밤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마왕성과 인간계 교황청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그 어떤 법률도, 신의 가호도 닿지 않는 무법지대였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는 길목 한구석, 붉은 천막 사이로 은은한 주황색 불빛과 함께 코를 찌르는 매콤하고 달콤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지글지글.


두꺼운 철판 위에서 돼지고기가 매콤한 양념과 함께 익어가는 소리. 마왕성 납품 상인 한스가 은하의 지시를 받아 특별히 개설한 K-푸드 포장마차였다. 석쇠 위에서 구워지는 제육볶음의 매콤한 불향과 대파의 단내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국경 장벽 너머에서 한 달째 노숙 중인 성기사단의 텐트촌까지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포장마차 안쪽 깊숙한 테이블. 유은하는 단정한 검은색 H라인 스커트 정장 차림에 ‘블루라이트 차단 은테 안경’을 콧등에 걸친 채, 마법 행정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푸른색 엑셀 격자창이 허공에서 명멸했다.


스르륵.


그때, 낡은 천막을 젖히고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화려한 황금 갑옷 위에 초라한 회색 망토를 덮어쓰고, 얼굴을 후드로 깊게 가린 사내. 하지만 틈새로 흘러나오는 번쩍이는 금발과 잘생긴 이목구비는 숨길 수 없었다. 인간계 최강의 용사이자, 현재는 국경에서 한 달째 노숙 중인 난민 신세가 된 김성민이었다.


김성민은 포장마차 내부를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더니, 은하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품속에서 웅장해야 할 전설의 성검 ‘아스칼론’이 기이한 진동과 함께 나직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윙— 윙—.


[알림: 교황청 금융연합(Vatican Financial Union)에서 알립니다. 귀하의 성검 ‘아스칼론’ 36개월 무이자 할부 상품의 이번 달 납입금(마정석 500개)이 4개월 연속 연체되었습니다. 현재 신용등급: F(신용불량 대기). 영업일 3일 이내에 연체금을 완납하지 않을 시, 성검의 신성력 버프 라이선스가 강제 정지됩니다.]


성검에서 흘러나오는 텔레파시 경고음을 들은 김성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세상을 구하는 용사라는 자가 개인 부채 독촉에 시달리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처량했다.


은하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건넸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김성민 용사님. 변장이 참 허술하시네요. 황금 갑옷의 광채가 망토 틈새로 다 삐져나오는데, 독촉업자들이 보면 단번에 쫓아오겠어요.”


“으, 윽……! 유은하 실장, 네가 나를 이 음침한 암시장으로 불러낸 이유가 뭐냐! 신성한 용사인 나를 모욕하려는 수작이냐!”


김성민이 자존심을 세우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철판 위에서 붉은 양념을 뽐내며 볶아지고 있는 제육볶음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꼬르륵— 하는 솔직한 위장의 비명이 포장마차 내부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은하는 말없이 가죽 서류 가방에서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교황청 금융연합의 붉은 직인이 찍힌 ‘최종 채무 불이행 및 자산 압류 예고 통지서’였다.


“모욕이라니요. 저는 지극히 합리적인 ‘금융 컨설팅’을 해드리러 온 겁니다. 용사님, 이번 달 할부금 못 내시면 성검 아스칼론의 라이선스가 정지된다면서요? 신용등급이 F로 떨어지면 교황청에서 지급되는 용사 품위유지비와 노후 연금 수령 권한도 박탈당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그, 그건……!”


김성민이 당황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전부 교황청 내부의 음모다! 이번 원정 군비가 제때 지급되지 않아서 내 개인 계좌가 일시적으로 묶인 것뿐이란 말이다!”


“음모든 뭐든, 신용 등급 하락은 실전입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신용등급 F는 목이 달아나는 것보다 무서운 형벌이죠. 당장 3일 뒤면 성검의 신성 아우라가 꺼질 텐데, 그 몸으로 어떻게 마왕성을 토벌하시겠어요?”


은하가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팩트를 꽂아 넣었다.


분노한 김성민이 이성을 잃고 성검 아스칼론의 자루를 꽉 쥐었다.


“건방진 악마의 비서년이……! 정 그렇다면 여기서 네년의 목을 베어 내 용사로서의 명예를 증명하겠다!”


김성민이 검을 뽑으려 힘을 준 순간, 아스칼론의 검날이 황금빛 대신 시뻘건 경고창 홀로그램을 허공에 띄웠다.


[경고: 연체 가입자의 무단 무기 가동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무기 사용 시 할부 약관 제24조에 의거, 잔여 할부금 전체가 즉시 일시불 청구되며, 강제 채권 추심 마법이 발동합니다. 검을 즉시 칼집에 넣으십시오.]


“이, 이 빌어먹을 뼈다귀 금융 놈들이……!”


김성민은 울화통이 터지는 얼굴로 성검을 도로 칼집에 밀어 넣었다. 세상을 구하는 전설의 검이 할부금 연체 때문에 뽑히지도 않는 서글픈 현실이었다.


은하는 그 꼴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한스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한스 씨, 여기 제육볶음 곱빼기랑 믹스커피 한 잔 서빙해 주세요. 용사님이 배가 많이 고프신 것 같네요.”


“예이, 실장님!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포장마차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한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뜨끈뜨끈한 제육볶음 접시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노란색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매콤한 불향과 달콤한 설탕 냄새가 김성민의 콧구멍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자, 일단 드시면서 이야기하죠.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용사 토벌도 일단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니까요.”


은하가 젓가락을 건넸다. 김성민은 꿀꺽 침을 삼키며 자존심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했다.


‘안 된다…… 나는 고결한 성기사이자 신의 대리인…… 마족의 비서가 주는 음식을 먹을 수는…….’


하지만 한 달 동안 국경 황무지에서 딱딱하게 굳은 전투 식량과 흙탕물만 마시며 버텨온 그의 위장은 이미 한계였다. 김성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움켜쥐더니, 제육볶음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의 세상이 무너졌다.


“으, 으음……! 이, 이 맛은……?!”


매콤하고 짭조름한 양념이 혀끝을 강타하고, 불향 가득한 부드러운 고기 육즙이 입안 전체에 퍼져나갔다. 뒤이어 마신 믹스커피의 치명적인 단맛과 카페인이 뇌 세포를 강타하자, 김성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으어어억! 맛있어…… 너무 맛있단 말이다! 교황청의 그 딱딱한 보리빵과는 비교도 안 돼!”


용사는 체통도 잊은 채 허겁지겁 제육볶음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볼이 터져라 고기를 밀어 넣으며 단숨에 종이컵의 믹스커피를 들이켜는 그의 모습은 용사가 아니라 영락없는 굶주린 노숙자였다.


은하는 그 모습을 보며 차분하게 안경을 밀어 올렸다.


‘역시, 월급쟁이들의 영혼을 흔드는 데는 제육볶음만 한 게 없지.’


김성민이 식판을 싹싹 비우고 꺼억 소리를 내며 트림을 하자, 은하는 품속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주머니 틈새로 투명하고 순도 높은 최고급 규격 마정석 주화들이 짤랑거리며 빛을 발했다. 대략 마정석 2,000개는 됨직한 거금이었다.


김성민의 눈동자가 마정석의 광채에 이끌려 커졌다.


“이, 이것은……?”


“‘마왕성 보안 자문료’입니다.”


은하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합법적인 계약서 양식을 내밀었다.


“용사님은 대륙 최고의 소드 마스터이시니, 저희 마왕성 경영기획실의 ‘비공식 보안 자문위원’으로 등록되신 겁니다. 이 계약서에 서명만 하시면, 이 마정석은 합법적인 자문 수수료로 용사님의 개인 계좌에 즉시 입금됩니다. 연체된 성검 할부금을 갚고도 남을 아주 넉넉한 금액이죠. 세금 3.3%는 저희가 원천징수해 드릴게요.”


“보안 자문……? 내가 마왕성의 자문을 해준단 말이냐? 그건 배신이다! 신성 모독이란 말이다!”


김성민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이미 마정석 주머니의 짤랑거리는 소리에 반응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하는 그의 마지막 저항을 깨부수기 위해, 차가운 눈빛으로 쐐기를 박았다.


“배신이라니요. 이건 합리적인 프리랜서 계약일 뿐입니다. 게다가 용사님, 정말 억울하지 않으세요? 용사 제도의 더러운 실체를 제가 조금 조사해 봤는데 말이죠.”


은하가 태블릿 화면을 톡톡 두드려, 릴리스와 함께 밤새 대조 분석한 교황청의 채권 장부와 벨리알 공작의 이중 장부 데이터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교황청 내부 회계 장부를 크로스 체크해 본 결과, 이번 성기사단의 겨울철 보급 예산과 용사단 장비 지원비가 전부 허위 청구되어 있더군요. 성기사단장 레오폴드 씨가 부하들의 난방비와 식량 예산을 횡령해서, 이 암시장을 통해 마왕성의 마정석을 밀수하고 개인 금괴로 세탁해 온 정황이 완벽하게 포착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레오폴드 단장님이 군비를 횡령했다고?”


김성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래요. 당신들이 국경에서 추위에 떨며 굶고 있을 때, 당신들의 상관은 따뜻한 집무실에서 금괴를 세고 있었단 뜻이죠. 용사 제도는 애초에 세상을 구하기 위한 신성한 의무가 아니에요. 교황청의 거대한 군비 비리와 재정 적자를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가리기 위한 지저분한 정치적 쇼에 불과합니다. 용사님은 그 쇼의 불쌍한 소모품이자, 할부금 독촉에 시달리는 신용불량자일 뿐이고요.”


은하의 건조하고 잔인한 목소리가 김성민의 고결한 신앙심을 산산조각 내며 파고들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충성했던 교단이 사실은 자신을 착취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빚더미로 몬 장본인이 상관인 레오폴드 단장이라는 진실.


김성민의 주먹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마왕성을 향한 적개심이 아닌, 자신을 기만한 교황청 고위층을 향한 지독한 배신감이었다.


“레오폴드…… 그 위선자 늙은이가 감히 우리를…… 내 신용등급을 가차 없이 깎아내리면서 자기 배만 불렸단 말인가……!”


“억울함을 풀고 싶으시다면, 합법적인 금융 치료를 받으세요.”


은하가 마력 만년필을 김성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문 계약서에 서명하시고, 레오폴드 단장이 군비를 세탁하던 비밀 경로와 교황청 내부의 회계 정산 영수증을 저희에게 넘겨주세요. 그럼 이 마정석은 전부 당신의 것입니다. 성검 아스칼론의 할부금도 저희가 대납해 드리죠.”


김성민은 만년필을 쥔 채, 지옥 같은 채무 고지서와 눈앞의 달콤한 마정석 주머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이성이 자본주의의 압도적인 힘 앞에 툭 하고 끊어졌다.


사각, 사각.


김성민은 홀린 듯 자문 계약서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 넣었다. 서명이 완료되는 순간, 마력 만년필이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계약의 효력을 인과율 상에 각인시켰다.


“……말하겠다.”


김성민이 마정석 주머니를 품에 꼭 껴안으며, 충혈된 눈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레오폴드 단장은 매달 국경의 수송대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마정석을 밀수해 왔다. 그 자금은 교황청 재정 추기경인 우르바누스의 비밀 계좌를 거쳐 금괴로 환전되어 단장의 개인 금고로 들어간다. 내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날짜와 비밀 영수증의 보관 위치를 전부 가르쳐 주지.”


용사의 입에서 교황청의 거대한 비리와 횡령 경로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은하는 안경알을 번뜩이며 그의 자백을 태블릿에 실시간으로 타이핑해 나갔다.


마침내 교황청 성기사단을 단숨에 파산시키고 마왕성의 계열사로 인수합병(M&A)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일급 스모킹 건이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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