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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 앞의 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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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ROR: 예약되지 않은 일정 (NOT RESERVED)”


마왕성 국경 장벽을 가로막은 반투명한 푸른색 결계막 위로 거대한 적색 경고등이 명멸하고 있었다. 인과율을 강제로 왜곡하는 아웃룩 결계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돌격 대열의 맨 선두에 서 있던 교황청 성기사단장 레오폴드의 황금마와 기사들의 거대한 검이 공중에서 거짓말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진군하려던 의지 자체가 행정적 오류 판정을 받고 차원 상에서 동결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 정화의 힘으로 이 장벽을 뚫어라!”


레오폴드가 굳어버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기사들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눈동자만이 공포와 당혹감으로 이리저리 굴러갈 뿐이었다.


그 대열의 한가운데,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고 전설의 성검 ‘아스칼론’을 쥔 사내만이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계 최강의 소드 마스터이자 교황청이 야심 차게 파견한 구세주, 용사 김성민이었다.


“젠장, 또 시작이군! 그 미친 인간 비서 년이 또 해괴한 법률을 들고나온 게 틀림없어!”


김성민은 이가 갈렸다. 마왕성을 침공하려 할 때마다 ‘무단 침입 금지 규정’이니 ‘소음 공해 유발 조례’니 하는 온갖 행정 문서 폭탄을 들이밀며 자신을 반려(REJECT)시켰던 검은 단발머리의 은테 안경잡이 계집, 유은하 실장의 서늘한 미소가 머릿속을 스쳤다.


성검 아스칼론에 깃든 투기를 쥐어짜 결계를 타격하려던 김성민이 검을 번쩍 치켜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국경 장벽 바로 앞, 황무지 바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육중한 석조 기둥 하나가 솟아올랐다. 기사들이 침을 삼키며 경계 태세를 취했으나, 솟아오른 것은 거대한 골렘도, 함정 마법진도 아니었다.


그것은 매끄러운 마법 유리 화면과 정교한 마정석 리더기가 장착된, 현대 한국의 지하철역이나 대형 패스트푸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림한 디자인의 ‘침공 사전 예약 전용 마법 키오스크’였다.


띵동—♪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키오스크의 거대한 마법 화면이 밝아졌다. 동시에 기계적인 음성이 국경 지대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비인가 물리적 충격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마왕성 국경 관리법 제15조에 의거, 사전 예약 없이 결계를 타격할 시 ‘공공기물 파손 및 무단 침입죄’가 적용됩니다. 현재 기사단의 침공 신용 벌점: 10점 부과.]


“신용 벌점?! 기물 파손?! 우리는 세상을 구하러 온 용사단이다! 이따위 기계 상자가 감히 우리를 평가하려 드는 거냐!”


성기사 중 한 명이 분노해 키오스크를 대검으로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김성민의 뒤에 서 있던 부하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그의 갑옷 자락을 붙잡아 말렸다.


“멈추십시오, 켄트 경! 부수면 안 됩니다! 지난번 원정대도 저 기계를 부쐈다가 ‘마왕성 영구 밴(Ban)’ 조치를 당했습니다! 영구 밴을 당하면 평생 성전(Holy War) 실적 kpi를 채우지 못해 진급 길도 막히고 연금도 삭감당합니다!”


“으, 윽…… 연금 삭감?”


검을 치켜들었던 기사가 현실적인 노후 대책의 위협 앞에 덜덜 떨며 슬그머니 검을 내렸다. 아무리 신앙심 깊은 성기사단이라 할지라도, 교황청의 월급을 받고 일하는 엄연한 직장인들이었기에 인사 평점 하락은 죽음보다 무서운 형벌이었다.


그때, 키오스크의 홀로그램 화면 중앙에 푸른색 전산 필터가 작동하더니, 익숙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기사단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마왕성 경영기획실장 유은하입니다.”


화면 속에 나타난 유은하는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H라인 스커트를 입고, 한 손에는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든 채 가죽 메쉬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콧등에 걸친 은테 안경알이 마법 태블릿의 푸른 광선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유은하 실장! 당장 이 해괴한 장벽을 치우지 못할까! 우리는 신의 뜻을 받들어 마왕성을 토벌하러 왔다!”


김성민이 키오스크 화면을 향해 성검을 겨누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은하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귀찮다는 듯 태블릿 화면을 아래로 슥슥 스크롤할 뿐이었다.


“김성민 용사님, 목소리 톤 좀 낮춰주세요. 데시벨 오버로 소음 공해 유발 벌점 추가되기 전에요. 그리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저희 마왕성은 이번 분기부터 ‘아웃룩 일정 미등록 침공 무효화법’을 공식 시행하고 있습니다. 사전 예약서 수신 내역 없음, 침공 목적 정의서 제출 내역 없음. 당연히 국경 통과용 환경영향평가서도 누락되었습니다. 절차상 하자가 명백하므로 본 침공은 원천 반려입니다.”


“무슨 침공을 예약하고 해! 전쟁이 장난인 줄 아느냐!”


“장난은 용사님이 치고 계시죠. 선전포고문 한 장 없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는 건 엄연한 국제법 및 사내 보안 규정 위반입니다. 저희 보안팀장 바르가스 씨가 당장이라도 당신들을 불법 침입죄로 기소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은하의 차가운 팩트 폭행에 김성민은 말문이 막혔다. 옆에 있던 레오폴드 단장 역시 황금 투구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은하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결계를 열어줄 셈이냐? 설마 순순히 물러가라고 하진 않겠지?”


레오폴드가 굴욕적인 표정으로 묻자, 은하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키오스크 화면을 톡 두드렸다.


“합법적인 침공을 원하신다면, 지금 즉시 국경 키오스크를 통해 ‘침공 목적 정의서 및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하십시오. 총 50페이지 분량이며, 필수 입력 항목을 단 하나라도 누락할 시 시스템이 자동으로 접수를 반려하고 대기 순번은 초기화됩니다.”


“50페이지?!”


김성민의 비명이 황무지에 메아리쳤다. 검을 휘둘러 몬스터의 목을 베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50페이지짜리 서류를 작성하는 것은 그에게 지옥의 형벌과도 같았다.


“자, 대기 순번 1번이시니 신속하게 작성해 주세요. 뒤에 대기 중인 다른 모험가 길드분들도 계시니까요.”


은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키오스크 화면에 거대한 문서 양식이 떠올랐다.


[제1페이지: 침공 주체 및 보증인 인적 사항]

[필수 기입 항목: 침공군 소속 교구 코드, 기부금 영수증 발급 번호, 원정대 총예산 대비 장비 감가상각비 산출 내역……]


“이, 이게 다 대체 무슨 소리야?! 감가상각비는 또 뭐고 교구 코드는 어디서 찾는 건데!”


김성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키오스크 화면을 마구 터치했다. 하지만 화면에는 가차 없이 빨간색 경고창이 명멸했다.


[삐빅. 필수 입력 항목 누락: ‘침공으로 인한 예상 탄소 배출량 및 마력 독소 정화 계획’을 서술하십시오.]


“우리가 칼 들고 싸우는데 탄소 배출량이 왜 나와! 말들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라도 계산하라는 거냐!”


“당연하죠. 마계 대기 보전 조례 제5조에 의거, 국경을 통과하는 모든 이동 수단은 탄소 배출 제한 기준을 준수해야 합니다. 말들의 배설물 처리 계획서도 첨부하셔야 해요.”


화면 속 은하의 대답은 지독하리만큼 단호하고 현실적이었다.


김성민은 이 악물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 애썼다. 그러나 두 번째 관문은 더 잔인했다.


[제12페이지: 원정대장 신용도 및 개인 부채 상태 검증]

[필수 기입 항목: 귀하의 신앙심 수치를 마력 밀도(hPa)로 정량화하여 증빙 서류를 첨부하고, 개인 채무 연체 여부를 자진 신고하십시오.]


“신앙심을…… 정량화하라고? 그걸 어떻게 숫자로 써?! 게다가 개인 채무는 또 왜 물어보는 건데!”


김성민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은빛 갑옷 안쪽, 가슴팍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붉은색 마법 봉투의 촉감이 소름 돋게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흘 전 인간계 ‘교황청 금융연합’에서 날아온 일급 독촉장이었다.


[경고: 전설의 성검 ‘아스칼론’ 36개월 할부금 4개월 연속 연체. 현재 잔여 할부 기간: 32개월. 즉시 미납금을 납부하지 않을 시 귀하의 신용등급은 ‘F(신용불량자)’로 강등되며, 성검에 부여된 신성 버프 라이선스가 원격으로 강제 회수(정지)될 예정입니다.]


‘으윽, 이 사실이 마왕성 비서 년에게 알려지면 내 용사 커리어는 끝장이다……!’


김성민은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키오스크의 ‘채무 연체 없음’ 버튼을 누르려 했다. 하지만 은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용사님, 허위 사실 기재 시 차원 신용 평가법 위반으로 즉시 침공 자격이 영구 박탈되며, 성검 아스칼론에 대한 압류 집행장이 인간계 법원에 정식 접수됩니다. 이미 저희 재무부 릴리스 팀장님이 교황청 금융연합의 부실 채권 장부를 실시간으로 크로스 체크하고 계시거든요.”


“너, 너희가 그걸 어떻게 알아!”


“북부 영지 감사할 때 벨리알 공작의 비밀 금고에서 교황청 비밀 계좌 내역을 전부 확보했거든요. 용사님의 할부금 연체 데이터도 아주 정연하게 백업되어 있답니다. 신용등급 하락 직전이시던데, 성검 라이선스 정지되면 전투력 90% 급감하시는 거 맞죠?”


은하의 은테 안경 너머로 지독하게 영악한 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용사의 사기적인 무력 뒤에 숨겨진 ‘신용불량’이라는 지독한 현실적 채무 약점을 완벽하게 쥐고 흔들고 있었다.


김성민은 절망감에 휩싸여 성검 아스칼론의 자루를 꽉 쥐었다. 검날에 서려 있던 찬란한 신성 투기가 그의 초조한 심리를 반영하듯 미세하게 흔들리며 흐려졌다. 할부금을 내지 못해 성검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용사라니,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


성기사단 대원들도 키오스크 주변을 에워싼 채 웅성거렸다.


“이봐, 진짜 부수면 안 되는 건가? 그냥 단장님의 명령대로 돌격해서 저 기계를 박살 내면 안 돼?”


“미쳤어? 저기 경고문 안 보여? ‘기물 파손 시 침공 영구 금지 및 관련 교구 징벌적 세금 부과’라고 적혀 있잖아! 교황청에서 우리 월급 다 깎아버릴걸!”


“게다가 저 비서 실장이라는 인간 계집, 눈빛이 우리 교구의 깐깐한 감사관보다 백배는 더 무서워…….”


기사단의 사기는 이미 땅바닥을 치고 있었다. 칼과 방패를 들고 전장을 누비던 영웅들이 고작 50페이지짜리 서류 양식과 신용등급 강등의 공포 앞에 완벽하게 고사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민은 키오스크 화면의 에러 메시지 `#VALUE! (입력 값 오류)`를 바라보며 주저앉고 싶었다.


“아아악! 몰라! 그냥 다 베어버릴 거야! 신앙이고 서류고 다 필요 없어!”


이성을 잃은 김성민이 결국 서류 작성을 포기하고 성검 아스칼론을 치켜들어 결계를 향해 내려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국경 지대의 황량한 대지 너머로, 웅장한 신성 마법 문양이 각인된 순백의 마법 마차 한 대가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광속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차의 지붕 위에는 교황청의 공식 행정 인장이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키이익—!


마차가 키오스크와 성기사단 대열 바로 앞에 급정거했다. 문이 열리며, 단정하게 빗어 넘긴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빛내는 고결한 이미지의 여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은빛 갑옷을 입고 등 뒤에 반투명한 깃털 날개를 단 그녀의 손에는, 부정한 서류를 닿는 즉시 태워버린다는 교황청의 보물 ‘신성한 판결의 깃털 펜’이 쥐어져 있었다.


교황청 수석 기획관이자 은하의 행정적 라이벌, 발키리 시그리드였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키오스크 화면 속 유은하를 응시하며, 품속에서 금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문서를 꺼내 들었다.


“거기까지 하십시오, 마왕성의 행정관님. 교황 성하의 직인이 날인된 ‘성전 예외 조약서’를 대령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귀하의 결계 해제를 공식 요구합니다.”


시그리드의 등장이 국경 지대의 얼어붙은 공기를 단숨에 깨뜨리며, 새로운 행정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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