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자 전환 보고와 국경의 그림자
북부 지사에서 날아온 똑똑이 대리의 성공 보고서를 확인한 유은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피에 굶주렸던 북부의 오크와 뱀파이어들이 미노타우로스 셰프의 K-제육볶음과 믹스커피의 노예가 되어 자발적으로 출근 카드를 찍고 있다는 소식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그녀에게 그 어떤 전설의 마법보다도 짜릿한 승전보였다.
하지만 K-직장인의 사전에 ‘여유로운 휴식’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은하는 단정한 검은색 H라인 오피스 스커트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콧등에 걸친 블루라이트 차단 은테 안경 너머로, 오늘 아침 마왕 발락에게 보고할 분기별 경영 실적 보고서 인쇄본이 빳빳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자, 회장님 결재 받으러 가볼까.”
은하는 마법 행정 태블릿과 가죽 서류 가방을 챙겨 알현실로 향했다.
마왕성 알현실의 묵직한 철문이 열리자, 검은 갑옷을 입고 해골 왕좌에 앉아 있던 마왕 발락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은하를 맞이했다. 평소 같으면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둥, 용사의 목을 베겠다는 둥 피비린내 나는 정복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겠지만, 오늘의 발락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왕좌 구석에 방치된 역대 용사들의 부러진 성검 파편들이 쓸쓸하게 뒹구는 가운데, 발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오, 유 실장 왔는가! 그래, 북부 영지 감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벨리알 놈이 반란이라도 일으켰느냐? 내 왕좌의 온돌 마력이 끊기지 않을지 내 심장이 매일 덜덜 떨리는구나!”
과거 용사에게 패배한 트라우마를 가리기 위해 과소비와 무리한 전쟁을 일삼던 마왕 발락은, 은하를 만난 이후 완벽한 ‘부도 공포증’에 시달리는 바지 회장님으로 전락해 있었다. 은하는 차분하게 태블릿을 조작해 알현실 중앙 허공에 거대한 3D 홀로그램 실적 보고서를 띄웠다.
“보고드리겠습니다, 회장님. 북부 영지 벨리알 공작의 10년 치 세무 감사를 완료하였으며, 탈세 및 교황청 밀수 혐의를 적발하여 영지 자산을 합법적으로 전액 압류했습니다. 압류된 적마정석 금괴와 비자금은 총 800만 마정석 규모입니다.”
“8, 800만 마정석……?!”
발락의 턱관절이 덜컥거리며 벌어졌다.
“또한, 북부 영지를 ‘경영기획실 북부 지사’로 개편하여 사원들의 근태를 전산화한 결과, 광산 채굴 생산성이 기존 대비 300% 폭등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왕성 개설 이래 최초로…….”
은하가 무선 프레젠터 레이저 포인터의 버튼을 딸깍 눌렀다.
홀로그램 화면이 전환되며, 시커먼 적자 구렁텅이에서 헤매던 그래프 곡선이 수직으로 상승해 찬란한 황금빛 영역으로 진입하는 ‘분기별 누적 영업이익률 꺾은선그래프’가 펼쳐졌다.
“사상 최초의 대규모 재정 흑자 전환(Black Ink)을 달성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마왕 발락은 웅장하게 뻗어 올라간 황금빛 꺾은선그래프의 아름다운 곡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 불꽃 대신 감격의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려 갑옷 위에서 칙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발락은 왕좌에서 허겁지겁 내려와 은하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흑자……! 내 평생 마계를 지배하면서 ‘흑자’라는 단어를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도다! 유 실장! 네가 진정 이 마왕성의 구세주로구나! 이 차가운 왕좌에 온돌을 마음껏 틀어도 마왕성이 부도나지 않는다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회장님. 정당한 예산 통제와 복지 정책이 무력보다 강하니까요.”
은하는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옷깃을 정돈했다. 발락은 감격에 겨워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당장 유 실장에게 거액의 특별 성과급 보너스를 지급하겠다! 마왕성 국고에서 원하는 만큼 금괴를 가져가거라! 내 전폭적인 지지는 영원할 것이다!”
수십만 마정석에 달하는 특별 보너스 수령 통지가 태블릿에 찍히는 순간, 은하의 입꼬리가 자본주의의 정직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가볍게 올라갔다. 드디어 퇴직금 50억 골드를 모아 지구의 조용한 바닷가에 펜션을 차려 은퇴하겠다는 꿈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다.
콰아아앙—!
그러나 평화로운 흑자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알현실의 거대한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나듯 열렸다. 푸른 깃털 날개를 파닥거리며 고글을 쓴 ‘하피 전령관’이 숨을 헐떡이며 알현실 바닥으로 굴러 들어왔다. 온몸의 깃털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채,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실장님! 마왕님! 큰일났습니다! 국경 지대에…… 인간계 교황청의 성기사단이 집결했습니다!”
“음머?! 성기사단이라고?!”
알현실 구석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던 미노타우로스 셰프가 깜짝 놀라 중식도를 떨어뜨렸다. 마왕 발락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과거의 패배 트라우마가 스치며 붉은 살기가 폭발했다.
“교황청 놈들이 드디어 미쳤구나! 감히 내 흑자 전환의 기쁨을 방해하려 들다니! 3만 마수 군단을 소집해라! 국경을 피로 물들여 주마!”
“회장님, 진정하세요. 불필요한 전쟁은 예산 낭비의 주범입니다.”
은하의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광폭화하려던 마왕의 이성을 단칼에 붙잡았다. 은하는 한숨을 쉬며 가죽 가방에서 마법 행정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스크롤했다.
“전령관님. 성기사단의 침공 규모와 예상 진군 경로를 보고하세요.”
“그, 그것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선전포고문조차 보내지 않고 국경 결계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성기사단장 레오폴드가 이끄는 황금 갑옷 군세가 당장이라도 국경을 돌파해 마왕성으로 진격하려 합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쳐들어왔다라.
은하의 눈빛이 극도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태블릿의 사내 인트라넷 아웃룩 캘린더(Outlook Calendar)를 열었다.
“아웃룩 일정 확인 결과…… 오늘 날짜에 ‘인간계 침공’ 관련 사전 예약 내역, 없음. 교황청 발신 ‘침공 목적 정의서’ 수신 내역, 없음. 당연히 국경 통과용 환경영향평가서 제출 내역, 없음.”
은하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아웃룩에 등록되지 않은 침공은 반려입니다. 무단 침입은 사내 보안 규정 및 국경 관리법 위반입니다.”
“유, 유 실장? 아무리 그래도 저들은 군대다! 서류를 따진다고 멈출 놈들이 아니란 말이다!”
발락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은하는 이미 ‘만년필 형태의 마력 만년필’을 꺼내 들고 태블릿 화면 위에 날카로운 서명을 갈겨 쓰고 있었다.
“제레드 교수님, 들리십니까? 마왕성 국경 관리법 제15조, ‘아웃룩 일정 미등록 침공 무효화법’을 가동합니다. 국경 방어탑의 인과율 결계를 동기화해 주세요.”
[알림: 아웃룩 일정 미등록 침공 무효화 프로토콜이 승인되었습니다. 국경 결계막 가동을 시작합니다.]
태블릿 화면에 푸른색 시스템 경고창이 명멸했다. 동시에 마왕성 중앙의 마력 발전기가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일시적으로 부하 소음을 내뿜었다.
같은 시각, 마왕성 국경 지대.
번쩍이는 황금 갑옷을 입은 수천 명의 교황청 성기사단이 국경 장벽을 향해 대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성기사단장 레오폴드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더러운 마족 놈들을 멸하고 성지 에덴의 영광을 되찾으리라! 전군, 돌격하라!”
“와아아아!”
기사들이 일제히 말을 채찍질하며 국경선을 넘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웅—!
갑자기 국경 지대의 하늘이 거대한 황금빛 시계 태엽 문양으로 뒤덮이더니, 반투명한 푸른색 결계 장막이 대지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장막 표면에 거대한 붉은색 글자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ERROR: 예약되지 않은 일정 (NOT RESERVED)]`
`[본 침공은 아웃룩 캘린더에 사전 등록되지 않은 불법 행위이므로, 인과율 상 진입이 무기한 반려됩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마법 장벽인가? 부수어라!”
레오폴드가 당황해 검을 내리쳤지만, 결계에 닿는 순간 기사들의 말과 무기, 그리고 그들이 입은 황금 갑옷 전체가 인과율 왜곡에 휘말려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돌격하던 기사단 전체가 국경선 바로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일제히 동결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알현실의 마법 수정구를 통해 이 황당하고 압도적인 방어 현장을 지켜보던 마왕 발락과 마족 간부들은 턱이 빠질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은하는 차분하게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펜을 돌렸다.
“다음부터는 침공하시려면 최소 2주 전에 기안 올려서 일정 잡으라고 하세요. 바쁜 사람 야근하게 만들지 말고.”
K-직장인의 한이 서린 독기가, 마계와 인간계의 인과율을 비틀어 거대한 군대를 단숨에 묶어버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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