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도장의 위력과 첫 번째 희생양
마왕성 신관 10층, 사방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마계의 칙칙한 붉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이 바로 새로 출범한 ‘마왕성 경영기획실’이었다.
현대 한국의 오피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환경이었지만, 유은하의 지독한 집념 아래 제법 그럴듯한 사무실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드워프 장인 볼크를 닦달해 만든 반듯한 참나무 책상, 가죽으로 마감한 서류 캐비닛, 그리고 책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마법 행정 태블릿과 빨간 인크 패드.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초록색 피부에 앙증맞은 아동용 정장을 입은 꼬마 고블린 하나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서 있었다.
"똑똑이 인턴."
"키, 키익! 예, 실장님!"
은하의 차분한 부름에 고블린 ‘똑똑이’가 귀를 바짝 붙이며 관등성명을 댔다. 마왕성 지하 감옥 구석에서 먼지나 쓸던 하급 고블린이었던 녀석은, 은하가 ‘눈빛이 똘똘해 보인다’는 이유로 기획실의 첫 번째 인턴 사원으로 특별 채용한 존재였다.
"내가 어제 가르쳐 준 엑셀 기본 단축키, 복습은 했나요?"
"했, 했습니다! Ctrl+C는 복사, Ctrl+V는 붙여넣기! 그리고 Ctrl+Z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아니, 실행 취소입니다!"
"아주 좋아요. 마족치고는 지능이 우수하네요. 정규직 전환 평가에 반영할 테니 앞으로도 정진하세요."
은하는 은테 안경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법 행정 태블릿의 매끄러운 스크린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는 은하가 밤새 작성한 마왕성 최초의 성문화된 법률, ‘기안서 반려 규칙’과 ‘영수증 증빙 의무화 규정’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기록되어 있었다.
"기억하세요, 똑똑이 인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이 마왕성 경영기획실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이나 화염 마법이 아닙니다. 바로 이 ‘규정’과 ‘증빙’이죠. 아무리 강한 마수라도 영수증이 없으면 단 1골드도 가져갈 수 없어요. 이것이 회사의 절대 법칙입니다."
"키익…… 영수증…… 증빙……."
똑똑이는 은하의 서늘한 눈빛과 그 뒤에 서린 지독한 원칙주의 아우라에 압도되어 꿀꺽 침을 삼켰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유은하 실장은 이미 마왕 발락보다 더 무섭고 거대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경영기획실의 묵직한 참나무 문이 거칠게 박살 나며 안쪽으로 나뒹굴었다. 엄청난 폭풍과 함께 매캐한 흙먼지가 사무실 안으로 휘몰아쳤다.
"키야아아악!"
똑똑이는 비명을 지르며 즉시 은하의 참나무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먼지 장막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덩치의 괴물이었다. 머리에는 피비린내 나는 늑대 가죽을 뒤집어쓰고, 온몸은 단단한 근육과 흉터로 뒤덮인 거구의 야수. 그의 손에는 사람 몸통만 한 마법 도끼 ‘블러드액스’가 쥐어져 있었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서는 당장이라도 상대를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왕성 최전방 전투 부대를 이끄는 무식한 군단장, 마수 군단장 크롤이었다.
"어떤 건방진 인간 계집이 내 사냥 예산을 동결시켰느냐!"
크롤의 포효가 사무실 유리창을 징징 울렸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은하의 책상 위에 거대한 블러드액스를 쿵! 하고 찍어 내렸다. 참나무 상판에 쩍 갈라지는 균열이 생기며 깊은 자국이 남았다.
하지만 유은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안경알에 묻은 미세한 먼지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털어내며, 태블릿의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할 뿐이었다.
‘도끼를 휘두르며 협박하는 군단장이라니. 월요일 아침 9시 회의 때 결재판을 내 얼굴에 던지며 꺼지라고 소리치던 최사장의 히스테리에 비하면 이건 그냥 귀여운 대형견의 투정에 불과하지.’
은하는 서늘한 눈빛으로 크롤을 올려다보았다.
"용건은 기안서 작성인가요, 아니면 무단 침입 및 사내 기물 파손죄 추가인가요? 크롤 군단장님."
"뭐라?! 이 나약한 인간 년이 감히 누구 앞에서 주둥이를 놀리느냐! 내 군사들이 인간계 국경에서 피를 흘리며 사냥을 마쳤다! 당장 전투 식비와 사냥 보상금으로 청구한 10,000골드를 내놓아라! 기획실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승인을 안 해줘서 금고가 잠겼다고 들었다!"
크롤이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등 뒤로 붉은 마력이 불길처럼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도끼로 은하의 목을 벨 기세였다.
은하는 한숨을 쉬며 태블릿 화면의 특정 항목을 가리켰다.
"군사부에서 올린 ‘전투 식비 및 포션 소모 비용 청구서’를 확인했습니다. 총액 10,000골드. 그런데 말이죠, 군단장님. 이 청구서에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더군요."
"빠진 게 무엇이란 말이냐! 우리 전사들의 기백이 빠졌더냐?!"
"아니요. 영수증이요."
"……영수증?"
크롤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평생 피와 비명 속에서 살아온 야수에게 ‘영수증’이라는 단어는 고대 마법 주문보다 더 생소한 외계어였다.
"예산 집행 세칙 제4조 지출 증빙 규정에 따르면, 마왕성 국고에서 자금을 인출할 때는 반드시 한스 상단이나 공식 공인 기관이 발행한 바코드 영수증, 혹은 그에 준하는 물리적 지출 증빙을 첨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군단장님이 제출한 서류에는 그냥 양피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고기 값 10,000골드 줘’라고만 적혀 있네요. 이건 기획실 입장에서 증빙 불가한 허위 청구로 분류됩니다."
"이, 이 빌어먹을 년이! 전사들에게 영수증 따위가 왜 필요하단 말이냐! 우리 군사들의 상처와 적들의 머리 가죽이 바로 영수증이다!"
크롤이 분노하며 허리춤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친 자루 하나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책상 밑에 숨어 있던 똑똑이가 다시 한번 짧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은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가죽 장갑을 끼고 손가락 끝으로 그 자루를 툭 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위생 규정 위반이네요. 청소 요원 가고일 반장님께 신고하기 전에 치우세요. 그리고 적의 머리 가죽은 세법상 공식 증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한스 상단에서 구매한 고기 단가와 수량이 명시된 종이 영수증을 가져오지 않으시면, 이 기안은 무조건 반려입니다."
"감히 내 청구를 반려하겠다고?! 전사의 명예를 모독한 대가는 오직 피로만 갚을 수 있다!"
크롤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고, 거대한 도끼를 양손으로 치켜들었다. 도끼날에 서린 붉은 오라가 기획실 천장을 태워버릴 듯 이글거렸다.
"이 자리에서 네년의 머리를 쪼개고 금고 열쇠를 빼앗겠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은하의 온몸을 짓눌렀다. 50%의 마력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은 심장이 터져 죽을 수 있는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은하의 머릿속에서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칼퇴근 시간까지 앞으로 2시간 남았는데, 이 무식한 오크 놈 때문에 일정이 꼬이게 생겼네. 월요일 아침부터 시말서 쓰게 만들었던 김부장보다 이 늑대 가죽 쓴 녀석이 훨씬 귀찮아.’
은하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묵직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붉은 인크가 잔뜩 묻은 ‘수석 비서의 반려 도장’을 꺼내 쥐었다.
"군단장님. 마지막 경고입니다. 규정을 준수하세요."
"죽어라, 인간 년아!"
크롤이 도끼를 내리찍는 바로 그 순간.
은하는 매서운 기세로 책상 위의 기안서 반려란을 향해 도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경쾌하고 묵직한 마찰음이 울려 퍼진 순간, 도장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진홍빛 마법 결계가 기획실 전체를 덮쳤다.
[기안서 반려 규칙 제1조 가동: 비인가 및 증빙 미비 기안에 대한 강제 반려(REJECT)를 집행합니다.]
파아아앙—!
도장이 찍힌 양피지에서 붉은색 마력 사슬이 뱀처럼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크롤의 거대한 몸을 칭칭 감싸 안았다. 공중에서 은하의 머리를 쪼갤 듯 내려오던 거대한 블러드액스가 투명한 붉은 벽에 가로막힌 채 공중에서 딱 멈춰 섰다.
"어, 어억?! 이, 이게 무슨……!"
크롤이 당황하여 힘을 주려 했지만, 그의 온몸을 결박한 붉은 사슬은 인과율의 법칙 그 자체였다. 결계의 붉은 빛이 번쩍일 때마다 크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흉포한 마력이 급격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반려 도장의 부가 효과 발동: 위반자의 마력을 3시간 동안 50% 강제 봉인합니다.]
"크, 크학! 내, 내 마력이…… 힘이 빠진다!"
크롤의 거대한 덩치가 바르르 떨렸다. 도끼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며 블러드액스가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쿵! 무거운 쇠붙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만이 침묵에 잠긴 기획실에 울려 퍼졌다.
크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왕성 최전방을 누비며 수천의 적을 학살했던 자신의 마력이, 고작 인간 여자가 찍은 빨간 도장 하나 때문에 절반이나 날아간 것이다.
은하는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리며, 반려 도장을 제자리에 깔끔하게 내려놓았다.
"반려 도장의 인과율 결계는 마왕성 경영 개선 비상 조치법 제1조에 의거해 작동합니다. 규정을 어기고 무력을 행사하려 하셨으니, 앞으로 3시간 동안 마력의 50%가 봉인될 겁니다. 그리고……."
은하는 깨진 참나무 책상 상판을 가리켰다.
"사내 기물 파손죄로 다음 달 군사부 소모품 예산에서 책상 수리비 50골드를 공제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신가요?"
"이, 이 사악한 인간 마녀 년이…… 무슨 저주를 건 것이냐!"
크롤은 마력이 반토막 난 상태에서 은하를 향해 씩씩거렸지만, 차마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은하의 뒤편에서 풍기는 건조하고 냉혹한 ‘행정의 살기’는, 그가 전장에서 겪었던 그 어떤 죽음의 위협보다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키익! 실장님 최고! 반려 도장 만세!"
책상 밑에서 기어 나온 똑똑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군단장님, 3시간 동안은 얌전히 계시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반드시 한스 상단의 공식 영수증을 지참해서 결재 라인을 타세요. 아시겠어요?"
은하의 차가운 쐐기타에 크롤은 결국 분통을 터뜨리며 도끼를 주워 들고 기획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두고 보자! 감히 전사들의 밥줄을 끊다니! 내 군사부 전체가 이 모욕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크롤의 마지막 외침이 복도 멀리 사라졌다.
은하는 깨진 책상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똑똑이 인턴."
"예, 실장님!"
"시설관리팀 가고일 반장님께 연락해서 책상 상판 교체 요청서 기안 올리라고 하세요. 예산 과목은 ‘군사부 징벌적 공제 재원’으로 잡고요."
"키익!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똑똑이는 이제 완전히 은하의 노예가 된 듯한 눈빛으로 태블릿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빌런 간부인 크롤의 기세를 꺾어놓는 데는 성공했다. 반려 도장의 인과율 결계가 얼마나 완벽하게 작동하는지 눈으로 확인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30분 뒤, 마왕성 신관 10층 복도 전체가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거친 포효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인간 기획실장은 나와라!"
"우리 군사들의 피땀 어린 보상금을 내놓아라!"
"예산 동결을 해제하라! 해제하라!"
크롤의 선동을 받은 군사부 소속 오크 전사들과 마수 병사들 수백 명이 기획실 앞 복도를 가득 메우고 단체 태업 및 단식 투쟁을 선언하며 드러누운 것이다. 복도 너머로 붉은 안광을 빛내며 으르렁거리는 마수들의 떼거리가 보였다.
은하는 시계를 보았다. 퇴근 시간까지 정확히 1시간 30분 남은 시점이었다.
"하아…… 정말 지독하게도 K-대기업 노조 같은 짓을 하는군요."
은하는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탕비실 구석에 설치된 아직 가동하지 않은 ‘지옥의 믹스커피 머신’을 바라보았다.
무식한 야수들의 단체 행동을 물리력 없이 진압하고, 그들을 완벽한 월급쟁이 노예로 길들이기 위한 은하의 두 번째 계획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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