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지사 설립과 제육볶음의 전파
벨리알 공작이 몰락하고 차가운 지하 감옥으로 이송된 지 단 사흘째 되던 날, 북부 영지의 중심지인 잿빛 성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기 일보 직전이었다. 수백 년 동안 공포와 폭력으로 영지를 지배하던 절대적인 지배자가 사라지자, 성채에 남겨진 하급 마족들과 용병 오크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영주 놈도 사라졌고, 금고도 텅 비었다며!"
"이참에 성채 안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들을 전부 약탈해서 도망치자!"
어둡고 습한 성채 연병장 구석에서 덩치 큰 오크 전사들과 창백한 피부의 하급 뱀파이어들이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은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야수 특유의 난폭함과 무질서한 탐욕이 일렁였다. 무력이 지배하는 마계에서 지배자의 부재는 곧 약탈과 폭력의 해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법천지의 한복판, 벨리알 공작이 쓰던 화려한 집무실에는 뜻밖의 인물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자간이 엉망이군요. 게다가 폰트는 왜 뜬금없이 굴림체입니까? 기안 양식 미비로 반려(REJECT)입니다. 당장 다시 작성해 오세요."
초록색 피부에 앙증맞은 아동용 정장을 입고, 코끝에 귀여운 안경을 걸친 꼬마 고블린. 유은하 실장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견뎌내고 당당히 대리 직급을 달아 북부 지사장 대행으로 파견된 '똑똑이'였다.
똑똑이는 은하가 선물해 준 '단축키가 각인된 무소음 키보드'를 두드리며, 벨리알의 부하들이 제출한 조잡한 영지 현황 보고서를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녀석의 등 뒤에는 어느새 은하의 차가운 오피스 카리스마가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이식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들고 서 있던 하급 흡혈귀 서기가 똑똑이의 서늘한 눈빛에 짓눌려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지, 지사장 대행님…… 하지만 지금 성 밖의 사병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합니다! 당장 그들을 제압할 무력이 필요한데, 고작 서류 양식을 따지실 때가……."
"시끄럽습니다."
똑똑이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은하의 목소리 톤을 그대로 흉내 내어 차갑게 대꾸했다.
"유은하 실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가장 하책이자,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초래하는 비효율의 극치라고요. 무질서한 야생 마족들을 통제하는 가장 완벽한 무기는 검과 마법이 아닙니다. 바로 '자본주의의 규칙'과 '따뜻한 복지'지요."
사실 똑똑이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창밖 연병장에서 들려오는 오크들의 거친 고함과 으르렁거림은 무력이 전혀 없는 고블린 대리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똑똑이는 은하가 북부로 출발하기 전 건네주었던 두꺼운 '북부 지사 관리 매뉴얼'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매뉴얼의 첫 페이지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고픈 짐승에게 채찍을 휘두르면 물어뜯기지만,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제육볶음'을 주면 스스로 목줄을 매고 출근 카드를 찍을 것이다.]
"때가 되었군요. 미노타우로스 셰프님, 준비해 주십시오."
똑똑이가 사내 인트라넷 메신저를 통해 신호를 보내자,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거구의 미노타우로스 셰프가 걸어 들어왔다. 머리에는 하얀 요리사 모자를 얹고, 허리에는 거대한 앞치마를 두른 채 한 손에는 사람 몸통만 한 중식도를 든 무시무시한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사의 살기가 아닌, 요리사 특유의 진지한 장인 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음머어어—! 본사에서 지원받은 '야근 식대 청구권' 예산은 넉넉하겠지? 북부 녀석들의 위장을 완전히 박살 내 주겠다!"
셰프가 콧김을 뿜으며 포효했다.
몇 분 뒤, 잿빛 성채 중앙 운동장 한복판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무기를 들고 성을 털려던 마족들의 눈앞에, 수십 개의 거대한 마법 가마솥과 급식 배식대가 일렬로 설치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고일 반장이 이끄는 시설관리팀이 신속하게 테이블을 조립했고, 미노타우로스 셰프는 가마솥 아래에 파이어 임프들을 배치해 강력한 화력을 올렸다.
"저,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마왕성 놈들이 우리를 몰살하려 독약을 끓이는 건가?"
약탈을 모의하던 오크 용병들이 무기를 쥔 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배식대를 에워쌌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미노타우로스 셰프가 거대한 웍을 돌리며 고기와 양념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익—!
지옥의 용암 가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열의 화력이 가마솥을 달구자, 얇게 썬 돼지고기가 매콤달콤한 고추장 양념과 만나 지글지글 익어가는 환상적인 소리가 운동장에 퍼졌다. 이어 신선한 양파와 대파, 그리고 알싸한 마늘이 볶아지며 내뿜는 강력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북부 성채 전체를 뒤덮었다.
그것은 현대 한국의 직장인들이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마다 목숨을 걸고 사수하던 치명적인 냄새, 바로 'K-제육볶음'의 불향이었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하고, 짭조름하면서도 깊은 고기의 감칠맛이 가득한 향기가 공기를 타고 퍼지자, 창을 들고 서 있던 오크들의 코가 동시에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침샘이 폭발한 사병들의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이, 이 냄새는 뭐지? 피비린내와는 차원이 다른, 뇌를 마비시키는 이 달콤하고 매운 향은……!"
"몸 안의 마력이 이 냄새를 따라 요동치고 있어!"
약탈이고 뭐고, 마족들의 이성은 이미 제육볶음의 압도적인 후각 테러 앞에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배식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려던 찰나, 사병들을 이끌던 보수파 오크 간부 하나가 앞장서서 칼을 뽑아 들었다.
"속지 마라, 전사들이여! 우리는 피에 굶주린 북부의 야수들이다! 이런 나약한 빨간 양념 찌꺼기 따위에 현혹되어 무기를 버릴 셈이냐! 전사는 오직 날것의 생고기와 전리품으로 증명하는 법! 저 가마솥을 전부 엎어버려라!"
간부가 소리를 지르며 가마솥을 향해 돌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던 부하 오크들의 눈빛이 흉포하게 변했다. 그 흉포함은 감사단이 아닌,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일생일대의 진미'를 파괴하려는 상관을 향해 있었다.
"대장, 미쳤어?! 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엎겠다고?!"
"우린 1년 동안 썩은 생고기만 씹어 먹었단 말이다! 오늘 저걸 못 먹으면 난 대장 대가리를 씹어 먹을 거야!"
"쳐라! 저 미친놈을 막아라!"
콰당! 팍! 퍽!
"억?! 너희들 왜 나를…… 끄아악!"
생고기를 고집하며 깽판을 치려던 오크 간부는, 제육볶음 냄새에 눈이 뒤집힌 부하 오크들에게 사정없이 쥐어터진 채 운동장 구석으로 처참하게 내던져졌다. 하급 마족들에게 있어 먹을 것을 방해하는 자는 마왕보다 더 사악한 주적일 뿐이었다.
방해 요소를 완벽히 제거한 오크 전사들은 얌전히 식판을 하나씩 들고 배식대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피에 굶주린 북부의 맹수들이, 하얀 요리사 모자를 쓴 미노타우로스 셰프의 주걱 끝만 바라보며 침을 흘리는 기괴하고 유쾌한 풍경이 완성된 것이다.
똑똑이는 단상 위로 올라가 목을 가다듬고 마력 확성기를 켰다.
"북부 영지 근로자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본사 경영기획실의 특별 방침에 따라, 오늘부터 북부 영지는 '경영기획실 북부 지사'로 정식 개편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노예나 착취당하는 사병이 아닙니다. 정당한 근로 계약을 체결하고, 주 52시간 근무와 최저임금을 보장받는 'D등급 정규직 사원'으로 전환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똑똑이가 계약서 뭉치를 들어 올리며 선포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근로 계약서에 서명하시는 모든 분께는, 매일 점심마다 이 최고급 K-제육볶음 급식을 무제한으로 제공하며, 야근 시에는 '야근 식대 청구권'을 발급해 곱빼기 배식을 보장하겠습니다! 또한, 디저트로 본사 특제 황금 비율 'K-믹스커피'를 제공합니다!"
"제육볶음 무제한?!"
"그 노란 봉지 달콤한 이슬(믹스커피)까지 준단 말인가?!"
사병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제육볶음을 한 식판 가득 받아 든 오크 대장이 조심스럽게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매콤한 고추장 양념과 불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쫄깃한 돼지고기의 육즙이 터져 나왔다. 오크 대장의 머리 위에 가상의 홀로그램으로 `[만족도 200%: 극상의 카타르시스]` 버프가 번쩍이며 떠올랐다.
"으오오오오! 이, 이 맛은……! 대지가 춤을 추고 용암이 솟구치는 듯한 맛이다!"
"나도! 나도 줘! 당장 사원증 계약서에 도장 찍을 테니까 제육볶음 더 줘!"
운동장은 순식간에 계약서 서명 열기로 가득 찼다. 마족들은 무기를 팽개치고 똑똑이 대리 앞에 줄을 서서 자발적으로 근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에 굶주린 살기 대신, 월급과 정당한 밥을 보장받은 직장인의 성실하고 따뜻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정각.
북부 지사 대행 똑똑이는 지사장실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성채 입구에 설치된 출근 카드 리더기 앞에, 어제까지만 해도 약탈을 모의하던 험악한 오크 전사들과 뱀파이어들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채 일렬로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슴팍에 'D등급 정규직 사원'이라 적힌 청동 사원증 목걸이를 소중하게 걸고, 아침 8시부터 차례대로 카드를 찍고 있었다.
삑! [출근 완료되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기계음이 울릴 때마다 마족들은 서로 "오늘도 파이팅 합시다 과장님", "오늘 점심 제육볶음 메뉴가 뭔지 아십니까"라며 정겨운 직장인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은하가 도입한 현대식 행정 시스템과 제육볶음 복지가, 마계의 가장 거칠고 난폭한 야수들을 단 하룻밤 만에 '칼출근을 사랑하는 성실한 회사원'들로 완벽하게 순화시켜 버린 것이다.
똑똑이는 소름 돋는 감격 속에서 본사의 유은하 실장에게 보낼 주간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수신: 경영기획실장 유은하
발신: 북부 지사 대행 똑똑이
제목: 북부 지사 설립 및 제육볶음 전파를 통한 인력 순화 완료 보고의 건
본 지사 대행은 유은하 실장님의 지침에 따라, 압류된 벨리알의 비자금(적마정석 금괴) 중 일부를 야근 식대 예산으로 긴급 편성, 단체 급식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현재 북부 마족들의 자발적 정규직 전환율은 100%에 수렴하며, 치안 상태는 완벽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역시 실장님의 행정력은 우주 최강이십니다…….]`
똑똑이가 보고서 전송 버튼을 누르며 가볍게 안경을 치켜올렸다. 은하의 스파르타 교육 덕분에, 고블린 인턴이었던 똑똑이는 이제 제법 깐깐하고 프로페셔널한 지사장 대행의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
북부 영지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마왕성은 완벽한 평화와 사상 최초의 대규모 재정 흑자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은하가 구축해 낸 이 거대한 자본주의적 경제 성공은, 국경 너머 인간계의 탐욕스러운 눈길을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같은 시각, 마왕성 본부의 마법 우편국.
수많은 서신들 사이로, 불타는 붉은색 봉인 마력이 서린 일급 긴급 공문서 한 장이 접수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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