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의 몰락과 영지 압류
북부 영지의 음침한 성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 대신, 기묘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또각, 또각.
단정하게 정돈된 검은색 H라인 스커트 정장 핏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유지한 채, 유은하는 규칙적인 속도로 대리석 복도를 걸었다. 아무리 급박한 추격전이라 해도, 9센티미터 높이의 뾰족한 오피스 구두를 신고 달리는 것은 무릎 관절 건강과 사내 안전보건 규정에 심각한 위배가 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인사팀장 카론이 거구의 검은 갑옷을 덜컹거리며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카론의 안광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서늘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체불 사업주의 야반도주를 목격한 전직 행정관 출신 언데드의 극에 달한 분노였다.
“공작님, 도주는 근로기준법상 퇴직금 및 미지급 임금 채무를 가중시키는 형사 처벌 대상입니다. 지금이라도 멈추고 구조조정 합의서에 서명하십시오!”
은하가 마력 확성기를 대고 차분하게 경고했지만, 저 멀리 복도 끝 집무실 문을 향해 달리는 벨리알 공작의 귀에는 그저 저승사자의 방울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시끄럽다, 이 간악한 인간 계집아! 내 사병들을 선동해 파업을 일으키고 내 영지 계좌를 동결해? 마왕성 본부의 비서 따위가 감히 나를 가두려 들다니!”
자산 압류 조치로 인해 마력이 50%나 급감한 벨리알 공작은 기름진 얼굴을 식은땀으로 적신 채, 화려한 담비 가죽 망토를 휘날리며 집무실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쾅!
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히고 내부에서 굳건한 빗장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하와 카론이 집무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틈 사이로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장님, 안쪽에서 차원 이동 포털이 기동하고 있습니다. 벨리알이 영지의 핵심 자산과 비밀 장부를 챙겨 상업 중립 도시로 도주하려는 모양입니다.”
카론이 문에 손을 대며 낮게 읊조렸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마왕성의 상급 간부조차 당황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은하는 침착하게 자신의 은테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지독한 야근 끝에 찾아오는 특유의 해탈함과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야반도주용 포털이라니, 참 클래식한 먹튀 수법이네요. 하지만 공작님, 현대식 전산망의 무서움을 너무 과소평가하셨습니다.”
은하는 꺼져 있던 마법 행정 태블릿을 켜려다 배터리가 0%임을 확인하고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이내 허공을 향해 조용히 명령했다.
“제레드 교수님, 원격 차단 프로토콜 가동해 주세요. 북부 지사 전산망 원격 제어 들어갑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사내 인트라넷 망의 마력 주파수를 타고 마왕성 본부의 기술고문 제레드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같은 시각, 집무실 안쪽에서 벨리알 공작은 벽면의 붉은 태피스트리를 거칠게 찢어발겼다. 그 뒤에 숨겨져 있던 고대 룬 문자가 새겨진 비밀 차원 이동 포털이 보라색 빛을 뿜으며 서서히 회전하고 있었다.
“하하하! 멍청한 년! 이 포털만 타고 중립 도시로 넘어가면 내 비자금으로 얼마든지 군대를 다시 모을 수 있다! 마왕 발락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벨리알이 품속에서 비밀 장부와 보석 상자를 움켜쥔 채 포털 중앙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자신의 남은 마력을 포털의 핵심 마법진에 주입했다.
위이이이잉—!
포털이 요란한 회전음을 내며 활성화되려는 찰나, 갑자기 회전음이 뚝 끊기며 기괴한 에러 소리가 집무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삐빅! [System Error: 마력 공급 제한 안내]
포털의 보라색 빛이 순식간에 꺼지더니, 벨리알의 눈앞에 푸른색 디지털 홀로그램 경고창이 떠올랐다.
`[알림: 본 차원 이동 포털의 마력 공급은 마왕성 경영기획실의 원격 제어로 인해 강제 차단되었습니다. 사유: 북부 영지의 환경 오염 벌금 50만 마정석 체납 및 세무 감사 방해 행위에 따른 긴급 압류 집행. 문의: 경영기획실 기술고문 제레드 부사장]`
“이, 이게 무슨……?! 이 푸른 글 상자는 대체 뭐란 말이냐! 제레드?! 그 늙은 마법사 놈이 감히 내 고대 포털을 해킹했단 말이냐!”
벨리알이 미친 듯이 포털 마법진을 발로 찼지만, 제레드가 밤새워 구축한 사내 인트라넷망과 원격 서버 제어 기술은 고대의 무질서한 마법진보다 훨씬 정교하고 강력했다. 전력 공급이 완전히 차단된 서버처럼, 포털은 단 한 줌의 마력도 뿜어내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버렸다.
“문 열어라, 체불 사업주 벨리알!”
쿠우웅!
더 이상 참지 못한 카론이 거대한 마법 삼단봉을 쥐고 집무실 문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문 표면에 걸려 있던 벨리알의 혈통 방어 결계가 번쩍였지만, 이미 자산 압류로 마력이 반토막 난 공작의 결계는 카론의 무자비한 물리적 타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쾅! 바스락!
두꺼운 참나무 문이 단 두 방 만에 산산조각이 나며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먼지 장막을 뚫고 카론이 저승사자 같은 살기를 뿜으며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크으윽! 오지 마라! 내게 다가오면 이 장부를 전부 불태워버리겠다!”
벼랑 끝에 몰린 벨리알 공작이 자신의 명검 ‘크림슨 팽’을 뽑아 들었다. 비록 마력이 반토막 나 검신이 잿빛으로 흐려져 있었지만, 상급 마족으로서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감사관에 대한 물리적 저항 및 무기 무단 사용은 사내 안전보건 규정 제12조 위반입니다.”
카론은 냉정하게 삼단봉을 고쳐 쥐었다.
쉬이익!
벨리알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으나, 언데드 최강의 데스나이트 로드인 카론의 눈에는 느려 터진 몸부림에 불과했다. 카론은 가볍게 상체를 비틀어 검날을 피하더니, 삼단봉을 아래에서 위로 번쩍 치켜올렸다.
타아앙!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벨리알의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명검 크림슨 팽이 허공으로 날아가 대리석 바닥에 거칠게 뒹굴었다.
“아아악! 내 손! 내 손목이!”
“즉각 격리 조치합니다.”
카론은 주저 없이 벨리알의 목덜미를 낚아채 바닥에 사정없이 메쳐버렸다. 거구의 데스나이트가 공작의 등 뒤를 무릎으로 찍어 누르자, 벨리알은 단 한 줌의 마력도 쓰지 못한 채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울부짖었다.
“이, 이 비열한 반역자 놈들! 마왕 발락이 내 사병들을 두려워해 나를 건드리지 못했거늘, 고작 인간 계집 비서 년의 농간에 놀아나다니!”
“반역이 아니라 정당한 세무 감사 조치와 자산 압류 집행입니다, 공작님.”
은하가 단정한 걸음걸이로 박살 난 문턱을 넘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가죽 서류 가방에서 빳빳한 기안서 뭉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콧등 위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공작님께서 횡령하신 사병들의 방한비와 누락된 광산 세금의 총액은 이미 전산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공작님이 숨겨두신 비밀 비자금 금고의 실재고 조사와 영지 몰수 절차뿐입니다.”
“흥! 장부는 이미 다 불태웠다! 내 비밀 금고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여는지 너희 같은 애송이들은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벨리알이 바닥에 짓눌린 채 이빨을 갈며 비웃었다.
은하는 그 비웃음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악덕 사장 놈들은 하나같이 비밀 금고 위치 숨기면 살 줄 알더군. 우리 최사장도 국세청 감사 나왔을 때 사장실 불상 밑에 금괴 숨겨놓고 모른 척하더니.’
은하는 집무실 우측 벽면에 걸려 있는 거대한 벨리알 2세의 초상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초상화의 하단 모서리를 툭툭 쳤다.
“……어?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벨리알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은하는 마왕성 지하 창고를 정리할 때 만났던 ‘전대 마왕의 사념 유령’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 유령은 은하가 건넨 따뜻한 차 한 잔에 감격해 북부 영주들의 온갖 해괴한 비밀들을 털어놓았었다.
‘벨리알 그 탐욕스러운 흡혈귀 자식은 자기 두 번째 부인 초상화 뒤에 비밀 금고를 숨겨놓았지. 바닥의 세 번째 나무판자를 누르면 금고 열쇠구멍이 나올 걸세. 비밀번호는 자기 생일도 아니고, 자기가 처음으로 탈세에 성공했던 연도라네. 아주 영악한 놈이지.’
은하는 초상화를 옆으로 밀어내고, 바닥의 세 번째 대리석 판자를 발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철컥.
벽면의 비밀 석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거대한 철제 금고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고의 중앙에는 복잡한 룬 문자로 잠긴 마법 다중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은하는 마법 행정 태블릿 대신, 가방에서 제레드가 연성해 준 수동 연산 마법 주판을 꺼냈다. 그리고 전대 마왕의 사념이 알려준 벨리알의 최초 탈세 연도와 횡령 장부의 오차 수치를 기반으로 암호를 역산하기 시작했다.
타닥, 탁.
주판알이 튕기는 경쾌한 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은하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색 마력 수치들이 자물쇠의 룬 문자와 하나씩 동기화되었다.
철컥! 철커덕!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외부인에게 열린 적 없던 벨리알 공작의 비밀 금고 자물쇠가, 은하의 정교한 회계 연산력 앞에 허무하게 풀려나갔다. 이윽고 육중한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아!”
뒤늦게 집무실로 들어온 재무부장 릴리스가 금고 내부를 들여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신음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금고 내부에는 마왕성 중앙 은행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급 ‘적마정석 금괴’ 수천 개가 정연하게 쌓여 황홀한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가공되지 않은 순수 마정석 원석들과 온갖 희귀한 보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벨리알이 북부 영지민들과 사병들의 고혈을 짜내어 모은, 그야말로 영지 수십 년 치 예산에 달하는 막대한 비자금 자원이었다.
“실장님! 이, 이건 대박이에요! 적마정석 금괴만 해도 최소 800만 마정석 가치입니다! 누락된 세수를 전부 충당하고도 남을 엄청난 액수예요!”
릴리스가 마법 주판을 두드리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녀의 붉은 안경 너머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하지만 은하의 시선은 금괴 더미가 아닌, 금고 가장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작은 황금 상자로 향했다. 은하는 상자를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그것은 순백의 양피지에 붉은색 성스러운 마력으로 서명된 조약서였다. 조약서의 하단에는 인간계 교황청 재정 담당 추기경, ‘우르바누스’의 공식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은하의 은테 안경 너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교황청 우르바누스 추기경의 친필 서명이 담긴 비밀 채권 거래 조약서…… 벨리알 이 자식이 마왕성 몰래 인간계 교황청과 밀수를 하며 비자금을 세탁하고 있었군.’
이것은 단순한 탈세 증거가 아니었다. 훗날 인간계 교황청이 마왕성을 침공해 올 때, 그들의 부패한 재정 상태를 폭로하고 적대적 M&A를 감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법적 명분이자 무형 자산이었다. 은하는 조약서를 소중하게 가죽 가방 깊숙한 곳에 챙겨 넣었다.
“훌륭한 스모킹 건이네요. 다음 분기 기획서의 핵심 카드로 쓰겠습니다.”
은하는 벨리알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둔 `[북부 영지 강제 압류 및 마왕성 직할령 편입 결재 문서]`를 펼쳤다.
그리고 품속에서 최고급 ‘만년필 형태의 마력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안 돼! 내 영지다! 내 자산이란 말이다! 마왕성 본부의 비서 따위가 감히 내 영토를 빼앗을 권리는 없다!”
바닥에 엎드린 벨리알이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지만, 은하의 손끝은 단호했다.
사각, 사각.
만년필 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 잉크가 양피지 위에 은하의 정갈한 서명을 새겨나갔다.
`경영기획실장 유은하.`
서명이 완성되는 순간, 만년필 형태의 마력 만년필에 깃든 강력한 인과율 계약 마법이 작동했다. 황금빛 마력 사슬이 기안서에서 뿜어져 나와 벨리알 공작의 온몸을 휘감더니, 이내 북부 영지 전체의 대지와 하늘로 뻗어나갔다.
우우우웅—!
성 전체가 가볍게 진동하며, 북부 영지의 소유권이 벨리알 공작 가문에서 마왕성 경영기획실 직할령으로 완전히 이전되었음을 알리는 인과율의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수백 년간 북부를 지배해 온 탐욕스러운 뱀파이어 영주의 시대가, 고작 인간 비서의 만년필 서명 한 방에 종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북부 영지 압류 및 직할령 편입 절차 완료되었습니다.”
은하는 만년필 캡을 씌우며 차분하게 선포했다.
그와 동시에, 릴리스가 들고 있던 마법 주판과 본부 ERP 시스템의 홀로그램 장부가 미친 듯이 깜빡이며 실시간 수치를 재계산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마왕성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만성 적자를 경고하던 장부의 수치들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사상 최초로 붉은색 마이너스 표시가 사라지며 아름답고 푸른빛의 플러스 수치로 전환되었다.
[최종 정산 결과: 마왕성 1분기 재정 흑자 전환 성공]
“실장님…… 흑자예요! 우리가 해냈어요! 사상 최초로 마왕성이 적자에서 벗어났습니다!”
릴리스가 주판을 껴안고 방방 뛰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카론 역시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은하에게 경의를 표했다.
“축하드립니다, 실장님. 법과 절차의 힘이 이 야만의 영지를 완벽하게 정화했습니다.”
은하는 가볍게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창밖으로 보이는 북부 영지의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1단계의 가장 큰 난관을 극복하고 마왕성의 완벽한 행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극히 팍팍한 K-직장인의 그것이었다.
“흑자 전환은 좋은데…… 이제 이 낙후된 북부 영지의 민생 재건과 도로 정비 기획서를 밤새 써야겠군요. 릴리스 부장님, 오늘 밤도 야근입니다.”
“……네? 실장님, 저 방금 울었는데요?”
“일이 끝난 건 아니니까요. 자, 본사로 복귀해서 마왕님께 결재 올릴 준비 합시다.”
은하는 단정한 오피스 정장 옷깃을 털어내며, 흑자 달성의 기쁨조차 야근 예고로 승화시키는 지독한 행정가로서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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