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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 차단과 냉동창고 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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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 00분.


벨리알 성의 지하 3층 임시 감사실은 더 이상 아늑한 모바일 오피스가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거친 돌벽 표면 위로 하얀 성에가 서서히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바닥에서부터 칼바람 같은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따, 따, 따, 따, 딱! 딱! 딱! 딱!”


감사실 한구석에서 기괴하고 요란한 타악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리치 세무사였다. 평소 죽어서도 장부를 놓지 않던 지독한 워커홀릭 엘더 리치였건만,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한기 앞에서는 불사의 마력도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턱뼈가 모스 부호를 치듯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실, 실장님…… 제, 제 경추 3번과 4번이…… 급격한 온도 저하로 인해……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손가락 뼈마디가 얼어붙어…… 주판알이…… 안 튕겨집니다……”


“조용히 하시고 핫팩 대용으로 파이어 임프나 안고 계세요. 그리고 리치 씨, 아까 입력하던 엑셀 시트 저장(Ctrl+S)은 누르셨습니까?”


유은하 실장은 얼어붙어 가는 손가락으로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건조하게 물었다. 지독한 한기 때문에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영하 30도의 냉기보다 더 서늘했다.


“그, 그건 당연히…… 저, 저장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만약 저장 안 하셨으면 추위로 죽기 전에 제 손에 영혼이 먼저 파쇄되셨을 겁니다.”


은하는 차가운 한숨을 내쉬며 마법 행정 태블릿을 응시했다. 화면 모퉁이에 표시된 실내 온도는 이미 영하 28도를 가리키며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벨리알 공작. 뇌물과 미인계가 통하지 않자 이판사판으로 감사단의 숨통을 끊으려 보일러 배관을 잠가버린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감사실의 두꺼운 철문은 이미 외부에서 강철 자물쇠와 이중 봉인 마법으로 굳게 걸어 잠긴 상태였다.


쿠우웅! 쿠웅!


거구의 데스나이트 카론 인사팀장이 거대한 삼단봉을 쥔 채 철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러나 문 표면에 새겨진 보라색 고대 마법 진이 번쩍이며 카론의 타격을 흡수해 사방으로 흩뿌릴 뿐이었다.


“부당한 물리적 감금이다!”


카론이 안광을 퍼렇게 빛내며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감금 및 노동 강요죄, 그리고 산업안전보건법 제51조 위반이다! 사업주는 근로자에게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대피시켜야 하거늘, 도리어 보일러를 차단해 동사를 유도하다니! 벨리알 공작, 이 자를 당장 인사 징계 위원회에 회부해 파면시켜야 한다!”


“카론 부장님, 진정하세요. 저 문에 걸린 건 북부 영지의 고대 혈통 봉인 마법입니다. 물리적인 충격은 전부 마력으로 흡수해서 결계를 강화하는 구조예요. 때릴수록 문만 더 단단해집니다.”


옆에서 서큐버스 wings를 온몸에 칭칭 감은 채 덜덜 떨고 있던 릴리스 재무부장이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말렸다.


“으으…… 추워 죽겠네. 실장님, 벨리알 이 미친 흡혈귀 늙은이가 완전히 미쳤나 봐요. 세무 감사를 막겠다고 마왕성 공식 감사단을 동사시키려 들다니…… 이거 완전히 반역이잖아요!”


“반역이 아니라 전형적인 ‘악덕 기업주의 감사 방해 공작’이죠. 전 회사 최사장도 세무조사 나오니까 경리과 직원들 창고에 가두고 장부 불태우려 했었습니다. 수법이 아주 클래식해서 하품이 나오네요.”


은하는 해탈한 표정으로 태블릿의 통신 메신저를 켰다. 다행히 마왕성 기술고문 제레드가 구축해 둔 사내 인트라넷망은 북부 영지의 마력 교란 속에서도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은하는 제레드에게 비밀 메시지를 두드렸다.


[유은하 실장: 제레드 교수님. 벨리알 성의 지하 보일러 제어 장치 원격 해킹 가능합니까? 감사실 보일러가 차단되었습니다. 추워 죽겠습니다.]


단 3초 만에 제레드의 답장이 날아왔다.


[CTO 제레드: 뭐라고?! 감히 내 시스템을 차단해?! 지금 북부 지부 전산망을 통해 원격 제어 코드를 해킹 중이네! 하지만 벨리알 성의 메인 보일러가 ‘지옥 불 가마터’의 고열 연성소와 연동되어 있어, 외부 방화벽이 아주 견고하네! 해킹 완료까지 최소 3시간은 벌어야 하네! 버틸 수 있겠는가?]


3시간.


실내 온도가 하강하는 속도로 보아, 30분 뒤면 리치 세무사는 마력이 방전되어 영혼 불꽃이 꺼질 것이고, 릴리스와 자신은 저체온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질 터였다.


“3시간이라니, 그전에 저희는 냉동 삼겹살이 될 거예요!”


릴리스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실제로 감사실 바닥에는 얼음 결정이 솟아오르며 발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실장님, 어쩌죠? 제 삼단봉으로 결계를 과부하시켜 깨부수는 데도 최소 1시간은 걸립니다. 그동안 실장님의 체온이 버티지 못합니다.”


카론이 은하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의 차가운 갑옷으로 바람을 막으려 애썼다.


절체절명의 위기. 영하 30도의 한기가 은하의 얇은 블라우스 자락을 파고들어 피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이성이 흐려지려던 그 순간.


K-직장인으로서 평생을 야근과 스트레스로 다져온 독기가 은하의 머릿속에서 번쩍 불꽃을 일으켰다.


‘내가 마계까지 납치당해 와서…… 이 춥고 곰팡이 핀 지하 구석탱이에서…… 결산 보고서 결재도 못 올리고 죽을 것 같아?’


은하의 눈동자가 차가운 은빛으로 번뜩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태블릿 화면의 아웃룩(Outlook) 캘린더 앱을 가동했다.


“업무 시간 외 무단 침입 및 비인가 위험 환경 유입 차단.”


은하가 태블릿 화면을 광속으로 터치하며 일정을 등록하기 시작했다.


[등록 일정: 오후 11시 00분 ~ 오전 06시 00분]

[일정명: 경영기획실 북부 감사단 야근 안전 특별 일정]

[장소: 북부 영지 성 지하 3층 임시 감사실]

[참석자: 유은하, 카론, 릴리스, 리치 세무사]


“아웃룩 스케줄 잠금(Schedule Lock), 가동합니다.”


은하가 태블릿 화면 중앙의 ‘일정 등록 승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감사실 내부의 공기가 웅장하게 진동했다.


스으으으응—!


은하의 몸 주변에서 반투명한 푸른색 격자 장막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거대한 황금빛 시계 바늘들이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나 회전하기 시작했다. 로마 숫자 I부터 XII까지 새겨진 거대한 시계 문자판이 감사실 반경 5미터를 완벽하게 감싸 안았다.


그것은 은하의 아웃룩 일정표에 등록된 ‘공식 업무 시간 및 공간’을 절대적인 안전 구역으로 고정하는 인과율 방어 결계였다.


쐐애애액! 쾅!


문틈과 벽면의 균열을 통해 들이닥치던 영하 30도의 살인적인 한기 폭풍이 황금빛 시계 결계막에 닿는 순간, 거대한 에러 메시지가 공중에 붉은 글씨로 떠올랐다.


`[오류(ERROR): 예약되지 않은 일정 및 비인가 환경 유해 물질의 강제 유입 시도입니다.]`

`[알림: 해당 행위는 아웃룩 스케줄(Schedule Lock) 규정에 의해 진입이 원천 차단됩니다. (NOT RESERVED)]`


퍼어어엉!


휘몰아치던 얼음 폭풍이 결계막에 부딪쳐 튕겨 나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외부의 한기가 결계 안쪽으로 단 1밀리미터도 침투하지 못하고 물리적으로 강제 차단된 것이다.


“……어?”


귀를 찢는 턱뼈 소리를 내던 리치 세무사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뼛속을 얼려버릴 듯 몰아치던 냉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결계 내부의 온도가 쾌적한 섭씨 22도로 고정되어 있었다.


“실, 실장님…… 이게 도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한기가…… 한기가 결계에 닿자마자 예약 오류라며 소멸하고 있습니다!”


릴리스가 감격에 겨워 은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마법이 아니라 행정 시스템의 힘입니다.”


은하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가볍게 코방귀를 꼈다.


“아웃룩 일정표에 등록되지 않은 불청객이나 환경 변화는 기획실 내부에서 ‘존재하지 않는 스케줄 에러’로 처리됩니다. 벨리알이 보일러를 잠가서 보낸 한기 역시, 제 캘린더에 사전 등록되지 않은 ‘비인가 유입’이므로 결계가 강제로 거부하는 거죠.”


“파앗! 파아앗!”


그때, 탕비실 구석에서 추위에 떨며 오븐 장갑을 낀 채 웅크리고 있던 조그만 정령 ‘파이어 임프’가 신이 나서 튀어나왔다. 결계 내부가 따뜻해지자 녀석의 머리 위 불꽃이 다시 활기차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파이어 임프는 즉시 탕비실 온수 파이프에 매달려 미세한 화염 마력으로 온수를 끓여내기 시작했다. 뽀글뽀글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따뜻한 물이 배출되었다.


은하는 종이컵을 꺼내 노란색 K-믹스커피 봉지를 뜯어 넣었다. 뜨거운 물이 부어지고, 티스푼으로 열 번 고속 회전시키자, 탕비실 특유의 달콤하고 고소한 믹스커피 향이 황금빛 결계 내부를 가득 채웠다.


“자, 다들 커피 한 잔씩 하시고 장부 검토 계속하죠. 리치 씨, 뼈마디 녹으셨으면 아까 하던 북부 광산 매출 대조표 14페이지부터 다시 불러오세요.”


“예, 예! 실장님!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리치 세무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주판을 다시 튕기기 시작했다. 카론 부장 역시 삼단봉을 내려놓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은하가 건넨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


한편, 굳게 잠긴 감사실 철문 밖.


벨리알 공작의 명령을 받고 감사단이 얼어 죽기만을 기다리던 흡혈귀 사병들과 관리인 엘릭은 초조하게 회랑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봐, 벌써 배관을 잠근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안 들리지?”


“지하 3층 보일러를 차단했으니 지금쯤 영하 30도는 됐을 텐데…… 아무리 데스나이트나 리치라 해도 마력이 방전되어 얼어붙었을 시간입니다.”


엘릭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철문의 작은 마법 감시 구멍에 눈을 가져다댔다. 얼어붙은 시체들과 절망에 빠진 비서의 모습을 기대하며 구멍 안을 들여다본 엘릭의 눈동자가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감실 안쪽은 영하 30도의 한파는커녕, 은은한 황금빛 장막 속에서 온화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무서운 인간 비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하얀 종이컵에 담긴 정체불명의 갈색 음료를 후후 불며 여유롭게 마시고 있었고, 서큐버스 재무부장은 네일아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엘더 리치 세무사는 주판을 광속으로 두드리며 “매출 누락 오차 발견!”을 외치고 있었다.


“미, 미친……! 저 인간들은 왜 안 얼어 죽는 거야?! 저 방만 왜 봄날인 건데?!”


엘릭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사병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은하의 마법 행정 태블릿 화면에 띠링 하는 경고음과 함께 제레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CTO 제레드: 실장님! 해킹 성공했네! 벨리알 성의 보일러 시스템 제어권을 완전히 탈취했네! 뿐만 아니라, 보일러와 연동된 ‘지옥 불 가마터’의 불법 마력 배출 경로와 환경 오염 수치 데이터까지 덤으로 확보했네! 이 데이터를 보면 아주 기절할 걸세!]


태블릿 화면에 붉은색 마력 배출 통계 그래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은하는 따뜻한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안경알 너머로 번뜩이는 차가운 눈빛을 빛냈다.


“배터리가 15% 남았지만 충분하네요. 감히 야근 중인 기획실의 온도를 내려?”


은하는 마우스 패드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벨리알 공작. 아주 뼈째로 탈탈 털어주마.”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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