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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장의 양피지 장부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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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50분. 출근 시간 정확히 10분 전이었다.


지하 냉동창고에서 아늑한 현대식 모바일 오피스로 완벽하게 리모델링된 북부 영지 임시 감사실 안에는 구수한 황금빛 향기가 가득 퍼져 있었다. 파이어 임프가 정확히 섭씨 85도로 끓여낸 온수에 노란색 믹스커피 봉지 세 개를 탈탈 털어 넣고 고속으로 교반한, 유은하 실장 특제 ‘황금 비율 믹스커피’의 향이었다.


은하는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따뜻하고 달콤한 카페인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어제 켄타우로스 드라이버의 난폭 운전으로 지쳐 있던 뇌세포들이 마침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역시 출근 전에는 이 당 충전이 필수지.”


“실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책상 옆에서 먼지떨이를 들고 대기하던 인턴 비서 똑똑이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앙증맞은 아동용 정장을 차려입은 이 꼬마 고블린은 어제 은하가 발동한 ‘근로기준법 결계’와 리모델링 마법의 위력에 완전히 매료되어, 이제는 은하의 그림자만 봐도 결재판을 대령할 기세였다.


“벨리알 공작의 부하들이 밤새 창 밖에서 감시하던데, 우리 숙소가 이렇게 따뜻해진 걸 보고 다들 턱이 빠지더군요. 역시 실장님의 행정력은 마왕 폐하의 종말 화염보다 위대합니다!”


“칭찬은 고맙지만 똑똑이 대리, 아직 안심하긴 일러요. 오늘은 출장 둘째 날이자 본격적인 장부 실사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벨리알 공작이 순순히 장부를 내줄 리가 없으니까요.”


은하의 예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쿵! 쿵! 쿵!


임시 감사실의 튼튼한 참나무 문이 거칠게 울렸다. 어제 은하의 감봉 협박에 굴복해 온수와 담요를 대령했던 영지 관리인 엘릭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문을 열었다. 그의 뒤편으로 복도 가득 들이치는 매캐한 먼지 냄새에 릴리스 재무팀장과 리치 세무사가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유, 유은하 실장님! 공작 전하께서 감사단을 위해 지난 500년간 북부 영지에서 기록된 모든 세무 장부를 대령하셨습니다!”


엘릭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비열한 승리감과 조소(嘲笑)가 서려 있었다.


은하가 믹스커피 종이컵을 내려놓고 복도로 한 걸음 나서자,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감사실 앞 널찍한 성 복도에 거대한 목조 마차 열 대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마차들 위에는 수백 년간 먼지가 쌓여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가죽 끈으로 묶인 양피지 두루마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양이 어찌나 방대한지, 복도의 천장 높이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똑똑이가 비명을 지르며 양피지 먼지 더미에 코를 박고 재채기를 연신 해댔다. 에취! 에취!


엘릭의 뒤에서 화려한 실크 로브를 입은 벨리알 공작의 수석 마법 서기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먼지 쌓인 양피지 더미를 가리키며 비아냥거렸다.


“북부 영지의 세무 장부 총 100만 장입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마왕성의 감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바라시어, 단 한 장의 영수증도 누락하지 않고 모두 대령하라 하셨습니다. 수작업으로 기록된 정통 양피지 장부들이지요. 자, 중앙의 천재 행정관들께서 오늘 안으로 이 장부들을 다 검토해 보시지요. 아, 물론 마왕성에서 쓰신다는 그 해괴한 ‘마법 판형 기기’나 전산망은 이 구식 양피지들과 호환되지 않을 테니, 오직 눈과 손으로만 검토하셔야 할 겁니다. 크하하하!”


마법 서기들이 일제히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은 벨리알 공작이 준비한 고도의 ‘정보 과부하 공격’이었다. 수백 년간 정리되지 않은 무질서한 종이 쓰레기 더미를 들이밀어 감사단의 눈을 멀게 하고 시간을 끌려는 얄팍한 수작. 현대 오피스 용어로 치면 일종의 ‘행정적 디도스(DDoS) 공격’이었다.


“실장님,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릴리스가 마법 주판을 튕겨보려 했으나, 100만 장이라는 무지막지한 물량 앞에서는 주판알을 튕길 엄두조차 나지 않는지 손을 벌덜 떨었다.


“인간의 눈으로 이 먼지 구덩이 양피지를 한 장씩 읽다간 감사 기간인 일주일이 아니라 일 년이 걸려도 다 못 읽습니다! 벨리알 공작 놈이 대놓고 깽판을 치는군요!”


리치 세무사 역시 구식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뼈 손가락을 탁탁 부딪쳤다.


“크흐흐, 장부의 양이 너무 많아 마력 흐름조차 왜곡되어 있군요. 장부의 숫자를 검증하려 해도 수작업으로는 오차율이 90%를 넘을 것입니다.”


마법 서기들은 감사단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인간 계집 실장과 언데드 나부랭이들이 결국 이 쓰레기 더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마왕성으로 도망치거나, 대충 감사를 끝내고 서명할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유은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블루라이트 차단 은테 안경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귀엽네.’


은하는 속으로 코방귀를 꼈다. 전 회사에서 지독한 꼰대 김부장이 주말 출근을 시키기 위해 “유 비서, 여기 지난 10년 치 종이 영수증 박스 50개 정리해 놔”라며 던지던 수작에 비하면, 이 100만 장의 양피지는 애교 수준이었다. 현대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다져진 K-직장인의 독기와 깡다구는 마계의 얄팍한 꼼수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엘릭 씨, 그리고 서기 여러분.”


은하의 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혹시 디도스(DDoS) 공격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정보의 양으로 시스템의 처리 용량을 초과시켜 마비시키려는 얄팍한 수작 말입니다. 현대 기업 기획실에서는 이런 무식한 정보 공격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는 도구가 있습니다.”


“뭐, 뭐라고? 이 계집이 허세를 부리는구나!”


서기들이 씩씩대자, 은하는 품속에서 ‘마법 행정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리치 세무사님, 준비되셨습니까?”


“크흐흐,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실장님. 이 해골의 썩지 않는 뇌와 주판이 불타오를 시간 조율이군요!”


“좋습니다. 전산 입력 프로토콜을 가동합니다.”


은하가 마법 태블릿의 중앙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그 순간, 은하의 안경 렌즈 너머로 푸른색 디지털 마력이 번뜩였다.


“엑셀 스프레드시트 마법 (Ctrl+F / Ctrl+V), 광역 스캔 모드 가동!”


웅—!


은하의 주변 공간이 왜곡되며, 눈부신 푸른색 격자무늬 홀로그램 장막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감사실 복도 전체가 거대한 가상의 엑셀 시트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푸른색 마력 그리드 선들이 촘촘하게 가로세로로 교차했다.


“스캔 범위를 마차 10대의 모든 양피지로 지정합니다. 데이터 추출 시작!”


은하가 공중에 대고 양손가락을 광속으로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탁! 타타탁! 마계의 인과율을 비트는 현대식 키보드 타건음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마차 위에 쌓여 있던 100만 장의 양피지 두루마리에서 미세한 푸른색 빛 입자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피지에 수작업으로 적혀 있던 잉크 글자들이 마법적으로 복사되어, 공중에 떠 있는 푸른색 엑셀 격자창 속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입고일], [자산 분류], [단가], [수량], [지출처].


무질서하게 얽혀 있던 고대의 기록들이 은하가 설정한 5대 계정 과목으로 실시간 자동 분류되며, 엑셀 셀(Cell) 하나하나에 빛의 속도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이, 이 무슨 해괴한 주술이냐! 장부의 글자들이 날아가고 있다!”


서기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자랑하던 500년의 수작업 역사 장부가 단 몇 초 만에 ‘디지털 데이터’로 규격화되어 은하의 태블릿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방해해라! 장부 교란 마법을 가동해라!”


수석 서기가 소리치자, 벨리알의 마법 서기들이 일제히 손을 뻗어 양피지 더미를 향해 검은색 교란 마법 파동을 쏘아 보냈다. 장부 속의 숫자들을 강제로 비틀고 오류를 일으켜 엑셀 연산을 마비시키려는 수작이었다.


태블릿 화면에 빨간색 에러 메시지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ERROR: #VALUE! - 데이터 왜곡 감지]


“실장님! 적들이 데이터 변조 마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릴리스가 경고하자, 은하는 코방귀를 뀌며 손가락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필터링 매크로 가동. Ctrl+F로 변조된 마력 패턴을 검색하고, Ctrl+H로 정상 수치로 일괄 치환(Replace)합니다. 얄팍한 흑마법 따위는 엑셀의 데이터 정화 프로토콜을 이길 수 없습니다.”


타타타탁! 탁!


은하가 공중의 가상 엔터키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 순간, 서기들이 쏘아 보낸 검은색 교란 마력이 푸른색 엑셀 결계막에 부딪쳐 찌릿하는 불꽃을 으깨며 소멸했다. 동시에 에러 메시지가 사라지고, 정제된 깨끗한 수치들이 폭포수처럼 엑셀 시트를 채워 나갔다.


“크흐흐! 제 차례로군요!”


리치 세무사가 해골 손가락을 튕기며 주판을 광속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불사조 같은 영혼 불꽃이 타오르며, 은하가 정렬해 주는 데이터를 복식부기 원칙에 따라 자산과 부채, 자본 계정으로 정밀 검증했다.


“실장님! 벨리알 영지의 공식 보고 장부와 실제 마정석 생산량 데이터 사이에 미세한 불일치가 포착되었습니다! 자산 항목에서 거대한 자금 누수가 감지됩니다!”


“좋습니다. 복식부기 크로스 체크(Double-Entry Cross Check) 기술 가동!”


은하가 태블릿 화면을 쓸어 넘기자, 안경 렌즈 너머로 벨리알 영지의 10년 치 자금 흐름도가 붉은색 선으로 실시간 연결되어 시각화되었다. 단식부기로 교묘하게 감추어 두었던 수입과 지출의 구멍들이, 복식부기의 대차대조표 앞에서는 뼈대만 남은 채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탁! 탁!


은하가 마지막 단축키를 누르자, 복도에 가득 차 있던 푸른색 격자 결계가 스르륵 걷히며 은하의 태블릿 화면에 최종 정산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단 반나절 만이었다. 100만 장의 양피지 쓰레기 더미가 단 한 권의 깔끔한 ‘디지털 세무 감사 보고서’로 압축된 것이다. 은하는 태블릿과 무선 연동된 마법 인쇄기를 가동해, 정산 결과를 백색의 ‘A4 복사 용지’에 깔끔하게 인쇄해 냈다.


파스스스.


데이터를 모두 빼앗긴 마차 위의 양피지 두루마리들은 오랜 세월의 먼지와 함께 힘없이 바스러지며 회색 재로 변해 복도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 이럴 수가…… 500년의 장부가 단 반나절 만에……”


수석 서기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의 재를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자신들이 평생을 바쳐 기록하고 수호해 온 정보의 장벽이, 은하의 엑셀 단축키 몇 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은하는 인쇄된 A4 용지 보고서를 들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자, 벨리알 공작의 서기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벨리알 영지가 숨겨놓은 아주 재미있는 ‘이중 장부’의 실체를 완벽하게 확보했습니다.”


은하가 보고서의 특정 페이지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쳤다.


그곳에는 릴리스가 사전에 확보했던 ‘교황청 성기사단 정기 송금 내역’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자금 흐름이 붉은색 수치로 굵게 표시되어 있었다.


“북부 영지의 핵심 자원인 ‘북부 마정석 광산’의 매출액 중 무려 75%가 장부에서 완전히 누락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그 누락된 자금의 최종 종착지는…… 놀랍게도 인간계 교황청의 비밀 계좌였습니다.”


은하의 안경 렌즈 너머로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벨리알 공작님, 겉으로는 마왕성 최고의 충신인 척하시더니, 뒤로는 인간들과 밀수를 하며 거대한 비자금을 세탁하고 계셨네요.”


은하의 태블릿 화면에 북부 영지의 ‘비밀 마정석 광산 매출 누락 75%’ 경고등이 빨갛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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