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영지 출장길, 숨 막히는 환대
덜커덩, 덜커덩.
마왕성 수석 비서이자 경영기획실장인 유은하는 관자놀이를 지긋이 내리눌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이 지독한 멀미의 원인은 명확했다. 마차의 고삐를 쥔 켄타우로스 드라이버가 ‘속도감에 목숨을 건 프로 정신’을 너무 과하게 발휘한 탓이었다.
“실장님, 페이스가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믹스커피라도 한 잔 타 드릴까요?”
맞은편에 앉은 서큐버스 재무팀장 릴리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 역시 밤샘 야근으로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벨리알 공작의 비밀 비자금을 털어먹을 생각에 눈동자만큼은 사냥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줄여달라고 전해 주세요. 마차 안에서 엑셀 시트를 보다가 토할 뻔한 건 제 커리어상 처음이군요.”
은하는 손에 쥔 마법 행정 태블릿의 화면을 끄며 한숨을 쉬었다.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북부 영지의 풍경은 그야말로 황량함 그 자체였다. 붉은 용암이 흐르던 마왕성 인근과 달리, 이곳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과 함께 검은 얼음이 뒤덮인 동토(凍土)의 땅이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한기에 은하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과로사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이 추위는 근로자의 신체적 능률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유해 요인입니다.”
은하의 곁에 거구의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데스나이트 인사팀장 카론이 안광을 서늘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에 달린 ‘인사팀장 카론’ 아크릴 명찰 위에 미세한 성에가 끼어 있었다. 카론은 생전 인간 제국에서 철야 근무를 하다 과로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추운 날씨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카론 부장님. 우리에게는 마왕 폐하의 결재 인장이 찍힌 강제 집행장이 있으니까요. 법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은하는 가죽 서류 가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가방 안에는 벨리알 공작의 숨통을 쥐고 흔들 초법적 무기, ‘마왕의 결재 집행장’이 묵직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거대한 검은 돌로 쌓아 올려진 북부 영지의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 앞바다에는 벨리알 공작의 사병들이 창을 치켜든 채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중앙에서 온 감사단을 향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경멸이 서려 있었다.
“멈춰라! 공작 전하의 허가 없이 영지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흡혈귀 장교 하나가 마차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은하는 창문을 내리고, 가죽 가방에서 붉은 마력이 번쩍이는 집행장을 꺼내 장교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마왕성 경영기획실장 유은하입니다. 마왕 폐하의 직인이 날인된 공식 세무 감사 집행장입니다. 이 조치를 물리적으로 거부할 시, 마왕성 법률 제1조에 의거하여 ‘합법적 반역’으로 규정, 영지 전체의 금융 계좌 동결 및 자산 압류 절차가 즉시 시작됩니다. 비켜서세요.”
은하의 목소리는 칼바람보다 더 건조하고 냉혹했다. 장교는 양피지에 서려 있는 마왕 발락의 절대적인 살기 마력과 은하의 기에 눌려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오만한 북부 영주라 할지라도, 마왕의 공식 직인이 찍힌 문서를 정면으로 찢어발길 배짱은 없었다.
“……통과시켜라.”
장교가 굴욕적인 표정으로 길을 열었다.
마차는 성문을 지나 벨리알 공작의 성 내부로 진입했다. 하지만 영주가 준비한 노골적인 방해 공작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인인 흡혈귀 엘릭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단을 맞이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귀하신 감사단 여러분. 전하께서 귀빈들을 극진히 모시라 하셨으나, 마침 영지 내에 대규모 관광객이 몰려 모든 여관과 객실이 만실(滿室)이더군요. 어쩔 수 없이 임시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엘릭이 안내한 곳은 성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침침한 석조 창고였다.
철문을 열자 곰팡이 냄새와 함께 뼈를 찌르는 듯한 냉기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는 검은 얼음이 얼어붙어 있었고, 온수 파이프는커녕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어두컴컴한 감옥 같은 방이었다.
“이곳이…… 숙소라고요?”
릴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예, 북부의 정취를 느끼기에 아주 적합한 친환경 석조 공간이지요. 온수가 나오지 않고 조금 춥긴 하겠지만, 강인한 마족들이니 이 정도는 견디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장부 검토 시간에 뵙지요.”
엘릭은 은하의 반응을 살피며 음흉하게 웃었다. 인간 계집 따위가 이 살인적인 추위와 냉대 앞에 눈물을 흘리며 당장 마왕성으로 도망치겠다고 울부짖기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품속에서 마법 행정 태블릿을 꺼내 들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엘릭 씨. 방금 귀하의 발언과 이 숙소 배정 행위는 명백한 법률 위반입니다.”
“법률 위반? 이 북부 땅에서는 공작 전하의 명령이 곧 법이오!”
엘릭이 비웃자, 은하가 태블릿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화면에서 푸른색 디지털 격자가 명멸하며 공중에 거대한 황금빛 글자들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마계 근로기준법 제76조의2, 즉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입니다. 상급 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왕성 출장자 안전보건 규정 제14조에 따르면, 출장지의 고용주는 출장 근로자에게 적정 온도(섭씨 18도에서 22도 사이)와 위생적인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은하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을 스크롤했다.
“이 곰팡이 핀 냉동창고를 숙소로 배정한 것은 감사단의 업무 수행을 고의로 방해하고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려는 악의적인 ‘직장 내 괴롭힘’이자 ‘안전보건 규정 위반’입니다. 카론 부장님, 채증 완료하셨습니까?”
“완벽하게 끝마쳤습니다, 실장님.”
카론이 어둠 속에서 스윽 걸어 나왔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살기가 엘릭의 숨통을 조여왔다. 카론은 품속에서 ‘시말서 전용 붉은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출장지 복지 불이행 죄 및 악의적 근무 환경 조성 혐의. 위반자 엘릭. 이 양피지에 시말서를 작성하십시오. 거짓 변명을 적을 시 당신의 영혼 불꽃이 어떻게 타오르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이까짓 종이 조각과 뼈다귀가 감히 나를 협박해?! 난 공작 전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엘릭이 발악하며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상급 흡혈귀로서의 자존심이 인간 비서와 데스나이트 앞에 굽히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 순간, 유은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전조치 의무 위반 및 부당 지시 이행에 대한 법적 방어막을 가동합니다.”
웅—!
은하가 입은 검은색 H라인 오피스 정장 정면에서 눈부신 황금빛 마법진이 회전하며 뿜어져 나왔다. ‘근로기준법 결계 (Labor Barrier)’였다. 근로자 보호 조항을 위반한 상급자나 적대 세력의 직접적인 무력과 악의를 100% 반사하는 무적의 법적 결계.
결계에서 방출된 황금빛 파동이 어둡고 추운 지하 창고 전체를 휩쓸었다. 그 순간, 벽면에 서려 있던 벨리알 공작의 악의적인 얼음 마법 한기가 비명을 지르며 연기처럼 정화되어 사라졌다. 축축하던 바닥의 검은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창고 내부의 온도가 정확하게 쾌적한 섭씨 22도로 고정되었다.
“끄아악!”
결계의 법적 인과율 충격을 정면으로 맞은 엘릭은 뒤로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마력 흐름이 강제로 차단되면서 온몸에 지독한 무력감이 찾아왔다.
“이, 이게 무슨 주술이냐……!”
“주술이 아니라 법률의 힘입니다.”
은하는 단정하게 안경을 치켜올리며 가죽 서류 가방에서 또 다른 장비를 꺼냈다. 그것은 마왕성 시설관리팀의 가고일 반장이 출장 전에 챙겨준 ‘정밀 보수용 마법 공구 세트’였다. 황금색 망치와 정밀 마력 측정기가 담긴 묵직한 공구 상자였다.
“릴리스 팀장님, 가구 배치를 시작하겠습니다. 가고일 반장님이 챙겨준 이 공구 세트라면 5분 만에 현대식 스마트 오피스를 연성할 수 있습니다.”
“좋네요, 실장님. 제가 구석에 책상 라인을 잡을게요.”
릴리스가 마법 주판을 두드리자, 창고 구석의 돌벽이 부드럽게 깎여 나가며 깔끔한 석조 책상과 서류 캐비닛으로 변형되었다. 은하가 황금 망치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자, 거칠던 돌바닥이 먼지 하나 없는 반질반질한 대리석 타일로 리모델링되었다.
단 5분 만에, 음침하던 냉동창고는 마왕성 경영기획실 본부와 완벽하게 똑같은 위생적이고 아늑한 ‘모바일 스마트 오피스’로 탈바꿈했다.
바닥에 쓰러져 이 황당한 광경을 지켜보던 엘릭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마법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전사들은 보았어도, 법률 조항과 공구 세트 몇 개로 던전을 현대식 사무실로 개조하는 괴물들은 생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은하는 덜덜 떨고 있는 엘릭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속삭였다.
“엘릭 씨, 아직 비품 조달 의무가 남아 있습니다. 당장 공작 전하의 개인 창고에서 최고급 마력 난로와 거위털 담요, 그리고 탕비실용 온수 마법석을 대령하세요. 만약 10분 내로 조달하지 않을 시, 귀하의 개인 근태 점수를 즉시 F등급으로 강등시키겠습니다. 사내 복지 포인트 전액 몰수는 물론이고, 매달 지급되는 마정석 급여가 50% 감봉될 예정입니다.”
“감, 감봉이라고?! 내 월급이 깎인단 말인가?!”
지방 영지의 말단 관리인에게 월급 삭감만큼 무서운 형벌은 없었다. 엘릭은 카론의 붉은 양피지와 은하의 서늘한 눈빛 앞에 완전히 굴복했다.
“다,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공작 전하 몰래 창고를 열어서라도 최고급 비품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엘릭은 허겁지겁 문을 열고 도망치듯 창고 밖으로 뛰어 나갔.
잠시 후, 엘릭의 부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붉게 타오르는 최고급 마력 난로와 푹신한 담요, 그리고 정수기용 깨끗한 식수통을 감사실 내부로 가득 실어 날랐. 창고 한구석에는 지옥의 믹스커피 머신이 설치되었고, 파이어 임프가 온도를 정확히 85도로 맞추기 시작했다.
은하는 가고일 반장의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K-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온몸의 피로를 사르르 녹여주었다.
“하아, 출장지에서 마시는 믹스커피는 역시 각별하네요.”
창고 밖 어둠 속에서 감사단을 감시하고 있던 벨리알 공작의 비밀 스파이들은, 얼어 죽을 줄 알았던 감사단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따뜻한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턱이 빠질 정도로 당황한 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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