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인트라넷의 탄생과 첫 번째 경고
마왕성 신관 10층 경영기획실 본부의 깨진 천장 틈새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유은하는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안경을 닦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청동빛 ‘경영기획실 사원증 목걸이’를 소중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섀도우 보스가 있었다. 마계 최강이라 불리던 암살자 길드의 수장은 이제 어엿한 보안팀장으로서 자물쇠가 잘 채워졌는지 기획실 금고를 확인하고 있었다. 4대 보험과 퇴직금 누진제, 그리고 수요일 제육볶음 무제한이라는 당근은 마계의 암살자들을 완벽하게 조련해 낸 것이다.
“섀도우 팀장님.”
“예, 실장님! 무슨 지시든 내려주십시오!”
섀도우 보스가 잽싸게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뼈 단검을 쥐고 은하의 목을 겨누던 살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성실한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원의 초롱초롱한 눈빛만 남아 있었다.
“일단 부서진 천장 유리창 수리 기안서부터 작성해 주세요. 그롬 씨에게 압류한 비자금에서 비용을 처리할 거니까, 영수증 증빙 확실하게 해 주시고요. 아, 그리고 바르가스 보안팀장님과의 R&R 조율도 잊지 마세요. 경비와 기밀 보안은 엄연히 다른 도메인이니까요.”
“R&R…… 역할과 책임 말씀이시군요! 완벽하게 인수인계받겠습니다!”
섀도우 보스가 사원증을 흔들며 신나게 퇴장하자, 은하는 다시 지독한 만성 피로와 안구 건조증을 느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롬을 지하 감옥으로 처넣으며 일차적인 테러 위협은 넘겼지만, 은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양피지에 일일이 기록하고 전령을 보내 확인하는 이 아날로그식 행정 체계는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보안도 취약할뿐더러 수작업으로 정산하다 보니 그롬 같은 부패 세무관들이 중간에서 돈을 빼돌려도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마왕성 내부 정리를 넘어 마계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모든 자원과 세금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거대한 전산 인프라가 필요했다.
“슬슬 시스템을 구축할 때가 됐네.”
은하는 마법 행정 태블릿을 두드리며 기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획서의 제목은 [마왕성 최초의 사내 인트라넷 및 ERP 구축 계획안].
날이 밝자마자 은하는 마왕성의 기술력을 담당하는 두 핵심 인물을 기획실로 긴급 소집했다. 8서클 대마법사이자 마왕성의 CTO인 제레드, 그리고 아라크네 족 출신의 천재 개발자 엘리자베스였다.
“인트라넷…… ERP라고요?”
헝클어진 백발에 돋보기안경을 얹은 제레드가 은하가 내민 기획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야근 수당과 개발비만 주면 밤새 마법을 연구하던 그였지만, 현대식 전산망의 개념은 그에게도 낯설었다.
하반신은 거미, 상반신은 안경을 쓴 지적인 여성의 모습을 한 엘리자베스 역시 여덟 개의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흥미로운 듯 기획서를 훑어보았다.
“실장님, 그러니까 이 마법 실을 이용해 마왕성 구석구석을 물리적인 통신망으로 연결하고, 중앙 마력 서버에 모든 부서의 장부와 근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동기화하겠다는 뜻인가요?”
“정확해요, 엘리자베스 씨.”
은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까지는 각 영지나 부서에서 양피지에 적어 보내는 장부를 일일이 대조해야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구축할 ERP 시스템은 자원 입고와 지출, 세금 납부 현황을 입력하는 순간 중앙 태블릿으로 즉각 반영되죠. 위조가 불가능한 마법적 전산망을 까는 겁니다.”
제레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무언가 찔리는 기색으로 자신의 로브 품속을 슬그머니 만지작거렸다. 은하는 은테 안경 너머로 그의 수상한 움직임을 단번에 포착했다.
“제레드 교수님. 품속에 있는 건 뭐죠? 실사 들어가기 전에 자진 신고하세요.”
“아, 아니…… 그게 말일세…….”
제레드가 땀을 흘리며 품속에서 오래된 마법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그것은 제레드가 은하의 지시를 받기 전에 독자적으로 구상했던 [마계 전원 실시간 마력 감시 및 정신 통제 프로토콜], 일명 ‘빅 브라더 마법진’ 설계도였다. 마왕성 전체의 마력을 전산화하여 모든 마족의 정신을 통제하려던 위험천만한 금지된 기획서였다.
은하는 그 설계도를 슥 훑어보더니, 차갑게 미소 지었다.
“디자인이 아주 훌륭하네요. 이 감시 마법진의 뼈대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내 인트라넷 ERP 자동 정산 시스템’으로 개조하겠습니다. 감시와 세뇌용 마력을 ‘실시간 근태 체크 및 장부 연산 마력’으로 변환하면 되겠어요.”
“내 위대한 마법진을 고작 출퇴근 카드 정산용으로 쓰겠다고?!”
제레드가 비명을 질렀지만, 은하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야근 수당을 정확하게 계산해 주는 마법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마법입니다. 엘리자베스 씨, 당장 마법 네트워크 망 직조에 들어가 주세요. 제레드 교수님은 서버 안정화 주문을 걸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실장님! UI/UX 디자인은 제 거미줄 아트를 가미해 아주 깔끔하고 직관적으로 짜 드릴게요!”
엘리자베스가 안경을 빛내며 여덟 개의 다리로 고속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녀가 자아내는 반짝이는 푸른색 마법 실들이 기획실 벽면을 타고 마왕성 벽 내부로 뻗어 나가며 물리적인 네트워크 케이블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제레드는 투덜거리면서도 특유의 공대생 마인드가 발동했는지, 믹스커피에 포션을 타 마시며 마력 서버 구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는 은하의 직속 제자인 하급 고블린 똑똑이가 눈물을 흘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실장님! VLOOKUP 함수를 입력했는데 자꾸 에러가 뜹니다!”
“똑똑이 대리, 참조 범위 절대경로 설정할 때 F4 키 눌렀어요? 그리고 마지막 인수에 정확히 일치하는 값을 찾으려면 FALSE를 넣어야죠. 다시 해 보세요.”
“아! 그렇군요! F4…… 절대경로……!”
똑똑이는 은하의 스파르타식 엑셀 교육 덕분에 이제 제법 쓸만한 비서 사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사실 똑똑이에게는 고대 고블린 제국의 황실 서기 가문의 제왕적 혈통이 흐르고 있었기에, 복잡한 수식과 숫자 데이터를 뇌에서 다중 연산하는 천재적인 잠재력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엑셀 단축키 앞에서 눈물을 찔끔 흘리는 처량한 인턴 처지였지만 말이다.
며칠 밤낮의 철야 작업 끝에, 마침내 마왕성 중앙 대강당의 거대한 마력 수정구가 푸른빛을 뿜어내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마왕성 최초의 사내 인트라넷 ERP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기획실 직원들의 책상 위에 놓인 마법 태블릿 화면에 깔끔한 로그인 창과 함께 실시간 자원 현황판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완성했군요, 엘리자베스 씨. 아주 훌륭해요.”
은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태블릿의 보안 설정을 켰다.
“이제 이 전산망에 ‘아웃룩 스케줄 잠금 (Schedule Lock)’ 결계를 동기화하겠습니다. 앞으로 아웃룩 일정표에 미리 침공 예약 및 승인을 받지 않은 외부 기사단이나 용사들의 물리적 공격은, 이 인트라넷 방어벽에 의해 ‘예약 불가 오류’로 판정되어 국경에서 강제로 차단될 겁니다.”
“침공을…… 일정표 예약제로 통제하다니. 실장님은 정말 사악한 천재이십니다.”
제레드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은하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ERP의 첫 번째 자동 세무 감사 쿼리를 실행했다. 마왕성 직할령과 마계 전역 영지들의 실시간 세금 납부 및 재정 데이터를 크로스 체크하는 알고리즘이었다. 푸른색 엑셀 격자창들이 홀로그램으로 회전하며 방대한 수치들을 정렬해 나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보던 그때.
띠링! 띠링! 띠링!
갑자기 기획실 내부의 마법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은하의 태블릿 화면 중앙에 거대한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였다.
[경고: 북부 영지 세수 데이터 불일치 감지]
[최근 10년간 누적 세금 허위 보고율: 75%]
[추정 누락 세액: 1,500,000 규격 마정석]
[영주: 벨리알 공작]
화면에 뜬 붉은색 꺾은선그래프는 북부 영지의 자금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있으며, 조직적인 탈세와 비자금 세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다. 벨리알 공작은 마왕 발락의 눈을 피해 북부 광산의 수입을 허위로 축소 보고하며 거대한 사병을 육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획실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북부 영주 벨리알 공작은 마계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상급 마족으로, 마왕조차 그의 무력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거물이었다.
똑똑이는 붉은 경고창을 보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제레드와 엘리자베스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벨리알 공작을 건드리는 것은 곧 마계 전체의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떨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워커홀릭의 서늘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은하는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수십만 마정석을 탈세하면서 장부 조작도 허술하게 해 놓다니, 감사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요. 똑똑이 대리.”
“예, 예! 실장님!”
“북부 영지 벨리알 공작 앞으로 세무 감사 통지서 작성하세요. 다음 감사 대상은 북부 영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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