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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납치 첫날, 엑셀을 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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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두통과 함께 눈이 떠졌다.


"으윽……."


유은하는 본능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각이 낯설었다. 늘 차고 다니던 싸구려 손목시계 대신, 쇠사슬 특유의 차갑고 무거운 감촉이 손목을 옥죄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은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방은 축축한 돌벽이었고, 천장에는 곰팡이가 가득했다. 횃불 하나가 벽면에서 위태롭게 타오르며 침침한 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김부장 그 인간이 주말에 던져놓은 기획서 수정하느라 사흘 밤을 새웠을 때도 이것보단 머리가 덜 아팠는데……."


그녀는 중소기업 ‘아성통상’의 5년 차 만렙 비서였다. 최사장의 온갖 잡일 심부름과 김부장의 가스라이팅을 견디며 주 80시간 노동을 소화하던 K-직장인의 표상. 분명 어젯밤에도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를 들이부으며 야근을 하다가 책상에 엎드렸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창고치고는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키익! 인장(인간 장난감)이 눈을 떴다!"

"살이 아주 포동포동하게 올랐군! 마왕님께 바치기 전에 다리 한쪽만 뜯어 먹으면 안 되나?"


어둠 속에서 기괴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은하가 고개를 돌리자, 초록색 피부에 송곳니가 튀어나온 괴물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오크와 임프들이었다.


보통의 20대 여성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을 상황.

하지만 은하의 반응은 달랐다.


"아, 진짜 시끄럽네. 조용히 좀 하세요. 지금 대가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그리고 야근 수당도 안 주면서 사람을 이딴 무허가 가공실에 감금하는 건 불법인 거 모릅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포 대신 지독한 피로와 짜증이 가득했다. 오크들은 예상치 못한 인간의 반응에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이 인장이 미쳤나? 겁도 없이 어디서 고함을……!"


그때, 거대한 진동과 함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쿵! 쿵! 쿵!


"인간 기획자가 눈을 떴다고 들었다! 당장 알현실로 끌고 가라! 마왕 발락 님께서 기다리신다!"


붉은 갑옷을 입은 거구의 데몬 전사가 들이닥쳤다. 은하는 엉망진창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왕? 발락? 사장 놈 성이 발 씨였나? 아니, 그보다 사방이 온통 용암 결계잖아. 탈출은 글렀군.’


은하는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붉은 용암 강을 보며 탈출 계획을 빠르게 접었다. 도망치려다 타 죽는 것보단, 일단 저 ‘마왕’이라는 최고 결정권자와 면담을 나누는 게 생존 확률이 높다는 계산이 섰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거대한 해골 왕좌가 놓인 마왕성 집무실, 즉 알현실이었다.


웅장하고 피비린내 나는 알현실 중앙, 검은 갑옷을 입고 거대한 뿔을 자랑하는 마계의 절대자, 마왕 발락이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수십 명의 마족 장군들이 무기를 들고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흐흐흐, 가녀린 인간 계집이로군."


발락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 불꽃이 일렁였다.


"내가 바로 이 심연의 지배자, 마왕 발락이다. 인간계 침공을 앞두고 내 군대의 예산과 자원을 총괄할 ‘쓸만한 머리’를 찾던 중 네놈이 소환되었지. 하지만 내 위압적인 마력 앞에 오줌을 지리지 않는 인간은 처음이로군."


위압적인 마력? 은하는 속으로 코방귀를 꼈다.


‘지랄하네.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우리 최사장이 서류철 집어던지면서 대가리 깨버리겠다고 소리 지를 때 뿜어내던 살기에 비하면 이건 그냥 여름철 에어컨 바람 수준이다.’


은하는 침착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왕좌 옆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거대한 양피지 두루마리들을 눈여겨보았다. 그것은 발락이 자랑스럽게 펼쳐놓은 ‘인간계 정벌 군사 기획서’였다.


비서 생활 5년 차. 은하의 눈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양피지 위에 적힌 괴상한 문자들과 숫자들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잠깐…… 저거 장부 수준이 왜 저래?’


직업병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이었음에도, 은하의 뇌는 본능적으로 양피지 속 수치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때 은하의 주머니 속에 있던 스마트폰이 마계의 짙은 마력과 공명하며 푸른빛을 내뿜었다. 눈앞에 가상의 격자창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시스템 동기화 완료: 엑셀 스프레드시트 마법 (Ctrl+F / Ctrl+V)이 발현됩니다.]


은하의 눈앞에 마왕성의 모든 자원과 예산 흐름이 데이터화되어 일목요연하게 정렬되기 시작했다. 은하는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블루라이트 차단 은테 안경을 꺼내 콧등에 걸쳤다. 안경알 너머로 푸른 격자창의 수치들이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마왕님."


은하의 목소리가 알현실의 침묵을 깨뜨렸다.


"음? 살려달라고 빌려느냐?"


"아니요. 빌기는커녕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기획서, 어느 대가리 깨진 새끼가 작성한 겁니까?"


"……무어라?!"


알현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오크 장군들이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를 듯 살기를 내뿜었지만, 은하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태연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푸른 엑셀 격자창이 그녀의 손짓을 따라 공중에 화려하게 회전하며 펼쳐졌다.


"이번 인간계 정벌 계획서의 총예산이 50,000골드라고 적혀 있네요. 그런데 예상 회수 자원인 ‘인간 영혼 결정’의 가치는 고작 12,000골드 상당입니다. ROI(투자 대비 수익률)가 마이너스 76%예요. 이게 정복 전쟁입니까, 아니면 인간계를 향한 자선 기부 사업입니까?"


"이, 이 계집이 감히 마왕님의 위대한 정업을 모독하다니!"


군사부장 바르가스가 포효하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은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팩트 폭행을 이어갔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세요, 생산부장님. 영수증 증빙도 안 되는 지출이 수두룩한데 어디서 목소리를 높입니까? 여기 보세요. ‘마왕님 전용 황금 마차 도금 및 유지비 - 15,000골드’. 정복 전쟁 가는데 지휘관 의전 차량 비용이 전체 예산의 30%를 처먹는 게 말이 됩니까? 이건 명백한 회사 공금 횡령이자 배임입니다!"


"배, 배임……?!"


발락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은하는 공중에 떠오른 엑셀 창에서 특정 수치들을 빨간색으로 강조하며 소리쳤다.


"게다가 보급품 단가도 엉망진창이에요! 전투용 헬하운드 사료비를 일반 생고기 시세보다 3배나 비싸게 책정해 놨잖아요! 중간에서 납품업자랑 무기고 소장이 뒷돈이라도 챙긴 게 분명합니다. 이대로 정벌군 출발시키면, 다음 달 이맘때쯤 마왕성은 부도나서 법정 관리에 들어갑니다!"


"크어억……!"


발락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은하가 제시한 붉은색 적자 그래프와 반박 불가능한 수치 데이터가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사실 발락은 매달 적자 장부를 보며 왜 돈이 없는지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그저 부하들이 "위대한 전쟁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하니 도장만 찍어줬을 뿐.


"너, 너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어떻게 내 장부의 맹점을 단번에……!"


발락이 화염 마력을 내뿜으며 위협하려 했지만, 은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유은하. 아성통상 5년 차 수석 비서입니다. 주 80시간 야근하며 악덕 사장 밑에서 다져진 독기입니다. 마왕님, 그깟 불장난은 치우시죠. 매일 아침 결재판 들고 대기할 때 우리 최사장이 내뿜던 가스라이팅 아우라에 비하면 이건 따뜻한 온수 매트 수준이니까요."


그녀의 지독한 현실주의와 서늘한 은테 안경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마왕 발락은 결국 왕좌에서 스르륵 내려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분노 대신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내 군대에 무력만 가득하고 정작 돈줄을 쥘 현자가 없었거늘…… 인간 여자여, 네 능력이 탐난다."


발락이 진지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유은하. 너를 마왕성 최초의 ‘경영기획실장’이자 내 수석 비서로 임명하겠다. 마왕성의 모든 재정과 예산 결재권을 네게 일임하마!"


은하는 안경을 쓸어 올리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일단 목숨은 건졌다. 게다가 최고 권력자의 뒷배까지 얻었으니…….’


그녀는 주머니에서 가상의 고용계약서 양식을 태블릿으로 띄우며 차갑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회장님. 계약 조건은 주 52시간 근무 보장, 연봉은 마정석 5,000개, 그리고 기획실 비서실은 지하 3층에서 햇빛이 잘 드는 신관 10층으로 즉시 이전해 주십시오. 탕비실에 믹스커피 머신 설치 예산도 승인해 주셔야 합니다."


"그, 그래! 다 허락하마!"


마왕 발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은하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


그렇게 은하는 마왕성 최초의 S등급 경영기획실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알현실 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군사부장 바르가스의 눈빛은 붉은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전쟁과 폭력만이 전부였던 마왕성에, 지옥보다 끔찍한 ‘행정 통제’와 ‘야근의 지옥’이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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