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의 도둑
고대의 룬 문자가 차가운 무쇠 철문에 닿는 순간, 수천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인과율의 틈새가 소리 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국 마법협회 지하 3층, 제1특허 수납고의 거대한 철문 앞. 한스의 손에 들린 고대 결계 해제 스크롤이 은은한 백색 빛을 내뿜으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수백 년 전, 제국 건국 초기의 대법관들이 사용했다는 사법적 권능의 파편이 철문 표면에 새겨진 8성급 대마법사의 붉은 방어 룬 문자를 하나씩 덮어씌웠다.
치이이익!
마치 뜨거운 달궈진 철판에 얼음이 닿는 것 같은 기괴한 마찰음이 고요한 지하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한스는 침을 삼키며 가죽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시계를 확인했다. 초침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단 5분.’
보스인 최재혁 변호사가 신신당부했던 제한 시간이었다. 이 고대 스크롤이 결계의 인과율을 비틀어 한스에게 ‘합법적 통행 권한’을 부여하는 시간은 정확히 300초. 1초라도 지체된다면 수납고 주변에 설치된 강력한 마나 격멸 결계가 발동해 그의 육체를 먼지로 만들어버릴 터였다.
스르륵.
붉은 빛을 발하던 방어 룬들이 백색의 사법적 허가 문양으로 일시 전환되더니, 무게만 수십 톤에 달하는 무쇠 철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지듯 열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한스는 신속하게 몸을 날려 수납고 내부로 침투했다.
수납고 안은 지독하려치만큼 차갑고 어두웠다. 공기 중에는 수많은 마법 공식이 기록된 양필지 두루마리들이 보라색과 푸른색의 미세한 마나 보호막에 감싸인 채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제국의 수많은 평민 학자들이 대가문과 마탑에 빼앗기고 억울하게 묻혀버린 진짜 지식의 무덤이었다.
한스는 허튼 곳에 한눈을 팔 시간이 없었다. 그는 즉각 품 안에서 최재혁이 빌려준 ‘절대 가독안의 안경’을 꺼내 왼쪽 눈에 착용했다. 안경테 측면의 정밀한 미세 태엽을 두 번 조율하자, 렌즈 표면에 황금빛 기하학적 격자선들이 어둠 속을 가르며 입체 홀로그램처럼 투영되었다.
“동조 개시.”
한스는 자신의 체내에 흐르는 2성급 바람 속성 마나를 발두르의 도면에서 지시한 대로 정확히 320헤르츠의 미세 진동 주파수로 공명시켰다. 웅웅거리는 미세한 진동이 그의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절대 가독안의 안경이 한스의 바람 마나와 완벽하게 동조하는 순간, 수납고 깊숙한 곳에 위치한 최고 보안 등급의 무쇠 보관함이 붉은색 광채를 띠며 도드라져 보였다.
그 보관함이야말로 특허 심사관 루시안이 에단의 원본 서류를 은닉해 둔 장소였다.
한스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보관함 앞으로 도약했다. 보관함의 자물쇠에는 마법협회장 발레리우스 백작이 직접 걸어둔 이중 마력 결계 락이 걸려 있었다. 일반적인 자물쇠 따기 기술로는 접촉하는 순간 손가락이 타버릴 치명적인 덫이었다.
하지만 한스의 왼쪽 눈에 장착된 안경은 보스의 ‘절대 가독안’의 능력을 실시간으로 동조하여 전송하고 있었다. 렌즈 너머로 이중 결계 락을 구성하는 마나의 기하학적 수식들이 해체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수식의 맹점, 즉 마나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끊기는 ‘인과적 공백 구간’이 한스의 시야에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찾았다.”
한스는 가죽 주머니에서 은제 만능열쇠 세트를 꺼냈다. 그는 바람 마나의 주파수를 320헤르츠에서 미세하게 조율하며, 결계의 공백 구간에 은제 핀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은제 핀이 마나의 결을 따라 회전하자, 철컥하는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보관함의 1차 봉인이 해제되었다.
이어서 2차 봉인인 루시안 심사관의 고유 마력 서명 락이 나타났다. 루시안이 위조 대장을 조작할 때 새겨둔 독특한 주파수의 마력 서명이었다. 한스는 당황하지 않고 안경의 스캔 기능을 활성화했다. 렌즈가 루시안의 서명 파동을 완벽하게 모방하여 역주파수를 쏘아 보내자, 굳게 닫혀 있던 무쇠 보관함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안에는 세 장의 결정적인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에단 솔베이그가 최초로 마법협회에 제출했다가 고의로 반려당했던 ‘솔베이그 공식’ 최초 신청서 원본이었다. 누런 양필지 모퉁이에는 에단의 친필 서명과 최초 접수 날짜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두 번째는 펠릭스의 특허 날짜를 조작하기 위해 루시안 심사관이 마도 기록 장치의 시간을 강제로 소급 조작한 흔적이 고스란히 기록된 ‘특허 신청 소급 조작 로그’ 대장이었다. 대장 표면에는 조작을 승인한 루시안의 미세한 마력 서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문서. 그것은 아르님 백작 가주 알베르트가 마법협회 심사관들과 사법부 보수파 판사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한 뇌물 액수와 날짜가 꼼꼼히 기록된 ‘아르님 가주 뇌물 장부’ 원본이었다.
“이거였군. 보스가 말한 법정 폭탄이.”
한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 세 장의 문서만 있으면 펠릭스의 표절뿐만 아니라 마법협회 자체를 사법적으로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었다. 한스는 지체 없이 드워프 공학 장인 발두르가 은제 합금과 마나 차단 룬 문자를 융합해 특수 제작해 준 ‘에테르 차단용 정밀 가방’을 열었다.
그는 세 장의 증거물들을 가방 내부에 조심스럽게 쓸어 담고 3중 다이얼 잠금장치를 맞추었다. 가방 표면에 새겨진 드워프 룬 문자가 은은하게 빛나며, 가방 내부에 담긴 증거물들의 마나 신호를 완전히 격리시켰다. 이제 외부의 어떤 탐지 마법이나 원격 소멸 주문으로도 이 증거물들을 추적하거나 파괴할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은 1분 30초.
한스가 가방을 숄더백처럼 메고 탈출하려는 순간, 수납고 천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미세한 마력 실타래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수납고 소장 휴고 백작이 결계 이면에 은밀히 심어둔 ‘잔류 마력 감지 트랩’이었다. 증거물들이 보관함에서 이탈하는 순간 발동하도록 설계된 치밀한 덫이었다.
윙-! 윙-! 윙-!
수납고 내부 전체가 핏빛의 적색 결계로 뒤덮이며, 귀를 찢을 듯한 경보 마법 소리가 지하 복도 전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제장! 걸렸군!”
한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수납고 정문의 무쇠 철문이 굉음을 내며 아래로 빠르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한스는 전신에 바람 마나를 폭발적으로 집중시키며 문틈을 향해 슬라이딩했다.
쾅-!
간발의 차이로 무쇠 철문이 완전히 닫히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한스는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수납고 외부 복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복도 저편에서 무거운 철갑옷의 마찰음과 거친 발걸음 소리가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침입자다! 지하 3층 수납고 구역을 전면 봉쇄하라!”
마법협회 무력 집행대장 가스톤의 벼락같은 고함이 어둠을 찢었다. 가스톤은 5성급 무력 보유자답게 거대한 철퇴를 치켜든 채, 수십 명의 무장 집행 대원들을 이끌고 복도 입구를 완벽하게 포위해 들어왔다.
한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바람의 파동에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는 은신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신체가 공기 중으로 투명하게 녹아들었다.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쥐새끼가!”
가스톤이 차갑게 비웃으며 품 안에서 붉은색 주머니를 꺼내 허공에 뿌렸다.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마나 탐지 분말’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은신 중이던 한스의 바람 마나 주파수와 격렬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한스의 투명한 실루엣이 붉은색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 선명하게 노출되었다.
“거기 있었군!”
가스톤이 거구에 걸맞지 않은 기민한 속도로 도약하며, 전신에 금강 마나 오라를 두른 거대한 철퇴를 한스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휘둘렀다. 철퇴가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만으로도 복도의 석조 벽면이 미세하게 갈라질 정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한스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측면으로 던졌다.
콰아아앙-!
철퇴가 한스가 서 있던 바닥을 강타하며 대리석 파편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튀었다. 비록 정면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가스톤의 철퇴를 스치고 지나간 5성급 무력의 미세 오라 충격이 한스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큭!”
한스는 어깨에 가해진 타는 듯한 화상 통증과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타박상에 신음을 흘리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가죽 재킷 어깨 부위가 검게 그을리며 찢어졌다. 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증거가 든 드워프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쥐새끼치고는 제법 날렵하군. 하지만 대마법사의 결계가 작동하는 이 복도에서 네놈의 도주로는 없다. 순순히 증거를 내놓고 항복해라!”
가스톤이 다시 한 번 거대한 철퇴를 치켜들며 한스에게 다가왔다. 무장 대원들이 반경 10미터 이내의 복도를 겹겹이 포위하여 한스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가스톤의 무자비한 철퇴가 한스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스는 자신의 가죽 재킷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손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끝에 까칠까칠한 고대 양필지의 감촉이 닿았다. 보스인 최재혁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쥐여주었던 사법적 탈출용 히든카드 주문서였다.
‘한스 씨, 만약 가스톤의 무력에 가로막혀 탈출이 불가능해진다면 이 주문서를 찢게. 고대 헌법의 상위 권능이 자네를 사법적 당사자의 대리인으로 인지하여, 일시적인 공간 왜곡 방어막을 형성해 줄 걸세.’
보스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가스톤의 철퇴가 한스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직전, 한스는 주인공이 미리 쥐여준 사법적 탈출용 히든카드 주문서를 찢어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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