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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의 목숨값, 소송의 방아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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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롬이 묵묵히 도끼 자루를 쥐어 잡으며 재혁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지하실 외부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부서진 지하실 계단을 타고 내려온 것은 땀에 흠뻑 젖은 어린 소년이었다. 세인트 마리아 병원의 심부름꾼 아이였다. 소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재혁을 향해 소리쳤다.


“에, 에단 님!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루시 누나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지더니 마력 회로가 완전히 굳어가고 있어요! 피터 박사님이 당장 오지 않으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쿵, 하고 재혁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빙의하기 전 에단 솔베이그의 기억 속에서, 여동생 루시는 그가 가진 유일한 세계이자 반드시 지켜야 할 목숨줄이었다. 영혼의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정서적 격통이 재혁의 이성을 세차게 흔들었다.


재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고 있던 그롬을 바라보았다. 그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라. 계약은 살아남은 자와 맺는 법. 네 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내 도끼는 언제든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


“……고맙습니다.”


재혁은 낡은 민법전과 선친의 일지를 품에 안고 지하실을 뛰쳐나갔다. 밤안개가 자욱한 수도 아르카디아의 거리는 차갑고 음산했다. 가난한 평민들이 모여 사는 수도 변두리의 낡은 석조 건물, 세인트 마리아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병원 402호실의 문을 열자, 시큼한 약초 냄새와 썩어가는 마나의 악취가 재혁의 코끝을 찔렀다.


침대 위에는 창백하게 질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녀, 루시 솔베이그가 누워 있었다. 그녀의 차분한 갈색 머리칼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고, 맑았던 녹색 눈망울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끝은 이미 마력 회로의 붕괴로 인해 검푸르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에단, 자네 왔는가.”


낡은 안경을 코끝에 걸친 피터 박사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상태가 너무 나쁘네. 마나 중독증의 한계를 넘어섰어. 체내의 마력 회로가 완전히 폐쇄되어 정체된 마나가 장기를 갉아먹고 있네. 이대로라면…… 길어야 한 달이네. 아니, 당장 오늘 밤을 넘기기도 위태로워.”


“치료할 방법이 정말 없는 겁니까?”


재혁이 루시의 차가운 손을 꼭 쥐며 물었다. 피터 박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황실 약제실에서 극소량만 제조되는 고가의 마나 해독 영약, ‘엘릭서 디톡스(Elixir Detox)’가 있다면 체내의 오염된 마나를 정화하고 회로를 되살릴 수 있네. 하지만 그 영약은 단 한 병에 최소 5만 골드를 호가하네. 우리 같은 평민 의사나 몰락한 학자가 평생을 벌어도 만져볼 수 없는 액수지. 게다가 마탑의 허가 없이는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네.”


5만 골드. 아르님 백작 가문이 에단의 공식을 강탈해 벌어들인 하루 치 이익도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지금의 재혁에게는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액수였다.


재혁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하려던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 현대 변호사로서의 냉철한 이성이 경보를 울렸다.


‘아니, 이상해. 아무리 평민이라 해도 마력 감응력이 0단계인 루시가 이 정도로 심각한 마나 중독증에 걸릴 리가 없다. 마나를 다루지도 않는 아이가 대체 어디서 이런 치명적인 마나 오염을 당한단 말인가?’


스르륵.


재혁의 왼쪽 눈동자가 찬란한 황금빛 톱니바퀴 문양으로 변하며 미세하게 회전했다. ‘절대 가독안(Absolute Readability)’이 활성화된 것이다.


루시의 가냘픈 신체 표면 위로 흐르는 마나의 기하학적 선들이 재혁의 시야에 3차원으로 투영되었다.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마력 회로의 흐름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그리고 재혁은 보았다.


루시의 심장 주변에 엉켜 있는 것은 단순한 정체 마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교묘하게 숨겨진, 검붉은색의 이질적인 마력 주파수였다. 톱니바퀴 눈동자가 그 주파수를 역산해 나가자, 하나의 명확한 정보가 뇌리에 각인되었다.


[식별: 마나 침묵의 독약 (Mana Silence Poison)]

[특징: 인위적인 마나 고갈 저주를 유도하는 암시장 금지 시약. 장기 복용 시 자연사로 위장된 마력 회로 붕괴 유발.]

[잔류 마력 지문: 아르님 백작 가문 수호 마법 결계 주파수와 99.8% 일치.]


재혁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독살 시도였어.”


“뭐, 뭐라고? 에단, 그게 무슨 소린가?”


피터 박사가 놀라 물었지만, 재혁은 대답 대신 루시의 진료 기록 장부를 절대 가독안으로 응시했다. 주치의인 헨리(Henry)가 작성한 처방전 이면에 흐르는 은밀한 정신계 마법의 흔적이 보였다. 헨리는 아르님 가문의 뇌물을 받고 루시의 치료를 고의로 지연시키는 약물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펠릭스 본 아르님. 네놈이 에단뿐만 아니라, 그의 여동생까지 완벽하게 침묵시키려 주치의를 매수해 독을 썼구나.’


재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감정에 휩쓸려 당장 헨리의 멱살을 잡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귀족이 고용한 의사를 고발해 봤자, 사법부는 평민의 말을 묵살할 터였다.


치료제인 ‘엘릭서 디톡스’를 확보하는 동시에, 아르님 가문의 목줄을 단숨에 죄어버릴 완벽한 법적 무기가 필요했다.


재혁은 눈을 감고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피터 박사에게 말했다.


“박사님. 제가 처방하는 미세 마나 정화 호흡법으로 루시의 회로를 임시 정지시켜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한 달 이내에 엘릭서 디톡스를 들고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에단,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 5만 골드는 평민이 구할 수 있는 돈이 아니네!”


“법대로 할 겁니다.”


재혁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탐욕에 가득 찬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털어내겠습니다.”


* * *


지하 연구실로 돌아온 재혁은 밤을 새워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책상 위에 양필지를 펼쳐놓고, 깃펜에 잉크를 적셨다. 그의 빈약한 2성급 마나 서클이 밤샘 연산의 과부하로 인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관자놀이가 터질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밀려왔고, 코끝에서 붉은 코피가 한 방울 뚝 떨어져 양필지 모퉁이를 적셨다.


하지만 재혁은 펜을 멈추지 않았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대기업들의 특허 도용 음모를 산산조각 내던 그의 천재적인 법리적 설계 능력이 이세계의 사법 체계와 융합되고 있었다.


[제국 특허법 제14조 및 고대 마법 헌장 제3조에 의거한 특허 침해 가처분 신청서]


[신청인: 에단 솔베이그]

[피신청인: 펠릭스 본 아르님 및 청색 마탑]


[신청 취지: 피신청인이 무단 도용한 ‘하급 마나 효율 극대화 공식(솔베이그 공식)’을 적용한 모든 마도구의 생산, 유통, 판매 및 시전 행위의 즉각적인 금지를 청구함.]


재혁은 소장 이면에 형사 고발장까지 교묘하게 융합했다. 펠릭스가 에단을 살해하려 한 ‘에단 독살 미수 사건’의 정황과 독약의 마력 주파수 분석표를 첨부하여, 단순한 특허 분쟁을 강력한 형사 사건으로 확대시킬 덫을 촘촘히 짰다.


아침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를 무렵, 완벽한 사법적 단두대가 완성되었다.


재혁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낡은 가죽 가방을 크로스로 멘 날렵한 체구의 소년이 들어섰다. 수도 뒷골목 출신의 발 빠른 고아 소년이자, 배달의 달인인 티모시였다.


“에단 아저씨! 급한 배달이 있다고 해서 왔어요. 근데 지하실 꼴이 왜 이래요?”


티모시가 부서진 지하실 내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소한 소란이 있었다. 티모시, 네가 해줘야 할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다.”


재혁은 품 안에서 붉은 마나 인장이 찍힌 가처분 소장 두루마리를 꺼내 티모시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 위에 마지막 남은 은화 몇 닢을 쥐여주었다.


“이 서류를 청색 마탑의 수석 연구원, 펠릭스 본 아르님에게 직접 전달해라. 반드시 그의 ‘손’에 직접 쥐여주어야 한다.”


티모시가 혀를 내둘렀다.


“청색 마탑이요? 거긴 경비 마법사들이 삼엄해서 평민 고아 따위는 입구에서 마법으로 쫓아낼 걸요?”


재혁은 미소를 지으며 티모시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왼쪽 눈 속 황금빛 톱니바퀴가 은은하게 빛났다.


“제국 사법 절차법 제51조에 따르면, 소송 당사자에게 소환장이 직접 도달하지 않으면 재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귀족들은 이 절차적 맹점을 이용해 소장 수령을 거부하며 재판을 무기한 지연시키지. 하지만 네가 가진 2성 바람 신체 강화 마나라면, 마탑의 환기구와 하수구를 통해 펠릭스의 개인 실험실까지 침투할 수 있을 거다. 할 수 있겠느냐?”


티모시는 은화의 묵직한 무게와 재혁의 확신에 찬 눈빛을 번갈아 본 뒤, 대담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아저씨. 뒷골목의 티모시가 배달하지 못하는 곳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소년은 소장을 가방 깊숙이 넣고 바람처럼 지하실을 뛰쳐나갔다.


* * *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청색 마탑. 그곳의 중심부에 위치한 최고급 개인 실험실에서, 금발을 휘날리는 오만한 천재 마법사 펠릭스 본 아르님이 거만한 태도로 마도구 설계도를 검토하고 있었다.


“펠릭스 님, 이번에 등록한 솔베이그 공식 덕분에 가문의 마나 정제소 수익이 벌써 두 배로 뛰었습니다. 마탑주께서도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다.”


조수 카터가 아첨 섞인 보고를 올리자, 펠릭스는 입꼬리를 오만하게 올렸다.


“당연한 결과다. 평민 학자 놈이 그런 위대한 공식을 가지고 있어 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일 뿐이지. 그 에단이라는 놈은 어떻게 되었느냐? 독약은 확실히 먹였겠지?”


“예, 주치의 헨리를 통해 여동생에게도 손을 썼으니, 머지않아 가문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사채업자 그레이엄도 지하실 압류를 위해 출발했으니 오늘 밤 안으로 모든 흔적이 지워질 겁니다.”


“ 훌륭하군. 이제 그 공식은 온전히 나의 자산이다.”


펠릭스가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승리를 자축하려던 바로 그 순간.


스사사삭—!


실험실 천장의 환기구 덮개가 가볍게 열리더니, 날렵한 그림자가 바닥으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티모시였다.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침입을……!”


경비 마법을 전개하려던 펠릭스의 주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티모시는 바람의 마나를 발동하여 번개 같은 속도로 펠릭스의 앞으로 쇄도했다. 소년은 가방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소장 두루마리를 꺼내 펠릭스의 손에 정확히 쥐여주었다.


착—!


“배달 완료! 에단 솔베이그 님이 보내신 소송 소환장입니다!”


티모시는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문을 열어 아래층 테라스로 몸을 던져 유유히 사라졌다. 마탑의 경비망이 뒤늦게 울렸지만, 소년은 이미 수도의 뒷골목 속으로 녹아든 뒤였다.


“이, 이 무슨 무례한……!”


펠릭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양필지 두루마리를 내려다보았다.


두루마리의 표면에는 제국 사법부의 붉은 공인 마크와 함께, 지워지지 않는 굵은 글씨로 [특허 침해 가처분 신청 및 살인미수 고발장]이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원고의 이름은 분명히 자신이 독살했다고 믿었던 ‘에단 솔베이그’였다.


“에단……? 그 산송장 같은 평민 학자 놈이 나를 고소했다고?”


펠릭스의 얼굴이 분노와 경악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는 소장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손끝에서 청색 화염 마법을 격발했다.


화르륵—!


붉은 양필지 두루마리는 펠릭스의 분노 어린 불꽃 속에서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날렸다.


“평민 학자 새끼가 감히 사법부의 이름을 빌려 나를 협박하려 들다니! 이따위 종이조각을 불태워버리면 그만이다!”


펠릭스는 가소롭다는 듯 재를 털어내며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제국 사법 절차법상, 송달원이 피고의 신체에 소장을 직접 접촉하여 전달하는 순간 ‘합법적 송달’은 완벽하게 완료된다. 피고가 소장을 불태우거나 훼손하더라도, 이미 사법부의 마나 네트워크에는 송달 완료 신호가 각인되어 재판 절차가 강제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펠릭스가 오만하게 불태워버린 것은 단순한 종이조각이 아니라, 자신과 아르님 백작 가문의 목줄을 단숨에 끊어버릴 사법적 단두대의 방아쇠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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