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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의 흔적, 사라진 증인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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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서필상의 오기일 뿐입니다, 재판장님. 방대한 학술 데이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세한 계산 실수에 불과합니다. 원고 대리인이 지엽적인 수식의 오류를 물고 늘어지며 본질을 흐리려 하는군요.”


레인하르트 본 제논은 굳어진 얼굴을 억지로 풀며 이빨을 드러내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단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에는 평민 학자 따위에게 기선을 제압당했다는 굴욕감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단상 앞으로 다가오며 최재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오기가 아니라면, 에단 솔베이그 변호사. 당신이 그렇게 신뢰하는 그 공식의 안전성을 이 자리에서 직접 증명해 보이시겠습니까?”


법정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레인하르트의 즉석 실증 요구는 영민하고도 잔인한 덫이었다. 마나 출력 2성에 불과한 병약한 에단의 육체로는 고밀도의 마나를 제어하는 실증 마법을 시전하다가 스스로 자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방청석의 평민 마법사들이 숨을 죽였다. 실비아 역시 재혁의 감정색 로브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우려 섞인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최재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정상급 특허 변호사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였다. 상대가 궁지에 몰렸을 때 판을 흔들기 위해 던지는 무모한 ‘실증 카드’의 본질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피고 대리인은 본 법정을 단순한 마술 공연장이나 서커스 무대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재혁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아드리안 판사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마법 공식의 안전성 검증은 고도의 과학적 분석과 철저한 사실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법적 절차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법정 내부에서의 즉석 시연은 사법부의 신성한 결계를 파괴하고, 여기 계신 배심원단과 방청객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중대한 사법 방해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에 원고 대리인은 즉석 실증 요구를 기각해 주실 것을 청구하며, 공식의 실질적 결함 여부를 입증하기 위한 정식 ‘준비 기일’을 신청합니다.”


아드리안 판사는 재혁의 논리적인 이의 제기를 타당하게 여겼다. 그의 손에 들린 상아 의사봉이 묵직하게 법관 단상을 두드렸다.


타앙!


“원고 대리인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인다. 법정 내부에서의 무분별한 마법 실연은 허가하지 않는다. 사법부는 원고 측의 신청을 수용하여, 본 가처분 심리의 정식 실증 및 증거 제출을 위해 앞으로 48시간의 준비 기일을 부여하겠다. 피고 측은 이에 대비하라.”


“재판장님……!”


레인하르트가 항의하려 했으나, 아드리안 판사의 단호한 눈빛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재혁은 피고석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진 뒤, 단상을 내려왔다.


이틀의 유예 시간. 그것은 단순한 시간 벌기가 아니었다. 적들의 목줄을 완전히 죄어버릴 ‘살아있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사법적 작전 시간이었다.


***


대로변을 지나 수도 중심가 초입에 위치한 3층 규모의 석조 건물, ‘솔베이그 마법 법률사무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원한 에테르 향이 재혁의 코끝을 스쳤.


“변호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소의 제1호 마법 기술 분석관으로 영입된 레오가 방대한 양필지 도면 더미 뒤에서 안경을 치켜올리며 인사했다. 레오는 4성 마법 공학자답게 책상 위에 펠릭스의 특허 공식의 기하학적 구조를 입체 홀로그램으로 투영해 두고 있었다.


“레오 씨, 분석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습니까?”


재혁이 단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레오는 마도 투영기의 조율 태엽을 돌려 특정 구간의 마나 흐름을 붉은색으로 강조해 보였다.


“아주 기묘합니다. 변호사님이 법정에서 지적하신 수식의 오류 외에도, 펠릭스가 등록한 특허 공식 자체에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이 존재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마나의 주파수가 변환되는 이 병목 구간에서, 출력이 일정 한계치인 4성 마스터 등급 이상으로 올라가면 공명 파동이 제어되지 않고 급격히 왜곡됩니다.”


“공명 파동의 왜곡이라.”


재혁이 의자에 깊숙이 묻어앉으며 중얼거렸다.


“예. 쉽게 말해, 이 공식은 에단 님이 남기신 ‘솔베이그 공식 원본’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마나 파동을 안정시키는 ‘안정화 코드’가 통째로 누락되어 있습니다. 펠릭스는 에단 님의 미완성 연구 일지만을 훔쳐서 급하게 자기 이름으로 특허를 등록한 겁니다. 이 상태로 마법을 시전하면, 마나가 역류해 시전자의 서클을 파괴하는 수준을 넘어…… 정제 장치나 주변의 마도구를 완전히 폭발시켜 버립니다.”


레오의 설명에 재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펠릭스가 훔쳐 간 수식은 미완성본이었다. 그렇다면, 그 불완전한 공식을 기반으로 상업적 정제 실험을 강행했을 아르님 백작 가문과 청색 마탑 내부에서 분명히 대규모 사고가 발생했을 터였다.


재혁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왼쪽 눈에 마력을 모았다. 그의 왼쪽 눈동자가 웅웅거리는 미세한 진동음과 함께 황금빛 톱니바퀴 문양으로 변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절대 가독안(Absolute Readability)’의 개안이었다.


스르륵.


재혁의 황금빛 시야 너머로 레오가 전개한 펠릭스의 공식 홀로그램이 투명하게 해체되었다. 수식 이면에 흐르는 불안정한 마나의 인과적 결함이 붉은색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청색마탑 중앙 실험동 4층…….’


재혁의 머릿속에 에단의 기억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펠릭스가 연구 성과를 자랑하며 마탑 내부에서 진행했던 비공식 실험들. 그리고 그 실험 도중 발생했던 의문의 화재와 정제소의 폐쇄 기록들.


“으윽.”


갑자기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재혁의 뇌리를 강타했다. 심장 주변의 미약한 2성 마나 서클이 거칠게 요동치며 체내 마력 회로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재혁은 신음하며 책상을 짚었다. 입안에서 비릿하고 뜨거운 핏기가 울컥 솟구쳤다.


“변호사님! 괜찮으십니까?”


레오가 깜짝 놀라 손수건을 건넸다. 재혁은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무심히 닦아내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절대 가독안의 연산 부하일 뿐입니다. 그보다 확실해졌군요. 펠릭스의 공식은 사용자에게 물리적 상해를 입히는 결함 제품입니다. 현대 법률의 ‘제조물 책임법 유추 적용’ 규정을 들이밀면, 단순한 특허 침해를 넘어 아르님 가문 전체에 천문학적인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실제 그 결함 공식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살아있는 증인’과 물리적 증거가 필요하겠군요.”


서재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왼쪽 어깨에 하얀 붕대를 동여맨 사무장 한스였다. 한스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먼지 묻은 검은색 양필지 가죽 스크롤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보스, 하수구 냄새를 풍기며 수도 뒷골목을 샅샅이 뒤진 보람이 있더군요. 청색 마탑이 철저히 은폐하려 했던 3년간의 비밀 사고 기록과 피해자 명단입니다.”


재혁의 눈빛이 빛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스 씨. 몸은 좀 어떻습니까?”


“엘리사 씨가 지어준 약초 시약 덕분에 어깨 통증은 거의 가셨습니다. 가스톤 그 무식한 놈의 철퇴 오라에 맞았을 때는 정말 저승 사자와 악수를 하는 줄 알았지만요.”


한스는 가볍게 어깨를 움직여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2년 전 청색 마탑 산하의 제3마나 정제소에서 원인 불명의 대규모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마탑 측은 이를 평민 노동자의 단순 조작 과실로 발표하고 정제소를 영구 폐쇄했죠. 하지만 진짜 원인은 펠릭스의 결함 공식을 적용한 정제 장치의 과부하 폭발이었습니다.”


“그 사고의 생존자가 있습니까?”


레오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죽 스크롤의 특정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토(Otto)’. 당시 폭발 사고로 현장에서 왼쪽 팔을 잃은 수석 정제공입니다. 그는 마탑의 결함 공식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다룬 인물이죠. 사고 직후 아르님 가문의 기사들에게 입막음 협박을 당하고 정제소에서 쫓겨났습니다. 지금은 가문의 추적을 피해 신분증도 없이 슬럼가에 숨어 살고 있더군요.”


“위치는 어디입니까?”


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안경을 다시 착용했다.


“아르카디아 회색 지구(Arcadia Grey District). 마탑의 마법 장벽 바깥쪽에 위치한 무법지대이자 평민 학자들의 슬럼가입니다. 마탑의 감시가 닿지 않는 유일한 곳이죠.”


재혁은 벽에 걸린 감청색 로브의 깃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사냥을 시작한 맹수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레인하르트가 눈치채기 전에 오토의 신변과 폭발 사고 당시의 일지 잔해를 확보해야 합니다. 레오 씨는 사무소에 남아 공식의 기하학적 결함 분석 보고서를 최종 완성해 주십시오. 한스 씨, 그롬을 깨우십시오. 회색 지구로 갑니다.”


“알겠습니다, 보스.”


***


아르카디아 회색 지구의 공기는 수도 중심가와는 완전히 달랐다.


정제되지 않은 마나의 탁한 냄새와 석탄 그을음, 그리고 가난에 찌든 인간들의 절망이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텁텁해졌다. 낡은 목조 건물들이 위태롭게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초라한 로브를 뒤집어쓴 평민 마법사들과 몰락 학자들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재혁 일행을 훔쳐보았다.


“이곳은 법보다 주먹이, 주먹보다 백작 가문의 보이지 않는 사설 영장이 먼저 통하는 곳입니다.”


한스가 가죽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주변을 경계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만능열쇠와 소형 단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에는 거구의 하프오크 전사 그롬이 거대한 방패를 등에 메고 묵묵히 걸으며 위압감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롬의 존재감 덕분에 뒷골목의 부랑자들은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재혁은 절대 가독안을 약하게 활성화한 채 골목 곳곳에 잔류하는 마나의 흔적을 쫓았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선명한 마력과 달리, 회색 지구의 마나는 탁하고 쪼개진 파동을 그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기득권 마탑들이 마나를 독점 정제하여 평민들에게는 찌꺼기 에테르만을 흘려보내기 때문에 발생하는 지식과 자원의 양극화 현상이었다.


‘법과 지식이 권력자들의 착취 도구로 전락한 세상의 민낯이 바로 여기 있군.’


재혁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차가운 분노를 느꼈다. 억울하게 죽어간 원본 영혼 에단의 기억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에단 역시 이 회색 지구의 척박한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며 공식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결국 그 순수한 열정을 귀족들에게 짓밟힌 채 죽어갔다.


“보스, 저기입니다. 골목 맨 끝에 위치한 반쯤 무너진 목조 판자집.”


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붉은 녹이 슨 마도 정제 부품들이 마당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허름한 가옥이 있었다. 비가 새는 지붕을 낡은 가죽 천막으로 대충 덮어둔, 인간의 존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거처였다.


재혁은 천천히 다가가 낡은 목조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 똑.


내부에서 둔탁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급격히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문틈 사이로 수척하고 그을린 얼굴, 그리고 한쪽 소매가 펄럭이는 외팔이 사내의 눈동자가 경계심 가득한 빛을 띠며 나타났다.


“……누구냐. 마탑에서 보낸 자객인가?”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극도의 공포와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재혁은 로브 후드를 벗고 단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금테 단안경이 에테르 조명 빛을 받아 신뢰감 있는 지적인 광채를 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토 씨. 저는 솔베이그 마법 법률사무소의 대표 변호사, 최재혁입니다. 당신의 잃어버린 왼쪽 팔과, 청색 마탑이 은폐한 정제소 폭발 사고의 진실을 되찾아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진실’이라는 단어에 오토의 외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가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재혁의 목덜미를 스치는 차갑고 예리한 살기가 골목의 탁한 공기를 일순간에 얼려버렸다.


스스스슥.


골목 양방향의 어둠 속에서, 은은한 적색 오라를 검날에 두른 무장 기사들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벽면을 타고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아르님 백작 가문의 푸른 사자 문양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에단 솔베이그. 쥐새끼처럼 냄새를 잘 맡는군. 하지만 여기까지가 네놈의 한계다.”


어둠을 헤치고 걸어 나오는 기사들의 서늘한 철갑 소리가 회색 지구의 정적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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