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퇴로, 청문회의 서막
솔베이그 마법 법률사무소 앞 대로를 가득 메운 무장 대원들의 강철 군화 소리가 일순간 멈춰 섰다.
새벽의 푸른 어둠을 가르며 다가오는 마차. 황실 사법부의 금빛 천칭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마차의 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재단된 검은색 사법 예복을 걸친 젊은 사내가 내려섰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전신에서 흐르는 5성급 마나의 은은한 오라. 제국 사법부의 소장파 법관이자 이번 가처분 예비 심리의 재판장인 아드리안 판사였다.
그의 뒤를 이어 은빛 갑옷 위에 붉은 망토를 걸친 거구의 사내가 대검을 덜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제국 사법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은빛 사자 기사단장, 8성 수호 기사 콘라드였다. 기사단장이 이끄는 수십 명의 정예 기사들이 순식간에 마법협회의 사설 대원들을 포위하자, 현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게 무슨 소란인가, 가스톤 대장.”
아드리안 판사의 차가운 목소리가 대로변에 울려 퍼졌다. 진흙 바닥에 주저앉아 찢어진 손바닥을 움켜쥐고 있던 가스톤은 아드리안과 콘라드의 등장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드리안 판사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 평민 쥐새끼의 하수인이 마법협회 지하 수납고에 침입해 국가 기밀 문서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여기 백작 가문에서 발부한 특별 수색 영장이 있으니, 당장 저 결계를 해제하고 내부를 압수수색하게 해주십시오!”
가스톤은 붉은 마나 인장이 찍힌 양필지 서류를 흔들며 소리쳤다. 자신의 배후에 아르님 백작과 발레리우스 백작이 있으니, 하급 판사 따위는 자신을 제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이 눈빛에 가득했다.
아드리안 판사는 가스톤이 내민 서류를 흘끗 바라보더니, 정문 안쪽 유리창 뒤에 서 있는 최재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원고 대리인 에단 솔베이그. 피고 측의 주장에 대해 변명할 말이 있습니까?”
유리창 뒤에서 최재혁은 단안경을 가볍게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왼쪽 눈동자 속 황금빛 톱니바퀴 문양이 서늘하게 회전했다. 재혁은 정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나와 아드리안 판사 앞에 섰.
“변명이 아니라, 정당한 사법적 채증 자료를 제출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재혁은 품 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소형 마도 영상 및 음성 기록 장치를 꺼내 들었다. 장치의 상단에 손을 올리고 극미량의 2성급 마나를 주입하자, 공중에 푸른색 홀로그램 영상이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솔베이그 법률사무소 내부의 범죄 용의자들을 체포하고, 장물을 회수한다! 문을 부수고 진입하라!’
화면 속에는 가스톤이 위조 영장을 흔들며 폭언을 퍼붓고, 그의 사설 마법사들이 결계를 향해 화염 마법을 시전하려다 소멸하는 장면, 그리고 가스톤이 직접 철퇴를 휘둘러 사법 성역 결계를 타격하는 전 과정이 오차 없이 재생되었다. 가스톤의 목소리와 마력 파동의 주파수까지 완벽하게 기록된 대체 불가능한 물증이었다.
“제국 민사소송법 제89조에 따라, 정식 등록된 마법 법률사무소는 사법부의 허가 없이는 그 어떤 행정 기관도 무단 침입할 수 없는 사법적 성역입니다.”
재혁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대로변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 측 가스톤 대장은 사법부의 공식 직인이 찍히지 않은, 주파수 420헤르츠의 조작된 위조 영장을 들이밀며 무단 야간 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제국 형법 제82조 ‘공문서 위조 및 사법 성역 침범, 직권남용 현행범’에 해당합니다.”
“이, 이 교활한 놈이……!”
가스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아드리안 판사는 재혁이 제시한 영상과 영장의 주파수 수치를 확인한 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가스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상아 의사봉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가스톤 대장. 이 영장의 인장 주파수는 사법부의 공인 마크가 아니다. 게다가 사법 성역으로 지정된 법률사무소를 야간에 무단 습격한 것은 황실법상 그 어떤 면책 특권으로도 방어할 수 없는 중죄다.”
“판사님! 저는 마법협회장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저 평민 놈이 훔쳐 간 국가 기밀 서류를 회수해야……!”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불법 집행의 면책 사유가 되지 않는다.”
아드리안 판사가 단호하게 선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은빛 사자 기사단장 콘라드가 앞으로 나섰다.
철컹!
콘라드가 허리춤에서 거대한 사법 집행 검을 뽑아 들자, 8성급 수호 기사의 압도적인 마나 위압이 가스톤의 전신을 짓눌렀다. 가스톤의 무장 대원들은 기사단장의 오라 앞에 감히 무기를 쥘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에 검을 떨어뜨렸다.
“무장을 해제하라. 제국 사법부의 이름으로, 집행대장 가스톤과 무단 습격에 가담한 대원 전원을 직권남용 및 공문서 위조, 사법 성역 침범 현행범으로 구속한다.”
콘라드의 명령에 따라 사법 경위들이 가스톤의 손목에 마력을 억제하는 무거운 쇠사슬을 채웠다. 가스톤은 사슬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에단 솔베이그! 네놈이 감히 무사할 것 같으냐! 백작 가문이, 청색 마탑이 네놈의 사지를 찢어놓을 것이다!”
가스톤의 비명 소리가 새벽 공기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최재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마법협회의 무력 집행부 수장이 현장에서 구속당했다. 이로써 적들이 청문회 당일 행사하려던 물리적 위압감의 방패는 완벽하게 박살이 났다.
하지만 재혁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젓는 법이다. 적들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릴 타이밍은 바로 지금이었다.
재혁은 아드리안 판사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 측이 이토록 무모하게 밤중에 제 사무소를 습격해 증거를 인멸하려 한 정황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이는 마법협회 내부에서 원고의 최초 특허 신청서를 조직적으로 은닉하고 조작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방증입니다.”
재혁은 품 안에서 미리 작성해 둔 서류철을 꺼내 판사에게 제시했다.
“이에 원고 대리인은 고대 마법 헌장 제3조 ‘상호 진실 규명 의무’에 근거하여, 마법협회 지하 제1특허 수납고에 보관 중인 에단 솔베이그의 최초 신청서 및 관련 결재 대장 일체에 대한 ‘증거개시명령서(Discovery Writ)’의 즉각적인 강제 집행을 청구합니다.”
아드리안 판사의 눈빛이 깊어졌다. 평민 변호사가 들이미는 고대 헌장의 논리는 너무나도 정교했고, 방금 전 가스톤의 습격 사건으로 인해 증거 인멸의 우려는 소명 단계를 넘어 확증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더 이상 귀족들의 외압을 핑계로 이 명령을 거부할 명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고의 청구는 정당하다.”
아드리안 판사가 서류에 자신의 상아 인장을 꾹 눌러 찍었다. 푸른색 마나 서명이 양필지 위에 각인되며 사법부의 공식 명령서가 완성되었다.
“사법부는 마법협회에 대해 24시간 이내에 원고가 청구한 최초 특허 신청 서류 일체를 법정에 제출할 것을 명령한다. 이를 거부하거나 고의로 지연할 경우, 피고의 특허 도용 혐의를 사실로 인정하여 피고 패소 판결을 내릴 것임을 경고한다.”
명령서가 발부되는 순간, 재혁의 왼쪽 눈동자 속 톱니바퀴가 만족스럽게 회전했다. 마법협회와 아르님 백작 가문은 이제 자신들의 서류고를 합법적으로 열어젖히거나, 혹은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소 판결을 받아들여야 하는 완벽한 사법적 외통수에 몰린 것이다.
***
같은 시각, 제국 수도 동부에 위치한 아르님 백작 가문의 거대한 저택.
“가스톤이 구속되었다고? 사법 성역 침범 현행범으로?”
알베르트 본 아르님 백작의 분노 섞인 고함이 집무실 천장을 흔들었다. 그의 앞에는 펠릭스 본 아르님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서 있었고, 피고 측 수석 대리인 레인하르트 변호사는 차가운 단안경을 만지며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예, 아버님. 사법부의 그 애송이 판사 아드리안이 콘라드를 움직여 가스톤 일당을 현장에서 체포했습니다. 게다가…… 그 평민 놈의 신청을 받아들여 협회 지하 수납고에 대한 ‘증거개시명령(Discovery Writ)’까지 발부했습니다. 24시간 이내에 에단의 최초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즉각 패소 처리를 하겠답니다!”
펠릭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단의 최초 신청서가 법정에 노출되는 순간, 자신이 개발했다고 주장하던 공식이 완전한 표절이자 도용임이 만천하에 드러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최연소 청색 마탑주로 옹립되려던 자신의 미래는 물론, 가문의 명예까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레인하르트! 제국의 최고 변호사라는 자가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사법부 내부의 보수파 사법관들을 움직여 그 명령을 취소시킬 방법은 없나?”
백작이 윽박지르자, 레인하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대답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백작님. 가스톤이 위조 영장을 들고 법률사무소를 습격한 장면이 마도 장치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사법부의 공식 조서로 등록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대법원의 보수파 판사들이 개입하려 들면, 오히려 사법부 전체가 행정부의 부패에 부역했다는 여론의 폭탄을 맞게 됩니다. 아드리안 판사는 명분을 쥐었습니다. 법적으로는 더 이상 퇴로가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패소 판결을 받아들이란 말인가!”
펠릭스가 소리치자, 레인하르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호선을 그렸다.
“법적인 퇴로가 사라졌다면, 법정 내부에서 판결의 ‘내용’ 자체를 뒤흔들 카드를 만들어야지요.”
“카드가 있단 말인가?”
“예, 백작님. 마법 공식의 소유권 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 공식이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입니다. 설령 그 평민 놈이 원본 공식의 작성자라 할지라도, 그 공식이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완전하고 위험한 쓰레기 수식’으로 판명 난다면 사법부는 결코 그 공식의 특허권을 복원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레인하르트가 품 안에서 초청장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초청장 표면에는 제국 아카데미의 신성한 문양이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상아탑의 최고 권위자이자 제국 아카데미의 정교수, 바르톨로 교수를 포섭해야 합니다. 그 늙은이의 학술적 권위는 제국 대법관들조차 함부로 무시하지 못합니다. 바르톨로 교수에게 거액의 연구비와 마탑의 독점 시약 유통권을 약속하십시오. 그 대가로 청문회 당일 원고의 공식이 ‘마나 폭발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위험한 공식’이라는 허위 학술 감정서를 법정에 제출하게 만드는 겁니다.”
알베르트 백작의 눈빛이 번뜩였다. 제아무리 고대 헌장의 권능을 들이밀고 완벽한 서류 증거를 확보한 최재혁이라 할지라도, 제국 최고의 학술 권위자가 공식의 ‘유해성’을 선언하는 순간 법정의 여론은 단숨에 뒤집힐 터였다. 사법부는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마법 공식의 특허권을 결코 평민에게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좋다. 즉시 바르톨로 교수에게 사람을 보내라. 그 늙은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쥐여주마. 청문회 당일, 그 평민 놈이 되찾으려던 공식이 제국을 파멸시킬 저주받은 수식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게 만들어라!”
알베르트 백작의 잔인한 미소가 집무실의 어둠 속에서 번져나갔.
***
동이 터 오는 아침, 솔베이그 마법 법률사무소의 3층 집무실.
최재혁은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차가운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손에는 한스가 목숨을 걸고 지하 수납고에서 탈취해 온 아르님 가주의 비밀 뇌물 장부와 루시안 심사관의 소급 조작 로그가 들려 있었다. 장부 표면에 흐르는 미세한 마력의 결들이 그의 절대 가독안을 통해 유기적인 사슬을 그리며 적들의 파멸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스는 엘리사의 약초 치료를 받아 어깨의 통증이 다소 진정된 듯, 단정하게 수선된 사무장 슈트를 입고 재혁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보스, 마법협회가 방금 사법부의 명령에 굴복하여 에단의 최초 특허 신청서를 법정에 정식 제출하겠다는 서면을 접수했다고 합니다. 놈들의 퇴로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한스의 보고에 재혁은 단안경을 만지며 낮게 웃었다.
“아니, 한스 씨. 놈들은 결코 순순히 무릎 꿇지 않을 걸세. 퇴로가 사라졌다면, 아예 법정 자체를 진흙탕으로 만들 새로운 음모를 준비하고 있겠지.”
재혁은 품 안에 보관해 둔 고대 마법 헌장 석판 조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석판 표면의 룬 문자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네. 적들이 어떤 가짜 권위와 거짓말을 들고나오든, 내 손에 쥐어진 이 고대 헌장과 자네가 가져온 진짜 증거들이 있는 한, 그들의 모든 거짓은 법의 천칭 위에서 산산조각 날 테니까.”
재혁은 장부와 소급 조작 로그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에단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제국 최대의 법정 결전, 대청문회의 서막이 마침내 오르고 있었다.
재혁은 문을 열고, 청문회장을 향해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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