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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의 미로를 넘는 탐욕, 숨겨진 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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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초당(Cheongun Cottage)의 안방은 아직도 깊은 밤의 서늘한 정적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방 안을 채운 향기로운 온기와 대조적으로, 창호지 문틈으로는 대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사락거리는 스산한 소리만이 흘러들었다.


침상에 누워 있던 한시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전신의 경맥이 갈가리 찢겨 나간 듯한 가혹한 통증이 단전에서부터 욱신거리며 밀려왔다. 기경팔맥이 완전히 폐절된 육체에 천도의 낙뢰가 남긴 상처는 지독하리만치 무거웠다. 그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려 하자,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부드러운 손길이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스승님……!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첫째 제자 설하율(Seol Ha-yul)이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은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평소의 얼음장 같던 냉정함은 간데없고, 오직 스승을 향한 가슴 찢어지는 죄책감과 애절함만이 그 눈 속에 가득했다.


한시우는 낮게 신음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머리칼의 절반이 서리가 내린 것처럼 은빛 백발로 변해 있었다. 천도의 낙뢰를 맞고 소생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했던 가혹한 신체적 대가였다.


“하율아…….”


“예, 스승님. 여기 있습니다. 제발…… 다시는 저를 위해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마세요. 제 목숨 따위가 뭐라고…….”


설하율은 한시우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그녀의 입술은 설산빙삼(Snow Mountain Ice Ginseng)의 푸른 약즙과 한시우의 붉은 피가 묘하게 섞여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을 통해 영삼의 정수를 직접 전해주던 그 끈적하고도 애절했던 감각이 한시우의 뇌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하율의 눈빛에 서린 독점욕은 구원을 넘어선 무서운 소유욕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언니, 스승님이 깨어나셨는데 혼자 독차지하려 들지 마.”


어둠 속에서 스르륵 나타난 둘째 야설화(Ya Seol-hwa)가 매서운 눈초리로 설하율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암영마기 역시 질투와 불안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 뒤편에서는 셋째 염초아(Yeom Cho-ah)가 주황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막내 독고란(Dokgo Ran)은 말없이 한시우의 도포 자락을 꽉 쥐었다.


네 명의 제자들 사이에 팽팽한 불꽃이 튀려는 찰나, 한시우의 심안(Mind's Eye)이 미세한 이질감을 포착했다.


‘……불길한 기운이다.’


초당을 둘러싼 환영의 대나무 숲(Illusion Bamboo Forest) 장막 너머로, 수십 개의 거친 기 흐름이 청운봉(Cheongun Peak)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살기와 탐욕이 가득 찬 기운.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류 수준의 조잡한 내력을 지닌 익숙한 인물이 있었다.


청성파의 망나니 소가주, 조충(Jo Chung)이었다.


“하율아, 설화야. 손을 놓거라. 손님이 온 것 같구나.”


한시우의 창백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목소리에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청성파의 쥐새끼들이군요. 감히 이 야밤에 스승님의 안식을 방해하다니…….”


설하율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내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성에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내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무모하게 나서지 마라. 내가 진법으로 해결하마.”


한시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안방 구석의 벽면을 밀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며 드러난 지하 밀실에는 청운초당의 오행기문진을 제어하는 오행진결반(Five-Elements Formation Plate)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시우는 기경폐절의 가슴 통증을 참아내며, 손가락 끝의 감각만으로 정밀하게 나무 회전판의 눈금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 *


“으윽! 이 빌어먹을 안개는 대체 뭐야!”


청운봉의 울창한 대나무 숲길. 횃불을 든 청성파 무사 삼십여 명을 이끌고 앞장서던 조충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하게 피어오른 하얀 안개가 그들의 시야를 완벽히 가로막고 있었다.


아비 조덕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조충이었다. 그는 낮에 청운봉에서 마주쳤던 설하율의 눈부신 미모에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무명 약초꾼의 제자라기엔 너무도 고결하고 아름다웠던 은발의 미소녀. 조충은 그녀를 강제로 납치해 자신의 첩으로 삼겠다는 비열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가주님, 이곳의 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대나무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듭니다. 기문둔갑의 진법이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심복 무사의 경고에 조충은 침을 퉤 뱉으며 금장검(Gold-Decorated Sword)을 뽑아 들었다.


“기문진법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래봤자 힘없는 약초꾼 새끼가 친 잔재주일 뿐이다. 안개가 앞을 가로막는다면, 전부 불태워버리면 그만이지!”


조충의 흐리멍덩한 눈에 탐욕과 광기가 번뜩였다.


“횃불을 던져라! 대나무 숲 전체에 불을 질러라! 안개를 태우고 길을 만들어라!”


“하, 하지만 소가주님! 산불이 크게 나면 장로님께서도……”


“시끄럽다! 내 명령이 들리지 않느냐? 저 안방에 숨어있을 은발의 계집년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깟 산봉우리 하나쯤 불타 없어져도 상관없다! 당장 불을 질러라!”


조충의 표악한 호통에 무사들이 주춤거리며 기름 병을 꺼내 대나무 숲에 뿌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타오르는 횃불들이 사방으로 던져졌다.


화르르륵!


건조한 밤바람을 타고 불길이 순식간에 대나무 숲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대나무 마디가 터지는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가 어둠 속을 가득 메웠다. 불길이 뿜어내는 기형적인 열기와 연기가 오행기문진의 흐름을 강제로 흐트러뜨렸다.


* *


“스승님! 진법의 핵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저 비열한 자들이 숲에 불을 질렀습니다!”


지하 밀실에서 오행진결반을 조율하던 한시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회전판을 타고 전해지는 기운의 흐름이 불길의 열기에 의해 사정없이 뒤틀리고 있었다.


“컥……!”


한시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움큼의 선혈을 바닥에 쏟아냈다. 진법의 반탄력이 무공이 없는 그의 경맥을 강하게 때린 것이다.


“스승님!”


야설화와 염초아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부축했다. 한시우는 피 묻은 입술을 닦아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진법의 안개만으로는 저 무식한 탐욕을 다 막을 수 없겠구나. 직접 나설 수밖에.”


한시우는 제자들을 이끌고 초당 마당으로 나섰다.


대나무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화염과 시커먼 연기가 청운초당 앞마당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그 연기 속을 뚫고, 검은 그을음을 묻힌 조충과 청성파 무사들이 오만방자한 미소를 지으며 난입했다.


“하하하! 거봐라! 불을 지르니 쥐새끼처럼 기어 나오는구나!”


조충은 횃불 불빛 아래 드러난 설하율의 얼굴을 보며 침을 흘렸다. 은발을 늘어뜨린 채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그녀의 자태는 밤의 화염 속에서 더욱 신비롭고 아름답게 빛났다.


“여전히 곱구나, 계집년. 낮에는 네 스승 놈의 잔재주에 속아 물러갔지만, 밤에는 국법도 정파의 도리도 내 편이다! 대역죄인을 숨겨준 죄로 네놈들을 관청에 고발하기 전에, 얌전히 내 침소로 들어온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조충은 금장검을 한시우를 향해 겨누며 비열하게 웃었다.


“백발이 성성한 약초꾼 새끼야. 낮에는 제법 꼿꼿하더니, 지금 보니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폐물이 되었구나. 네년들의 사지를 잘라 마당에 뿌리기 전에 당장 그 아름다운 제자를 내게 바쳐라!”


학대당했던 과거의 상처가 자극받은 설하율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내리며, 단전 내부의 빙백마기(Ice Demon Art)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마당 바닥이 하얗게 얼어붙어 가기 시작했다. 마체각성 1단계의 불길한 징후였다.


한시우는 하율의 앞을 막아서며 조충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만큼은 내력이 없음에도 조충의 기세를 압도했다.


“조충 소가주. 정파의 명문이라는 청성파의 후계자가 야밤에 무고한 평민의 사유지에 난입해 불을 지르고 납치를 일삼다니…… 조덕필 장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입 닥쳐라! 이 폐물 놈이 감히 내 아버님의 이름을 입에 담느냐! 무사들은 뭐 하느냐? 저 백발 놈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은발 계집을 포박해라!”


조충의 악에 바친 명령에 무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설하율은 스승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공포에 질려, 자신을 억누르던 이성을 놓고 한시우의 뒤편으로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제자들의 내력 주입과 소생 의식의 여파로 하율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미세하게 무겁고 둔했다. 그녀가 급하게 신형을 뒤로 물리는 찰나, 품속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차가운 옥의 감각이 어긋났다.


스르륵.


하율의 소매 자락 틈새로, 칠흑빛 가죽 끈에 묶인 정교한 푸른 옥패 하나가 미끄러져 내렸다.


탁.


차가운 마당 돌바닥 위로 떨어진 옥패는 불길을 반사하며 영롱하면서도 불길한 암청색 빛을 뿜어냈다. 그 표면에는 백련마교 교주의 직계 핏줄임을 증명하는 고대 천마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설하율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앗!”


그녀가 다급하게 몸을 숙여 옥패를 주우려 했지만, 조충의 날카로운 눈이 먼저 그 기이한 옥의 광채를 포착했다. 조충은 검끝으로 설하율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재 빠르게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빙설옥패(Ice Snow Jade Pendant)를 낚아챘다.


“이건……?”


조충은 횃불 빛 아래로 옥패를 가져갔다. 옥패에서 풍겨 나오는 미세하고도 서늘한 마교 특유의 음산한 기운이 조충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었다. 옥패의 중앙에 새겨진 피비린내 나는 백련의 문양을 확인한 조충의 얼굴에, 이윽고 광기 어린 비열한 미소가 잔인하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이거 백련마교 교주의 신표잖아? 네년들이 감추고 있던 정체가 바로 이거였어!”


조충은 옥패를 치켜들며 청운초당 마당이 떠나가라 광소했다. 그의 검끝이 다시금 설하율과 한시우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었다.


“네년들이 정파의 땅에 숨어든 마교의 더러운 첩자였구나! 그리고 이 백발 놈은 마교의 싹을 키우는 대역죄인이고! 이제 변명할 여지는 없다. 네놈들의 목을 베어 무림맹에 바치면, 청성파의 명예는 천하를 뒤흔들 것이다!”


절체절명의 정체 폭로 위기.


빙설옥패를 손에 쥔 조충의 눈빛이 살의와 탐욕으로 번뜩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설하율의 머릿속에는 지울 수 없는 가문의 잔혹한 기억이 자극받으며 마성이 거칠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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