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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와 백발, 제자들의 애절한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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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콰르릉!


하늘을 찢어발기는 뇌성이 청운봉 전체를 뒤흔들었다. 천벌의 절벽 정상에서 쏟아진 태고의 붉은 낙뢰는 무공을 잃은 한시우의 온몸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내력이 전혀 없는 기경폐절(Meridian Rupture)의 육체는 그 무자비한 하늘의 노여움을 견뎌내기에는 너무도 가냘팠다.


하지만 한시우는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쓰러질 수 없었다. 그의 품 안에는 은백색의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기이한 영초, 청운영지(Cheongun Yeongji)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제자 설하율의 폭주하는 빙백마기를 정화할 유일한 구명의 밧줄. 그것을 손에 쥔 채 죽을 수는 없었다.


“컥……!”


입안 가득 고여 드는 핏물을 삼키며, 한시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갔다. 전신의 경맥이 타들어 가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평소 우아하게 전개하던 환영보법(Illusionary Footwork)조차 이제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운 처절한 사투였다. 손끝의 동상 상처가 다시 터져 나와 청색 명주실로 감싼 붕대를 붉게 물들였지만, 그는 품속의 영초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폭풍우를 뚫고 마침내 저 멀리 청운초당(Cheongun Cottage)의 수수한 기와지붕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한시우의 시야는 이미 검게 흐려져 있었다.


툭.


초당 마당의 차가운 돌바닥에 발이 걸리는 순간, 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품 안의 청운영지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비틀어 안은 채, 한시우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와 하얀 서리가 내린 마당을 차갑게 적셨다.


* *


“스승님……?”


초당 문앞에서 초조하게 밤을 지새우며 보초를 서고 있던 첫째 제자 설하율(Seol Ha-yul)의 은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폭풍우 너머로 쓰러진 청색 도포의 인영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스승님!”


하율의 비명이 대나무 숲의 정적을 찢었다. 평소의 냉정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그녀는 미친 듯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방 안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던 둘째 야설화(Ya Seol-hwa), 셋째 염초아(Yeom Cho-ah), 그리고 막내 독고란(Dokgo Ran)이 동시에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아, 아아…… 스승님! 피가…… 피가 안 멈춰요!”


가장 먼저 한시우를 품에 안은 설하율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시우의 가슴팍은 이미 차가운 빗물과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 끝자락이 마치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천도의 낙뢰를 정면으로 맞은 대가로 육체의 생명력이 급격히 소멸해 가는 가시적인 징후였다.


“비켜봐! 내가 맥을 짚어볼 테니까!”


야설화가 창백해진 얼굴로 한시우의 손목을 낚아챘다. 하지만 맥박을 짚은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없어…… 맥박이 안 뛰어. 단전이 완전히 비어있고, 경맥이…… 경맥이 다 타버렸어!”


“그럴 리가 없어! 스승님이 왜, 우리를 두고 왜 쓰러지시는 건데!”


염초아가 울부짖으며 한시우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미세한 고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침묵만이 전해졌다. 온몸에 독기가 흐르는 만독마체임에도, 초아는 자신의 독기가 스승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는 것도 잊은 채 그의 도포를 움켜쥐고 오열했다.


막내 독고란 역시 아무런 감정이 없던 인형 같은 얼굴에 지독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툭 떨어져 한시우의 창백한 뺨 위로 흘러내렸다. 메말랐던 강철의 심장에 처음으로 전해진 가혹한 슬픔이었다.


“비키거라! 이 미련한 녀석들아!”


그때, 초당 뒤편 약실에서 급히 달려온 괴짜 의원 오의원(Oh-uiwon)이 제자들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는 한시우의 상태를 살피더니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였다.


“천도의 벼락을 맞았구나……! 기경팔맥이 폐절된 몸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정면으로 받았으니, 육신의 그릇이 버틸 수가 있나! 당장 방 안으로 옮겨라! 시간이 없다!”


제자들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한시우를 안아 들고 안방 침상으로 옮겼다. 오의원은 급히 침통을 열어 한시우의 전신 혈도에 침을 꽂아 넣었지만, 침끝에서는 그 어떤 생기의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맥이 완전히 죽어버려 침술조차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의원 영감! 제발 치료해 주세요!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우리 스승님 좀 살려내란 말이야!”


야설화가 오의원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그녀의 칠흑 같은 암영마기가 슬픔과 분노로 폭주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 초당 벽면을 검게 그을렸다.


“이년들아, 나라고 안 살리고 싶겠느냐! 하지만 지금 시우 녀석은 육신의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영혼의 등불이 꺼지기 직전이다! 일반적인 침술이나 탕약으로는 맥박을 되살릴 수 없어!”


오의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쳤다.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너희들의 진기(眞氣)를 직접 시우의 심장에 주입해 억지로 숨을 쉬게 만드는 가사 소생술(Near-Death Resuscitation)을 감행해야 한다. 하지만 시우의 몸은 실핏줄 하나까지 망가진 상태다. 너희들의 거친 마기(魔氣)가 단 한 푼이라도 섞여 들어간다면, 시우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을 것이다!”


그 말에 제자들이 숨을 들이켰다. 자신들의 힘이 스승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극단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설하율이 단호하게 눈물을 닦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겠어요.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정도(正道)의 호흡을 기억해 내면 돼요. 우리 안의 마기를 극한으로 정제해서, 가장 순수하고 따뜻한 온기만을 흘려보내면 됩니다.”


“하율이 말이 맞다. 스승님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야설화가 떨리는 손으로 한시우의 오른손을 잡았다. 염초아와 독고란 역시 한시우의 왼손과 발끝을 잡고 눈을 감았다.


네 명의 마교 후예들이 동시에 눈을 감고 단전의 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주변을 얼려버리고, 그림자로 어둠을 깔고, 독기를 내뿜고, 강철처럼 굳어버렸을 거친 마공의 기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들은 오직 스승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들의 기운을 극도로 미세하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스르릉…….


초당 방 안에 기이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하율의 빙백마기는 차가운 살기가 거세진 채 맑고 따뜻한 이슬 같은 온기로 변했고, 설화의 그림자는 차가운 어둠 대신 부드러운 장막이 되어 한시우의 전신을 감쌌다. 초아는 체내의 독기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억누르며 가장 순수한 천지정기만을 이끌어냈고, 란의 강철 같은 내력은 부드러운 온양이 되어 한시우의 경맥 속으로 스며들었다.


“흐읍……!”


제자들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기를 정도로 정제해 타인의 몸에 주입하는 것은 자신들의 단전이 뒤틀리는 극심한 고통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의 체온이 아주 미세하게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들의 집착 어린 내력 주입은 더욱 거세졌다.


그때, 오의원이 품속 깊은 곳에서 철저히 숨겨두었던 옥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방 안 가득 차가우면서도 머리를 맑게 하는 신비로운 향기가 퍼져 나갔다. 눈부신 설산의 만년 한기 속에서 자라난 전설적인 영물, 설산빙삼(Snow Mountain Ice Ginseng)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다. 북해의 설산 깊은 곳에서 얻은 영삼으로, 꺼져가는 생명력을 단숨에 붙잡아둘 구명의 성약이지. 하지만 시우 녀석은 지금 의식이 없어 약을 삼킬 수가 없다. 억지로 입을 벌려 밀어 넣었다가는 기도가 막혀 즉사할 게야.”


오의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하율이 설산빙삼을 낚아챘다.


“하율아, 너……!”


야설화가 놀라 소리쳤지만, 설하율은 망설임 없이 설산빙삼을 자신의 입안에 넣고 아작아작 씹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영삼의 약효가 그녀의 구강을 마비시키고 목구멍을 얼려버릴 듯한 고통을 주었지만, 하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삼을 미세하고 따뜻한 약즙의 형태로 씹어 넘긴 뒤, 천천히 한시우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이윽고, 설하율의 붉은 입술이 한시우의 메마르고 차가운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흡…….”


방 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야설화와 염초아의 눈동자가 질투와 경악으로 부르르 떨렸지만, 그 누구도 하율을 말릴 수 없었다. 지금은 스승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설하율은 자신의 따뜻한 타액과 함께 씹어낸 설산빙삼의 정수를 한시우의 입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동시에 자신의 빙백도심융합결의 온기를 그의 목구멍으로 불어넣어, 약즙이 막힌 기도를 넘어 식도로 흘러내려 가도록 유도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은밀한 접촉 속에서, 하율의 뜨거운 눈물이 한시우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 제발 눈을 떠주세요, 스승님…….’


그녀의 간절한 영혼의 외침이 영혼 공명(Soul Resonance)의 붉은 실을 타고 한시우의 멈춰진 심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꿀꺽.


마침내 한시우의 목울대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영삼의 정수를 삼켜냈다.


두근.


기적과도 같이, 한시우의 가슴팍에서 아주 작고 희미한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가 제자들의 애절한 온기와 설산빙삼의 영험한 약효를 받아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하아…….”


설하율이 입술을 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입술 끝에 묻은 영삼의 푸른 약즙과 한시우의 붉은 피가 묘하게 섞여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시우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비록 의식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호흡은 한층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살려낸 대가로 제자들은 단전의 진기를 대부분 소모해 바닥에 주저앉았고, 한시우의 검은 머리카락 절반은 완벽하게 은빛 백발로 변해 침상 위로 흩어져 있었다.


설하율은 기력이 다해 비틀거리면서도, 한시우의 침상 곁으로 기어가 그의 은빛 백발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스승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과, 다시는 그를 잃지 않겠다는 무서운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


“저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마세요…… 제발 눈을 떠주세요.”


그녀의 애절한 흐느낌이 깊은 밤의 청운초당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스승을 살려냈다는 안도감 이면에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싹튼 비틀린 집착의 붉은 실이 한시우의 온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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