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폭풍, 얼어붙는 눈동자
학진 일당이 비명을 지르며 청운봉 아래로 도망친 직후, 청운초당의 앞마당은 쥐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부서진 목검 파편들과 짓밟힌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차가운 아침 바람이 쌩하니 불어왔다.
“스승님! 정신 차리십시오! 스승님!”
설하율의 절박한 비명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한시우의 상반신을 품에 안은 채, 떨리는 손으로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을 닦아냈다. 하율의 하얀 소매 자락이 순식간에 붉은 피로 얼룩졌다.
한시우의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기경팔맥이 완전히 파괴된 기경폐절(奇經閉絶)의 몸으로, 오직 검의 이치와 심안(Mind's Eye)에만 의존해 초일류에 준하는 학진을 제압한 대가는 참혹했다. 내력이 없는 단전이 강하게 공명하며 뒤틀려 버린 탓에, 심장 부근의 폐절된 경맥이 칼로 비비는 듯한 극통을 유발하고 있었다.
“스승님, 제발…… 눈을 떠보세요…….”
둘째 야설화가 무릎을 꿇으며 한시우의 차가워진 손을 움켜쥐었다. 언제나 요염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완전히 질려 있었고, 발끝에서 일렁이던 그림자 마기는 주인의 불안감을 대변하듯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뻗어 나갔다.
“독기가…… 내 독기 때문에 스승님이 더 다치시면 안 되는데…….”
셋째 염초아는 자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보랏빛 독기가 스승에게 해가 될까 봐, 감히 다가서지도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만독주머니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막내 독고란 역시 무표정한 얼굴 위로 맑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며, 부러진 철검을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안 된다…… 얘들아…….’
한시우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제자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이 흐릿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동자에 서린 극단적인 공포와 비틀린 독점욕의 싹이 심안을 통해 고스란히 읽혔다.
부모에게 오직 무공을 전수할 도구로만 여겨져 잔혹하게 학대받았던 소녀들이다. 자신을 지켜주던 유일한 빛인 스승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으니,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버림받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첫째, 설하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하율…… 아…….”
한시우가 가냘프게 이름을 부르는 순간, 설하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스사사사삭!
초당 마당의 흙바닥 위로 순식간에 하얀 서리가 덮이기 시작했다. 수련장 주변의 대나무 잎들이 차가운 냉기에 얼어붙어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하율의 투명하리만치 맑은 빙백의 눈동자가 서서히 핏빛처럼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체각성 1단계(Demonic Awakening Stage 1)의 징후였다.
어린 시절 친부 설무극에게 당했던 가혹한 한빙 고문의 기억, 그리고 스승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공포가 그녀의 단전 내부에 봉인되어 있던 빙백마기(Ice Demon Qi)를 강제로 깨워버린 것이다.
“스승님을 해치려는 자들은…… 정파든 마교든 전부 얼려 죽여버리겠어…….”
설하율의 은발 끝자락에서 푸른 성에가 휘날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을 잃고, 차가운 살의로 가득 찬 마성의 음성으로 변해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그녀의 자아는 마성에 잠식당해 파멸할 것이 분명했다.
‘하율이의 단전이 버티지 못해. 지금 당장 마기를 누르지 않으면 위험하다.’
한시우는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창백한 손가락이 설하율의 차가운 이마를 향해 뻗어 나갔다.
치이이익!
그녀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극음(極陰)의 한기가 한시우의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와 살을 얼려버릴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손끝이 단숨에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동상 상처가 새겨졌지만, 한시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따뜻한 눈빛으로 설하율을 바라보았다.
“하율아, 나를 보거라. 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혀라.”
“스, 스승님…… 하지만 제 손이…… 스승님을 얼려 죽이고 있어요…… 제발 저를 놓으세요……!”
설하율은 자신의 한기가 스승을 상처 입히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한시우는 동상으로 얼어붙어 가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녀의 이마를 단단히 붙잡았다.
동시에 그의 왼손이 품속으로 들어가 청운침통(Cheongun Needle Case)을 열었다. 한시우의 손가락이 침통 내부의 가장 예리하고 단단한 침, 주조 대가 철기우가 만년금강사를 도포해 특수 주조한 현철은침(Myriads Iron Silver Needle)을 한 대 뽑아냈다.
이침제마술(Acupuncture Demon Suppression)의 시전이었다.
한시우는 내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지만, 심안을 통해 설하율의 전신 경맥을 흐르는 붉은 마기의 맥점을 완벽하게 포착해 냈다. 그의 손끝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스윽, 탁!
첫 번째 현철은침이 설하율의 미간 중앙, 인당혈(印堂穴)에 정확히 박혔다.
“윽……!”
설하율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미간에 박힌 은침을 통해 한시우가 손끝으로 밀어 넣은 도가의 온기가 그녀의 뇌 속으로 침투했다. 폭주하려던 빙백마기가 이질적인 정화의 기운을 감지하고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은침의 끝부분이 파르르 떨리며 검붉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율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크기는 일류 수준을 가볍게 상회하고 있었기에, 내력이 없는 한시우의 육체는 그 반탄력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스승님! 제발 그만두십시오! 스승님의 몸이 부서집니다!”
야설화가 비명을 지르며 한시우의 도포 자락을 붙잡았으나, 한시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현철은침을 꺼내 하율의 아랫배, 단전의 입구인 기해혈(氣海穴)에 주저 없이 자침했다.
탁!
두 대의 은침이 박히는 순간, 설하율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폭발적인 한기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은침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철은침의 신성한 도금 성분이 마기를 흡수하여 흘려보내며, 뒤틀렸던 기맥의 흐름을 강제로 안정시켰다.
“하아…… 흑……!”
설하율의 눈동자에서 붉은 마기가 서서히 걷히며, 원래의 투명한 빙백빛 눈동자가 돌아왔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결과 함께 차가운 서리가 뿜어져 나왔다. 폭주하던 빙백신공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진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한시우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쿨럭……!”
한시우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붉은 선혈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단순한 각혈이 아니었다. 하율의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 자신의 미세한 영혼력과 체내의 온기를 무리하게 은침에 실어 보낸 탓에, 그의 손가락 끝은 완전히 검푸르게 얼어붙어 감각이 사라져 있었다. 전신의 맥박이 일시적으로 정지하듯 가슴이 조여왔다.
“스승님! 스승님!”
설하율은 이성을 되찾자마자 스승의 피 묻은 손과 검푸르게 변한 손가락을 보고 오열했다. 그녀는 주저 없이 한시우의 차가워진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감싸 쥐며 자신의 체온을 나누려 애썼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신 때문에 스승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공포, 그리고 그 공포가 만들어낸 비틀린 독점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설하율은 한시우의 도포 셔츠 자락을 찢어질 듯 꽉 쥐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가냘프게 속삭였다.
“스승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저를 두고 절대 마교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평생 스승님 곁에 묶여 살더라도…… 스승님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존경을 넘어선, 소름 끼치도록 맹목적인 애정과 집착이 서려 있었다. 한시우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지만, 단전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피로감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시우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수련장의 흙바닥이 아닌, 익숙한 청운초당(Cheongun Cottage)의 안방 침상 위였다. 은은한 약초 향이 코끝을 찔렀고, 머리맡에는 꼬죄죄한 옷차림의 늙은 의원이 술 냄새를 풍기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 미련한 녀석아! 내력이 한 푼도 없는 몸뚱이로 마교의 천생마체 기운을 직접 받아내다니, 제정신이냐? 조금만 늦었어도 전신 경맥이 얼어붙어 그대로 황천길로 갈 뻔했다!”
오의원(Oh Seon-sa)이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한시우의 검푸르게 얼어붙었던 손가락에 따뜻한 온양 약재를 바르고 정성스럽게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방 안의 구석에는 설하율과 야설화, 염초아, 독고란이 숨을 죽인 채 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설하율은 한시우가 눈을 뜨자마자 안도와 집착이 섞인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침상 위로 뛰어오를 듯이 몸을 들썩였다.
“오의원님…… 하율이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한시우는 자신의 몸보다 제자의 안위를 먼저 물었다. 오의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 염소수염을 씰룩였다.
“네놈 걱정이나 하거라! 그 마교 소저는 네놈이 목숨을 걸고 은침으로 맥점을 막아둔 덕에 마기가 일시적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야. 그녀의 단전 내부에 도는 극음(極陰)의 마기는 언제든지 다시 요동칠 수 있다.”
오의원은 목소리를 낮추며 한시우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녀의 한기를 근원적으로 억제하고 정화하려면, 극양(極陽)의 성질을 지닌 약재로 음양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청운봉과 청성파 영지의 경계선인 볕이 잘 드는 암벽 지대에 자생하는 구양정화초(Nine-Yang Purifying Herb)가 필요해. 하지만 그곳은 청성파의 삼엄한 감시망이 미치는 구역이다. 무공도 없는 네 몸으로 그 약초를 구하러 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라.”
한시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청성파의 영지 경계선. 그곳에 설하율을 구할 구양정화초가 있다면,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되든 가야만 했다. 조덕필과 조충의 음모가 청운봉을 옥죄어 오는 상황에서, 제자의 폭주를 막는 것만이 그들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시우는 이불 밑으로 주먹을 꽉 쥐며, 조용히 다가올 폭풍을 대비해 지략의 판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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