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내린 기슭, 그림자의 단죄
청운초당(淸雲草당)의 밤은 낮보다 깊고 고요했다. 밤안개가 대나무 숲을 집어삼킬 듯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시각, 한시우는 서재의 낡은 등잔 밑에서 조용히 손목의 붕대를 감아쥐었다. 자갈밭에 쓸렸던 손목의 찰과상이 욱신거렸고, 파괴된 단전에서는 이따금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기어 올라왔다.
“스승님, 아직도 주무시지 않고 계십니까.”
문이 조용히 열리며 첫째 제자 설하율이 차가운 한기를 품은 채 들어왔다. 그녀의 은발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지만, 투명한 빙백의 눈동자에는 낮에 보았던 스승의 상처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서려 있었다.
“하율이로구나. 가벼운 찰과상일 뿐이니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한시우가 온화하게 웃으며 소매를 내렸지만, 하율은 그의 창백한 안색과 입술에 남은 미세한 핏자국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낮게 읊조렸다.
“그 청성파의 개새끼가 스승님의 몸에 손을 대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당장 내려가 그 검문소를 피바다로 만들게 해주십시오.”
“하율아.”
한시우의 나직하지만 엄격한 목소리가 서재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우리가 이곳에 은거하는 이유를 잊었느냐. 너희의 정체가 무림맹이나 청성파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청운봉은 더 이상 너희의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사를 그르치지 말거라.”
설하율은 스승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고개를 숙였지만, 주먹을 쥔 그녀의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시우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방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한시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는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내력은 한 푼도 쓸 수 없었지만, 그의 영혼이 도달한 초감각인 심안(Mind's Eye)을 크게 열었다. 초당 주변 반경 수리의 기 흐름이 그의 머릿속에 입체적인 수묵화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심안의 영역 끝자락, 초당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극도로 은밀하고 차가운 어둠의 기운이 포착되었다. 둘째 야설화였다. 그녀가 품은 암영마기(Dark Shadow)가 질투와 분노를 자극받아 기괴하게 요동치며 산 아래를 향해 빠르게 하산하고 있었다.
야설화는 낮에 한시우가 오무에게 핍박받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장본인이었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와 결핍을 품은 그녀에게, 스승의 부상은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미칠 듯한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잔혹한 살의로 변질되어 폭주하고 있었다.
‘설화가 결국 오무를 죽이러 가는군.’
한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설화가 익힌 암영환무공(Dark Shadow Phantom Step)은 어둠 속에서 신형을 완벽히 감추는 비정하고 은밀한 보법이었다. 절정 상위 경지에 이른 그녀의 암살 기술인 암영습살(Shadow Ambush)이라면, 술에 취해 잠든 이류 무사 오무의 목을 베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터였다.
하지만 오무가 죽는다면 청성파 장로 조덕필은 이를 빌미로 청운봉 전체를 샅샅이 수색할 군대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제자들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내가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한시우는 품속에 청운침통을 챙겨 넣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기경폐절 상태의 육체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내력 대신 오직 신체의 무게 중심 이동과 보폭의 완벽한 기하학적 변화만으로 상대방의 시각적 착시를 유도하는 환영보법(Illusionary Footwork)을 전개했다.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하고도 우아한 신형이 어둠을 가르며 산길을 타고 내려갔다.
* * *
청운봉 기슭 마을의 초라한 주막 뒤편, 오무의 임시 거처는 술 냄새와 코골이 소리로 가득했다.
“으음…… 흐어어어어.”
오무는 낮에 한시우에게서 갈취한 은화들을 침상 머리맡에 둔 채, 만취하여 대자로 뻗어 잠들어 있었다. 그의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조잡한 기운은 경계심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방 안의 촛불이 흐릿하게 흔들리던 그 순간, 바닥에 드리워진 오무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솟아오른 야설화의 신형이 침상 옆에 우뚝 섰다. 그녀의 요염한 고양이 같은 눈동자는 완전히 칠흑빛 마기로 뒤덮여 이성을 잃은 살인 병기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을…… 다치게 한 벌이다.”
야설화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암영의 검은 기운이 날카로운 단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암영습살(Shadow Ambush). 어둠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의 목덜미를 끊어버리는 비정한 살수가 오무의 목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히던 찰나였다.
쉬이익!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맑은 바람 소리와 함께, 야설화의 백은빛 단검 경로 위로 하얀 도포 자락이 스며들었다.
“……!”
야설화는 경악했다. 자신의 칼날이 닿기 직전, 아무런 내력의 파동도 없이 공간을 접어 나타난 것처럼 한 사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한시우였다.
그는 환영보법의 극의를 펼쳐 찰나의 순간에 오무와 야설화 사이의 사각지대에 끼어들었다. 한시우는 내력 한 푼 없는 맨손의 손가락 끝으로 야설화의 손목 관절 맥점을 가볍게 튕겨냈다. 완벽한 힘의 작용점을 짚어낸 일격에, 야설화의 날카로운 암영 단검이 소리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스, 스승님……? 어째서 이곳에……!”
야설화가 놀라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와 당혹감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시우는 대답하는 대신 가슴을 움켜쥐며 컥, 하고 무거운 기침을 토해냈다. 기경폐절의 몸으로 내공의 보조 없이 무리하게 환영보법을 전개한 대가였다. 그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다시 한번 주르륵 흘러내려 하얀 도포를 적셨다.
“아…… 아아! 스승님!”
자신 때문에 스승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야설화의 머릿속이 하얗게 번져갔다. 그녀의 단전 속 암영마기가 죄책감과 공포로 인해 더욱 광폭하게 폭주하려 했다.
“스승님! 비켜서십시오! 저자가 스승님을 다치게 했습니다! 제게 온기를 준 유일한 분을 핍박했습니다! 저자의 목을 베어 스승님의 발밑에 바치게 해주십시오!”
야설화가 울부짖으며 다시 그림자를 뻗으려 했다. 그녀의 어두운 상처, 부모에게 오직 무공의 도구로 버림받고 학대당했던 과거의 기억이 폭주하며 살의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한시우가 한 발짝 걸어 나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텁.
차가운 암영의 기운으로 뒤덮여 바르르 떨고 있던 야설화의 육신에 한시우의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시우는 피 묻은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고, 그녀의 귀밑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설화야, 진정하거라. 스승은 괜찮다.”
“하지만…… 하지만 저자가 스승님을 다치게 했습니다…… 저는 스승님이 아픈 것이 싫습니다. 저를 두고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싫습니다!”
야설화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평소의 요염하고 장난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에 한시우는 가슴이 아려왔다.
한시우는 품속에서 청운침통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은침이 아닌,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스승의 온기어린 확신이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인은 해결책이 아니다. 네 손에 피를 묻히는 순간, 청성파의 추적이 시작될 것이고 우리는 이 청운봉을 떠나야 한다. 내가 너희를 두고 어디로 가겠느냐. 나를 믿어라.”
“스승님…… 정말로 저를 버리지 않으실 건가요?”
“약속하마. 스승은 언제나 이곳에서 너희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저 오무라는 소인배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스스로 몰락하게 만들 계책을 이미 준비해 두었으니, 내 가르침을 따르거라.”
한시우의 흔들림 없는 깊은 눈빛과 따뜻한 품 안에서, 야설화를 지배하던 광폭한 암영마기가 거짓말처럼 맑은 천지정기로 정화되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설화는 스승의 넓은 가슴 팍에 뺨을 비비며 눈물을 닦아냈다. 따뜻했다. 가문에서 오직 살인 병기로 길러지며 채찍질당했던 등 뒤의 흉터들이 스승의 온기 속에서 씻겨 내려가는 듯한 구원의 감각이었다.
하지만 정화의 기운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수록,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던 집착은 더욱 기괴하고 거대한 독점욕으로 진화해 가고 있었다.
‘아아…… 스승님. 나의 구원자, 나의 전부.’
야설화는 한시우의 품에 안긴 채, 그가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붉게 일렁이는 눈동자로 오무가 잠든 침상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스승님이 피를 흘리시는 것은 단 한 번으로 족해요. 만약 세상이 당신을 해치려 한다면…… 차라리 내가 당신의 사지를 묶어 아무도 모르는 깊은 동굴 속에 가두어 두겠어요. 평생 내 품 안에서만 숨 쉬고, 나만을 바라보며 안전할 수 있도록.’
그녀의 눈빛에 서린 집착은 구원을 넘어선 무서운 소유욕의 서막이었다. 한시우는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그저 정화의 여파라 생각하며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주막을 빠져나와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은 청운초당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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