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고의 거래, 그림자 속에서 뻗어 나오는 손길
야설화의 발끝에서 뻗어 나온 칠흑 같은 그림자가 설지화의 붉은 도포 자락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하 암시장의 은밀한 밀실을 가득 채운 붉은 등불의 잔영 속에서, 야설화가 내뿜는 암영마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고 무거웠다. 그녀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오직 스승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불안감과, 감히 스승의 몸에 손을 댄 설지화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는 잔혹한 살의만이 가득 차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염초아 역시 허리춤의 만독주머니를 움켜쥔 채, 손끝에서 보랏빛 독기를 아지랑이처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일촉즉발. 당장이라도 두 송이의 잔혹한 마교 가시꽃들이 설지화의 목을 베어버릴 듯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그 폭풍의 중심에 선 한시우는 언제나처럼 초연했다.
한시우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자신의 도포 자락을 붙잡고 부르르 떨고 있는 야설화의 차가운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기경폐절 상태의 쇠약한 몸이었기에 그의 손길에는 아무런 내력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온기만큼은 야설화의 뒤틀린 심상을 파고들기에 충분했다.
“설화야, 진정하거라. 이 스승이 여기 있지 않느냐.”
그의 나직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밀실의 무거운 공기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찰나, 설지화의 붉은 도포를 집어삼키려던 칠흑 같은 그림자가 짓눌린 듯 멈칫했다. 야설화는 스승의 따뜻한 손길이 자신의 손등을 덮어오는 것을 느끼자마자, 온몸을 지배하던 광기 어린 살기를 거짓말처럼 걷어냈다. 그녀의 붉게 물들어가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맑은 칠흑빛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스승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스승님…… 저 여우 같은 년이 감히 스승님의 몸에 손을 댔는걸요. 제 어둠으로 저년의 손가락을 전부 녹여버리고 싶어요……”
“초아 너도 독기를 거두거라. 스승은 아무렇지도 않다.”
한시우가 고개를 돌려 염초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타이르자, 염초아 역시 입술을 깨물며 보랏빛 독안개를 만독주머니 속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스승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두 마교의 딸들이 보여주는 이 비정상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지켜보던 설지화의 눈동자가 깊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곰방대를 입에서 떼어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비록 요염한 미소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 야설화가 뿜어낸 기운은 명백히 절정 상위 경지의 암영마기였고, 염초아의 독기 역시 일개 약초꾼의 제자라기엔 너무도 패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대단한 지배력이구려. 내력 한 푼 없는 병약한 서생이, 이토록 사나운 가시꽃들을 손짓 한 번으로 길들이다니 말이요.”
설지화는 붉은 도포 자락을 매끄럽게 정리하며 한시우를 향해 깊은 흥미를 보였다. 한시우가 자신의 극비 지병인 ‘뒤틀린 음기’를 단숨에 간파한 것도 모자라, 이 무시무시한 소녀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모습은 그녀에게 거대한 경외감을 심어주었다.
“행수님, 농은 그쯤 해두시고 거래의 구체적인 조건을 말씀해 주시지요.”
한시우가 담담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의 절반쯤 은빛 백발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붉은 등불 아래에서 신비롭게 빛났다.
설지화는 나른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급하긴. 자네가 원하는 고대 무형검의 자루는 이 지하 암시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하 암시장 비고’에 보관되어 있네. 삼중 철문으로 봉인된 아주 안전한 금고지. 하지만 최근 그 비고 내부에 정체 모를 마기(魔氣) 결계가 흘러들어와 금고 전체를 잠식해 버렸네.”
“마기 결계 말입니까?”
한시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네. 우리 암시장의 초절정 고수 무사들도 그 결계에 접근하기만 하면 온몸의 기혈이 뒤틀려 피를 토하고 쓰러지더군. 자네의 그 신통방통한 경맥 진단 능력과 침술이라면, 그 마기 결계의 흐름을 읽고 파훼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거래를 제안하는 걸세. 어떤가? 결계를 해결해 주면, 무형검의 자루를 자네에게 양도하겠네.”
한시우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기경폐절 상태인 자신이 직접 내력을 쓸 수는 없지만, 심안(Mind's Eye)을 활용한다면 마기의 흐름과 맥점을 짚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옆에는 어둠의 마기를 다루는 야설화와 독기를 제어하는 염초아가 있으니, 그녀들의 힘을 빌려 결계의 핵을 파괴하면 될 터였다. 무엇보다 야설화의 마성을 영구히 정화하기 위해서는 그 무형의 그릇이 반드시 필요했다.
“좋습니다. 거래를 수용하지요. 지금 당장 비고로 안내해 주십시오.”
“어머, 결단력도 마음에 드는 서생이구려.”
설지화가 요염하게 웃으며 밀실 벽면의 비밀 장치를 눌렀다. 웅장한 돌문이 스르륵 열리며, 비고로 향하는 어둡고 깊은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시우 일행이 설지화의 안내를 받으며 어두운 통로로 발을 들였을 때였다.
갑자기 한시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치솟았다. 과거 설하율을 정화할 때 새겨진 심장의 마기 흉터가 지하의 음기에 반응해 요동친 것이다. 게다가 야설화의 마기를 진정시키느라 역류했던 검푸른 독기 상처가 남은 손가락 끝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윽……”
한시우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자, 야설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부축했다.
“스승님! 또 가슴이 아프신 건가요? 제 손끝의 독기가 역류해서 생긴 상처 때문에……”
야설화는 한시우의 검푸르게 변색된 손가락을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스승이 자신 때문에 다치고 백발이 되었다는 깊은 죄책감과 함께, 스승을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 가두어 평생 자신만 보살피고 싶다는 비틀린 소유욕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괜찮다, 설화야. 그저 지하의 공기가 조금 차가울 뿐이다.”
한시우가 담담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자, 야설화는 부끄러운 듯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더욱 밀착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염초아가 질투 어린 시선으로 으르렁거렸지만, 한시우는 초아의 손도 부드럽게 잡아주며 그녀들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그들이 비고 입구의 웅장한 삼중 철문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그들이 걸어온 지하 통로 입구 쪽에서 자욱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지하 암시장 경비 무사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무슨 일이냐!”
설지화의 얼굴에서 요염함이 싹 가시고 차가운 지배자의 안광이 빛났다. 그녀가 소리치기도 전에, 검은 안개 속에서 수십 명의 날렵한 인영들이 삼엄한 경비망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비고 앞마당으로 난입했다.
그들은 칠흑 같은 가죽 옷을 입고 검은 붕대로 얼굴을 가린, 마교 암영전(Dark Shadow Hall)의 정예 살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살수들의 중심에서, 매혹적이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잔혹한 미소를 지은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보랏빛 전신 가죽 옷을 타이트하게 걸치고, 손에는 가시가 돋친 붉은 독사 가죽 채찍(Poisonous Snake Leather Whip)을 쥐고 있는 여인. 그녀의 등장에 야설화의 전신이 찰나의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야설화의 이복언니이자, 과거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고문과 학대를 가했던 잔혹한 여마두, 야벽선(Ya Byeok-seon)이었다.
야벽선은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비틀며 채찍을 바닥에 가볍게 내리쳤다.
찰싹!
날카로운 파공음이 비고의 돌벽을 울렸다.
“어머나, 도망친 우리 가문의 예쁜 노예년 냄새를 맡고 지하 시궁창까지 내려왔더니…… 역시나 여기 숨어 있었구나, 설화야.”
야벽선의 사디스트적인 안광이 야설화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그녀는 채찍 끝을 야설화의 얼굴을 향해 겨누며 비열하게 웃었다.
“네년이 감히 가문의 비밀 경로가 담긴 암영사신도(Dark Shadow Map)를 훔쳐 달아나더니, 이런 하찮은 폐물 서생의 품속에서 재롱을 떨고 있었을 줄이야. 아버님께서 매우 노하셨단다. 당장 그 지도를 내놓고 내 발밑으로 기어와 채찍을 맞지 않는다면, 네년의 그 고운 비단 옷을 찢어발기고 등 가죽에 새겨진 고문 흉터(Hidden Torture Scars)를 이 지하 암시장 놈들 모두에게 구경시켜 주마.”
야벽선이 채찍을 허공에 크게 휘두르며 야설화의 이름을 사납게 부르짖었다.
그 날카로운 채찍 소리와 비정한 독설이 밀실에 울려 퍼지는 순간, 야설화의 눈동자에서 맑은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린 시절, 어두운 밀실에 갇혀 야벽선에게 밤낮으로 채찍질을 당하며 마공 주입 시험체로 학대당했던 끔찍한 기억. 비단 옷 속에 숨겨진 등 전체의 고문 흉터들이 마치 불에 타오르는 듯한 극심한 환각 통증이 그녀의 뇌리를 사정없이 후벼 팠다.
“아…… 아아…… 싫어…… 오지 마……”
야설화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극단적인 공포와 트라우마에 휩싸여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단전 속 암영마기가 공포와 분노로 뒤섞여 기괴하게 요동치며 사방의 바닥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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