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붉은 등불, 성숙한 뱀의 유혹
염초아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려던 보랏빛 독기가 한시우의 단호한 전음 한 마디에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초아야, 가만히 있거라. 이 스승의 말을 믿어라.’
귓가를 부드럽게 울리는 나직하고도 따뜻한 전음에 염초아의 전신이 단숨에 굳어졌다. 폭주하기 직전이던 만독마공(萬毒魔功)의 탁한 기운이 그녀의 단전 속으로 억지로 밀려 들어갔다. 초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으로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가녀린 청색 도포의 어깨 너머로, 사천당가(Sacheon Tang Clan) 제일의 젊은 독공 천재 당철우가 한시우의 멱살을 움켜쥔 채 살벌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당철우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독기가 한시우의 목덜미를 스쳤으나, 시우의 몸속에 흐르는 고대 신선의 피는 그 독성을 아무런 반응 없이 고요하게 흘려보냈다. 한시우는 기경폐절(Meridian Rupture)의 가슴 통증을 참아내며, 머리카락 절반이 은빛 백발(Silver-white Hair)로 변해버린 수려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
“사천당가의 천재께서 이런 초라한 주막의 밀실까지 찾아오시다니 영광이군요. 하지만 당가의 비전 침술과 독경을 익히셨으면서, 정작 자연의 순리와 약재의 부패조차 구분하지 못하시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뭐라? 이 폐물 서생 놈이 감히 당가의 독술을 논하는 거냐?”
당철우의 눈매가 사납게 찌푸려졌다. 한시우는 심안(Mind's Eye)과 약초 감별안(Herb Discernment)을 동시에 가동하여, 당철우가 쥐고 있는 은빛 나침반의 미세한 기운 흐름을 완벽히 파악했다.
“당가독경 제삼 장에 이르기를, ‘음성 기운이 극에 달한 독은 대기 중의 습기와 만나면 자색의 기류를 형성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소협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자색 기류는 만독의 기운이 아닙니다. 이 주막 화로에서 타오르는 부패한 지치 뿌리의 음기와 축축한 유황 가루가 만나 일어난 단순한 화학적 부패 반응일 뿐이지요. 당가의 정밀한 탐지기가 이 하찮은 썩은 내음에 교란당해 길을 잃은 것도 모른 채, 엉뚱한 약초꾼을 겁박하고 계시다니…… 참으로 가소롭지 않습니까?”
“이, 이놈이……!”
당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었다. 한시우가 제시한 당가독경의 구절과 약재 배합 이론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했기에, 독공에 미친 천재인 당철우로서는 반박할 말조차 찾지 못했다. 자신의 지식이 하찮은 폐물 서생에게 농락당했다는 굴욕감이 그의 오만한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 순간, 주막 밖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소걸이 이끄는 개방의 거지들이 밖에서 당가 무사들과 시비를 붙이며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어허! 당가 놈들이 평민의 주막을 무단으로 수색하다니, 무림맹이 이를 안다면 가만히 있겠느냐!”
당철우가 밖의 소란에 한눈을 판 찰나, 한시우는 뒤에 서 있던 야설화와 염초아에게 신속하게 눈짓을 보냈다. 야설화는 즉시 암영환무공을 전개하여 그림자 장막으로 자신들의 기척을 완전히 지웠고, 한시우는 소걸이 미리 일러둔 병풍 뒤의 비밀 통로를 열어 제자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버려진 광산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지하 암시장 입구(Black Market Entrance)는 삼엄한 철갑 경비 무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한시우는 소걸에게 받았던 검은 철제 출입패를 제시했다. 경비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굳게 닫힌 웅장한 철문을 열어주었다.
철문이 열리자, 지상의 무림과는 전혀 다른 어둠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에 흐릿한 붉은 등불(Red Lanterns)이 일렁이며 묘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온갖 희귀한 영약, 금지된 암기, 그리고 정사와 마도를 가리지 않는 불법적인 기물들이 은밀하게 거래되는 혼돈의 장소였다. 기경폐절 상태인 한시우는 가슴의 마기 흉터 통증을 억누르며, 제자들의 호위를 받아 암시장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화려한 비단 장막의 상단 건물로 인도되었다. 그곳이 바로 이 거대한 지하 세계를 지배하는 매혹적인 여주인, 설지화의 거처였다.
비단 장막이 서서히 걷히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붉은 비단 도포를 걸치고 곰방대를 입에 문 채, 나른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그녀가 바로 지하 암시장의 지배자 설지화였다.
설지화는 요염한 눈웃음을 지으며 곰방대 연기를 가볍게 뿜어냈다. 그녀의 예리한 시선이 한시우 일행에게 머물렀다. 특히 한시우의 절반쯤 변해버린 은빛 백발과 창백하지만 독보적으로 수려한 이목구비에 그녀의 안광이 묘하게 반짝였다.
“어머나, 소걸 소협이 대단한 귀빈을 보낸다고 하더니……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서생이 왔구려.”
설지화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한시우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은 비단 도포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성숙하고 요염한 자태가 밀실 안의 공기를 달구었다. 그녀는 한시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이상하네. 겉보기에는 전설적인 검선의 기품을 지녔으면서, 단전은 완전히 깨져 기경팔맥이 조각난 상태라니…… 그런 몸으로 이 험한 지하 세계에는 어찌 발을 들였을꼬? 귀여운 아가씨 둘을 호위로 거느리고 말이요.”
그녀의 시선이 한시우의 뒤에 서 있는 야설화와 염초아에게 닿았다. 두 제자는 이미 설지화의 노골적인 시선과 태도에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진 상태였다. 야설화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어둠의 기운이 꿈틀거렸으나, 한시우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제지했다.
한시우는 흔들림 없이 설지화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심안(Mind's Eye)을 발동했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 너머로 설지화의 전신 기맥 흐름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그녀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경맥의 약점이 포착되었다.
“기경팔맥이 깨진 몸이라 할지라도, 행수님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뒤틀린 음기(Twisted Yin Qi)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시우의 나직한 목소리에 설지화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매일 밤 자시(子時)가 되면 명치끝부터 시작되는 극심한 오한과 통증에 시달리시겠군요. 음기를 다스리는 만화귀원결을 수련하셨으나, 단전의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기맥이 뒤틀려 있으니…… 최근에는 손끝이 마비되는 증상까지 시작되었을 텐데요.”
설지화의 곰방대를 쥐고 있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요염했던 눈빛이 순식간에 경악과 충격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지병은 가문의 극비이자 암시장 내부에서도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단순한 약초꾼이 아니로군.”
설지화는 곰방대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한시우에게 바짝 밀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성숙한 분향이 한시우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한시우의 창백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가냘픈 손가락을 뻗어 한시우의 턱을 살짝 어루만졌다.
“어머, 정말 신통한 요물이야. 이 누님의 비밀을 단숨에 꿰뚫어 보다니…… 아주 흥미로워.”
그녀가 한시우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요염하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 지병을 고칠 비법을 알려준다면, 자네가 원하는 고대 무형검의 자루(Ancient Formless Sword Hilt)를 기꺼이 넘겨줄 수도 있는데…… 어때?”
그 순간, 밀실 내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앉았다.
설지화의 손가락이 한시우의 턱에 닿고, 요염한 숨결이 그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야설화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심연으로 물들었다.
스릉.
보이지 않는 어둠의 그림자가 야설화의 발끝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사방의 벽면을 타고 빠르게 뻗어 나갔다. 그녀의 단전 속에 잠자고 있던 암영마기가 질투와 분노를 자극받아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야설화의 질투 폭주(Ya Seol-hwa's jealousy explosion)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 손…… 당장 치우는 게 좋을 거야. 그 더러운 손가락으로 우리 스승님을 한 번만 더 만졌다간, 네년의 팔목을 통째로 그림자 속에 묻어버릴 테니까.”
야설화의 목소리는 평소의 장난기 넘치던 요염함이 완전히 거세된 채,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마성의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염초아 역시 허리춤의 만독주머니를 꽉 쥐며, 손끝에서 보랏빛 독기를 미세하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 또한 설지화를 당장 녹여 없애버리겠다는 듯이 번뜩였다.
지하 암시장의 붉은 등불 아래, 성숙한 지배자의 유혹과 제자들의 폭발적인 독점욕이 뒤섞여 밀실 안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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