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파의 검수, 안개 속의 대치
야설화의 떨리는 손길을 따뜻하게 감싸 쥔 한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려는 찰나, 초당 마당 너머 대나무 숲 장막에서 불길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컥, 서걱.
그것은 정렬된 무인들이 무기를 지닌 채 숲을 헤치고 나아갈 때만 발생하는 기분 나쁜 마찰음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뚫고 전해지는 살기 어린 기척에 야설화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칠흑빛 암영마기로 일렁였다.
“스승님, 쥐새끼들이 왔어요.”
야설화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가라앉았다.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피어오른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초당의 바닥을 잠식하려 했다. 스승을 해치려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이 어둠 속에 묻어버리겠다는 저돌적인 독점욕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진정하거라, 설화야.”
한시우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쥐어눌렀다. 야설화의 손목 신문혈을 짚은 손길에는 내력이 단 한 푼도 실려 있지 않았으나, 기맥의 흐름을 완벽히 읽어내는 그의 안목 덕분에 요동치던 그림자 마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 순간, 한시우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찌릿하게 밀려오는 극심한 오한을 느꼈다. 어젯밤 야설화의 폭주를 임시로 막아서는 과정에서 그녀의 체내에 고여 있던 암영의 독기가 그의 손끝으로 역류한 탓이었다. 손가락 끝은 여전히 검푸르게 물든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심장 부근에 새겨진 검푸른 마기의 흉터가 설하율의 불안한 심상과 공명하며 욱신거리는 통증을 더했다.
“컥…….”
한시우가 나직한 기침을 뱉으며 입가를 가렸다. 소매 끝에 묻어나는 희미한 선혈을 야설화가 보지 못하도록 재빨리 가린 그는 깊고 맑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율이와 초아, 그리고 란이를 데리고 방 안에서 대기하거라. 스승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밖으로 나와선 안 된다.”
“하지만 스승님, 그들의 기세는 만만치 않아요. 청성파의 검수들이 분명해요. 무공도 없는 스승님을 혼자 둘 순 없어요! 차라리 제 어둠으로 그들을 감싸 안아 흔적도 없이…….”
“설화야.”
한시우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스승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의 절반쯤 은빛 백발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아침 안개 속에서 쓸쓸하면서도 고결하게 흔들렸다.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수명과 영혼력을 바친 흔적이었다. 야설화는 그 백발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죄책감과 애절함에 휩싸여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스승님의 뜻대로 할게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전 세상을 다 불태워서라도 스승님을 지킬 거예요.”
야설화가 그림자 속으로 신형을 감추며 사라지자, 한시우는 안방 구석의 비밀 통로를 통해 지하 밀실로 향했다.
지하 밀실의 중앙에는 청운초당의 기문방어진을 제어하는 오행진결반(Five-Elements Formation Plate)이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시우는 창백한 손가락을 뻗어 나무로 된 정밀한 회전판의 눈금을 미세하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드르륵, 탁.
내력이 전혀 없는 몸이었기에, 그는 오직 손가락 끝의 감각과 심안(Mind's Eye)에만 의지해 진법의 흐름을 조율해야 했다. 조율이 시작되자마자 단전 내부가 찢어지는 듯한 두통과 가슴의 통증이 몰려왔다. 그는 이빨을 악물며 품속에서 청운 은화를 꺼내 진법의 동력원인 영석 홈에 밀어 넣었다.
위이이잉.
오행진결반이 맑은 소리를 내며 회전하자, 청운초당을 둘러싸고 있던 환영의 대나무 숲(Illusion Bamboo Forest)이 거대한 기운의 파동을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끼어 있던 안개가 비정상적으로 짙어지며 초당 주변을 완벽한 백색의 장막으로 덮어버렸다.
채비를 마친 한시우는 소박한 찻잔 하나를 들고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마당 중앙에 서서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려는 찰나, 자욱한 안개 장막을 찢으며 한 무리의 푸른 도포를 입은 검수들이 난입했다.
스사사사삭!
그들의 중심에는 청성파가 자랑하는 천재 검수이자 조덕필의 조카인 이소백(Lee So-baek)이 서 있었다. 날카롭고 매서운 눈매를 지닌 청년 검수인 그는 매화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청강검(Cheonggang Sword)을 손에 쥔 채, 초일류(Super First-Class) 하위 경지에 걸맞은 묵직한 기세(내력)를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네놈이 청운봉의 약초꾼, 한시우냐?”
이소백의 목소리에는 젊은 천재 특유의 오만함과 냉소적인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뒤로 열두 명의 청성파 순찰대 무사들이 삼엄한 포위망을 형성하며 한시우를 압박했다.
한시우는 찻잔을 든 채 가볍게 기침을 토해냈다.
“컥, 컥…… 본 도관의 아침은 고요한 편인데, 청성파의 귀한 검수께서 이토록 무례하게 난입하시니 당황스럽구려.”
“시끄럽다! 내 아우 조충이 이 봉우리에서 마교의 신표를 발견했고, 마교의 사악한 무리들에게 습격당해 오른팔을 잃었다. 관청과 무림맹의 이름으로 이 청운초당을 샅샅이 수색하겠다. 방해하는 자는 마교의 밀정으로 간주해 즉시 처단하겠다!”
이소백이 청강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살기를 폭발시켰다. 초일류 고수의 내력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마당의 자갈들이 가늘게 떨렸다. 일반적인 범인이라면 그 기세에 눌려 숨조차 쉬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을 터였다.
하지만 한시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은빛 백발만이 이소백의 기풍에 날려 우아하게 휘날릴 뿐이었다. 기경폐절 상태로 내력은 전혀 쓸 수 없었지만, 과거 정파 제일검 시절에 도달했던 초월적인 검선(劍仙)의 심상만큼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소백의 얄팍한 기세 따위는 그의 거대한 검리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수색이라…….”
한시우는 나직하게 미소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곳은 은사 무진선사께서 남기신 고요한 도관이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소문만으로 정파의 명문이라는 청성파가 사유지를 무단 침탈하려 드는가? 세상이 청성파의 위선을 알게 된다면 명예에 금이 갈 터인데.”
“닥쳐라! 하찮은 약초꾼 주제에 감히 청성파의 명예를 논해? 무사들은 들어라! 초당 안으로 진입해 모든 계집과 의심스러운 물건들을 확보하라!”
이소백의 명령에 두 명의 청성파 순찰대 무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초당 문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한시우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며 단지 발끝을 가볍게 놀려 마당의 흙바닥을 툭 찼다.
스스스스.
그 순간, 오행진결반과 연동되어 있던 환영의 대나무 숲이 기묘하게 진동했다. 초당 입구로 돌진하던 두 무사의 시야 앞으로 거대한 대나무 줄기들이 스스로 움직이듯 교차하며 자욱한 안개가 눈을 가렸다.
“엇? 이게 무슨……!”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으아악!”
두 무사는 단 세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기문진법이 만들어낸 공간의 착시와 환각에 휘말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들은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두르다 이내 스스로 대나무 기둥에 머리를 들이받고 바닥으로 뒹굴며 기절해 버렸다. 무력 사용 없이 적들의 선봉을 평화적으로 무력화시킨 지략의 결과였다.
“이, 이건 기문둔갑 진법……!”
이소백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하찮은 약초꾼의 거처라 생각했던 곳에 자신들조차 간파하기 힘든 고난도의 방어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평범한 약초꾼이 아니었군.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이 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이소백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받았음을 느끼고 직접 청강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검기가 꽃피우듯 피어올랐다. 청성파가 자랑하는 천재 검수답게, 그의 검 끝에서 피어나는 기운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청성파 비전, 매화십삼검(梅花十三劍)!”
이소백이 신형을 전개하며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수십 개의 푸른 검빛 매화가 피어나며 사방의 대나무들을 날카롭게 베어 넘겼다.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여 한시우를 기죽이고 진법의 기운을 강제로 흐트러뜨리려는 위협 시위였다.
슈우우욱! 파아앗!
검바람이 한시우의 낡은 도포 자락을 세차게 흔들었으나, 한시우는 그저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의 심안(Mind's Eye)은 이미 이소백이 펼친 매화십삼검의 모든 궤적과 내력의 흐름을 완벽하게 해체하여 읽어내고 있었다.
“화려하구려.”
한시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결처럼 부드러웠으나, 이소백의 귓가에는 천둥처럼 또렷하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매화가 너무 일찍 피어 뿌리가 부실하군.”
“무슨 망발이냐!”
이소백이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검을 멈췄다.
“매화십삼검은 청성파의 선조들께서 수백 년 동안 다듬어 온 천하의 비전이다! 내력 한 푼 없는 네놈이 감히 그 검리를 모독하는가!”
“검리(劍理)란 무기의 단단함이나 내력의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마음의 흐름에 있는 법이오.”
한시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소백의 청강검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리켰다. 그의 검푸르게 얼어붙은 손끝 상처가 달빛 아래 기묘하게 빛났다.
“그대가 방금 펼친 매화십삼검의 네 번째 초식에서 다섯 번째 초식으로 이어지는 찰나, 우측 갈비뼈 부근의 기혈 흐름이 미세하게 정체되는군. 검을 너무 빠르게 꺾으려다 몸의 순리를 거스른 탓이오. 만약 실전에서 나와 같은 검수를 만났다면, 그 정체의 순간 갈비뼈 사이로 칼날이 파고들어 심장을 꿰뚫었을 터요.”
“……!”
이소백의 안색이 순간 창백하게 질려갔다. 한시우가 지적한 결함은 그가 수련할 때마다 스스로 어렴풋이 느끼던 고질적인 한계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청성파의 그 어떤 장로도 잡아내지 못한, 오직 극의에 도달한 자만이 볼 수 있는 미세한 틈새였다.
“그뿐만이 아니오.”
한시우의 온화하면서도 냉철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홉 번째 초식인 ‘낙화유수’에서는 무게 중심이 반 보 정도 너무 앞으로 쏠려 있소. 하체가 불안정하니 상대가 대지를 가볍게 타격해 기운을 역류시키면 그대 스스로 검 기운에 휩쓸려 내상을 입게 되지. 그리고 마지막 매화가 만개하는 삼십육 장의 검로에서는…….”
한시우는 이소백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 같은 눈빛이었다.
“청성파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청정심결(淸淨心訣)의 맑은 마음 대신, 출세와 명예에 눈이 먼 가혹한 살기가 섞여 있구려. 이치와 어긋난 검은 그저 쇠붙이의 폭력일 뿐, 결코 절정의 경지에 닿을 수 없소.”
한시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소백의 뇌리를 망치로 때리듯 강타했다.
초식 무력화(Form Neutralization)의 극의가 담긴 이론적 파훼였다. 내력 한 푼 없는 병약한 백발의 사내가, 청성파가 자랑하는 천재 검수의 자부심이자 영혼인 검법을 단 몇 마디의 설전만으로 완전히 분쇄해 버린 것이다.
이소백은 전신을 엄습하는 지독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 자는 대체 누구지……?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내 검법의 사각지대와 경맥의 흐름을 이토록 완벽하게 꿰뚫어 본단 말인가?’
그가 아는 무림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반박귀진(返璞歸真)의 경지에 도달하여 자신의 모든 기운을 자연 속으로 숨겨버린 전설적인 신선이나 검성(劍聖)만이 가능한 신기였다.
이소백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쥔 청강검의 검날이 안개 속에서 미세한 마찰음을 내며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에 구축되어 있던 천재로서의 자만심과 자부심이, 한시우라는 거대한 검리의 벽 앞에서 산산조각 나며 심리적 공황 상태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대…… 정체가 무엇이냐? 정말 단순한 약초꾼이란 말이냐?”
이소백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검끝은 더 이상 한시우의 목덜미를 겨누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힘없이 처져 있었다.
한시우는 그저 말없이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음미한 뒤, 초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저 은거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는 보잘것없는 스승일 뿐이오. 청성파의 천재 검수께서 더 이상 무모한 피를 흘리지 않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바랄 뿐이지.”
이소백은 쓰러진 부하들을 힐끗 바라본 뒤, 떨리는 손으로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무력으로 이 봉우리를 수색하려 했다간, 자신을 포함한 순찰대 전체가 이 기묘한 진법과 정체불명의 검선(劍仙)의 손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하지만 조충의 고발이 거짓이 아니라면, 청성파는 정식으로 무림맹의 영장을 받아 다시 올 것이다.”
이소백은 애써 가문의 위엄을 가장하며 부하들을 부축해 안개 속으로 급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올 때와 달리 쫓기는 짐승처럼 다급하고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적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나무 숲이 다시 침묵에 잠기자, 한시우는 참았던 가혹한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컥……! 쿨럭!”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내력 없이 심안과 진법을 과도하게 운용한 대가로 파괴된 경맥이 격렬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했다.
“스승님!!”
그 순간, 초당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야설화와 염초아가 비명을 지르며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스승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과 사랑으로 가득 찬 제자들의 눈동자가, 피를 흘리는 한시우를 보며 다시 한번 광기 어린 연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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