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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어둠의 맥박, 스승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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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빙동락의 깊은 침묵을 깨고 동굴 입구 너머에서 야설화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기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초당 안방의 침상 위, 어둠은 깊었고 공기는 차가웠다. 기경폐절(Meridian Rupture)의 굴레에 묶인 한시우의 전신은 납을 매단 듯 무거웠다. 가슴팍에 새겨진 검푸른 마기 흉터가 설하율과의 영혼 공명(Dao-Heart Resonance)의 여파로 불을 지른 듯 화끈거렸다. 옆방에서 깊은 잠에 빠진 하율의 죄책감과 안도감이 영혼의 붉은 실을 타고 실시간으로 그의 심장을 찔러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윽……”


한시우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입가를 부여잡았다. 내력 한 푼 없는 몸으로 천도의 낙뢰를 견디고, 제자의 폭주를 잠재운 대가는 이토록 가혹했다. 창백한 그의 뺨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 순간, 침상 밑바닥의 짙은 어둠이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스사사사삭.


달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의 경계선에서 칠흑 같은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윽고 그 그림자 속에서 한 여인의 신형이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둘째 제자, 야설화(Ya Seol-hwa)였다.


그녀는 얇은 자색 도포만을 걸친 채, 요염하면서도 극도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흑발이 그녀의 창백한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붉은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


야설화의 목소리는 뱀의 부드러운 속삭임처럼 서늘하면서도 애절했다.


“하율 언니만 특별한가요? 언니는 스승님의 피를 마셨고, 머리카락을 은빛으로 물들였으며, 심장마저 하나로 묶였는데…… 저는요? 저는 여전히 스승님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실패작인가요?”


그녀의 등 뒤로 불길한 암영마기(Dark Shadow Qi)가 파도치듯 일렁이며 초당의 벽면을 잠식해 들어갔다. 어린 시절 친부 야적소에게 ‘버려진 도구’로 취급받았던 트라우마가, 설하율과 스승의 영적 결속을 목격한 순간 극단적인 소외감과 질투로 폭발한 것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그녀의 암영마체가 폭주하여 자아가 완전히 붕괴될 터였다.


한시우는 심안(Mind's Eye)을 가동했다. 그의 맑고 깊은 눈동자 너머로 야설화의 뒤틀린 경맥의 흐름이 입체적인 수묵화처럼 그려졌다. 암영마기가 그녀의 심맥을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설화야, 이리 오너라.”


한시우가 기침을 참아내며 창백한 손을 뻗었다.


“싫어요…… 만지지 마세요. 제 어둠은 더러워요. 언니의 깨끗한 빙결과 달라요. 스승님이 저를 가치 없다고 버리시기 전에, 차라리…… 차라리 제 어둠 속에 스승님을 영원히 가두어 두고 싶어요.”


야설화가 눈물을 흘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비틀린 소유욕과 감금의 열망이 초당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한시우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덥석.


기경폐절 상태의 몸이었지만, 심안으로 포착한 기맥의 약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한시우의 손길은 피할 수 없었다.


“으윽……!”


야설화의 몸이 찰나의 순간 경직되었다. 한시우는 다른 손으로 탁자 위의 청운침통(Cheongun Needle Case)을 열어 백은의 은침 한 대를 뽑아 들었다.


“가만히 있거라. 스승의 말을 들어야지.”


그는 야설화의 손목 신문혈에 침을 신속하게 자침했다. 침 끝을 통해 도심정화의 온화한 기운이 흘러들어가자, 요동치던 암영마기가 일시적으로 진정되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야설화의 체내에 고여 있던 미세한 어둠의 독기가 은침을 타고 한시우의 손끝으로 역류했다.


“컥……!”


한시우의 손가락 끝이 순식간에 검푸르게 변색되며 극심한 오한이 전신을 덮쳤다. 그는 이가 맞부딪히는 통증을 억누르며 억지로 각혈을 삼켜냈다. 제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는 스승의 처절한 헌신이었다.


야설화는 스승의 손가락이 검게 변한 것을 보고 경악하며 그의 품에 무너지듯 안겨 울부짖었다.


“아, 아아…… 스승님! 제가 또 스승님을 해쳤어요! 제 더러운 기운이 스승님을……!”


“바보 같은 녀석…… 내 걱정은 마라. 네가 무사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한시우는 검푸르게 물든 손으로 야설화의 칠흑 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에 야설화는 침상 밑에 엎드린 채 그의 도포 자락을 꼭 쥐고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깃든 맹목적인 집착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청운초당의 고요함을 깨고 괴짜 의원 오의원(Oh-uiwon)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늘 술 냄새와 약초 냄새를 풍기는 노인이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예리했다.


오의원은 침상에 누워 있는 한시우의 맥박을 짚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미련한 싹수 노란 놈아! 기경팔맥이 다 파괴되어 내력 한 푼 없는 몸으로 또 영혼을 불태운 게냐? 머리카락 절반이 백발이 된 것도 모자라, 손가락 끝에 암영의 독기까지 묻혀 오다니! 네놈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구나!”


오의원은 혀를 차며 한시우의 손가락에 해독 침을 놓고 약탕을 건넸다. 그리고 방 구석에서 묵묵히 한시우만을 노려보고 있는 야설화의 맥상을 짚었다. 노의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오의원은 한시우를 서재로 조용히 불러들였다.


“시우야, 둘째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단전 내부의 암영마기가 질투와 불안으로 인해 임계점을 넘어섰어. 임시방편으로 침을 놓아 눌러두었으나, 조만간 둑이 터지듯 폭주할 게다. 첫째 하율이처럼 영초로 정화하려 해도, 암영마기는 성질이 달라. 빛을 삼키고 숨는 성질이라 일반적인 약초로는 정화의 기운까지 삼켜버릴 게야.”


한시우는 서재 책상 위에 놓인 먼지 쌓인 가죽 고서, 무진선사의 비전서(Secret Manual of Mujin)를 펼쳤다. 은사 무진선사가 남긴 도심정화술의 상세한 구결을 심안으로 훑어내리던 한시우의 눈이 한 구절에 멈췄다.


‘극음의 마성이 어둠을 만나 요동칠 때, 억지로 누르려 하면 자아가 파멸하리라. 오직 형체가 없는 무형의 그릇(Formless Vessel)만이 그 거친 힘을 상처 없이 가두어 맑은 정도로 순화할 수 있느니라…….’


“무형의 그릇……”


한시우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지켜보던 오의원이 눈을 크게 뜨며 나직하게 탄식했다.


“무형의 그릇이라니…… 설마 무림 전설에 내려오는 ‘그것’을 말하는 게냐?”


“그것이 무엇입니까, 의원님?”


“과거 천계의 파편에서 떨어진 신철로 주조되었다는 전설의 보검…… 검신은 오래전에 파괴되어 사라졌으나, 오직 사용자의 의지만으로 형체 없는 검신을 만들어낸다는 고대 무형검의 자루(Ancient Formless Sword Hilt)다. 그 자루야말로 기운의 제약이 없으니, 설화 녀석의 암영마기를 영구히 가두어 정화할 최고의 무형의 그릇이지.”


“그 보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시우의 물음에 오의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정파와 마교의 눈이 닿지 않는 어둠의 나락…… 청운봉 기슭 마을 외곽의 버려진 광산 지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지하 암시장(Subterranean Black Market)에 잠들어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곳의 여주인 설지화가 자신의 비밀 비고에 보관하고 있다더군. 하지만 시우야, 네 몸은 기경폐절 상태다. 게다가 오른팔을 잃고 도망친 조충의 고발로 청성파 조덕필이 대규모 무사들을 모아 청운봉을 포위하려 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하산하는 것은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짓이다!”


오의원의 가혹한 경고가 서재의 공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기경폐절의 나약한 신체, 청성파의 삼엄한 감시망,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제자들의 마성 폭주. 모든 조건이 한시우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한시우는 조용히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자들이 마성에 잠식당해 파멸하는 것을 눈앞에서 방관하는 것은 스승의 도리가 아닙니다. 제가 거둔 제자들이니, 제 목숨을 깎아서라도 끝까지 바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한시우는 안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낡은 청색 도포를 여미며 하산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머리카락 절반을 물들인 은빛 백발이 창가로 스며든 아침 햇살을 받아 쓸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도포 자락을 접어 품속에 청운침통을 챙겨 넣으려는 바로 그 순간.


스사사삭.


초당 바닥을 가로질러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발끝까지 길게 뻗어왔다.


한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야설화가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스승이 자신을 두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불안감과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야설화는 Trembling하는 하얀 손가락을 뻗어 한시우의 낡은 도포 소매 끝자락을 거칠게 꽉 쥐었다.


“스승님…… 어디 가시려는 건가요? 저를 두고…… 하율 언니만 데리고 또 어딘가로 도망치려는 건가요? 제발……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스승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지옥 끝이라도 함께 가겠어요.”


그녀의 손끝에서 새어 나온 차가운 암영의 기운이 한시우의 소매를 검게 물들이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절망과 집착이 뒤섞인 둘째 제자의 애절한 속박이 한시우의 발걸음을 강하게 붙잡았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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