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실에 가려진 어둠, 싹트는 질투
지하 한빙동락(Subterranean Ice Cave)의 차디찬 공기가 허공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방을 둘러싼 영구적인 얼음 벽들은 희미한 금빛 정기와 푸른 빙백의 기운을 반사하며 기묘한 영롱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시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전신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 파괴된 단전과 경맥을 타고 밀려왔다. 기경팔맥이 완전히 폐절된 몸으로 금기된 진법인 사제공명진(Master-Disciple Resonance Array)을 펼치고 영혼의 힘을 소모한 대가는 가혹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은 곳에서 비린 혈향이 울컥 치밀었다.
“스승님…… 정신이 드십니까?”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의 차가운 얼음 같던 음성이 아니었다. 물기를 머금은 채 떨리는,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맹목적인 염원이 담긴 목소리.
한시우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앞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첫째 제자, 설하율(Seol Ha-yul)이 있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빙백의 눈동자는 이제 마성의 붉은빛을 완전히 지워내고 고요한 빙결의 이채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깊은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정화되기 전보다 훨씬 더 무겁고 끈적끈적했다.
“하율…… 아.”
한시우가 가냘프게 입술을 떼는 순간,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며 가혹한 통증이 몰려왔다.
“아윽……!”
동시에 설하율 역시 가슴을 움켜쥐며 나직한 신음을 뱉었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사람의 영혼이 영구적으로 연결되어 고통과 감정을 공유하게 된 영혼 공명의 영구적 구속력(Yin-Yang Soul Resonance)의 증거였다.
“스승님, 아프신가요? 제게…… 스승님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져요.”
설하율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시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은 더 이상 그를 얼려 죽일 듯한 살인적인 한기를 품고 있지 않았다. 빙청도심결(Ice-Pure Dao-Heart Art)로 정화된 맑고 서늘한 기운이 한시우의 창백한 피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한시우는 자신의 머리맡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았다. 칠흑 같던 머리칼의 절반이 완전히 은빛 백발(Silver-white Hair)로 변해 있었다. 제자의 마성을 억제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과 영혼력을 아낌없이 불태운 흔적이었다.
“내 걱정은 마라. 네 단전이 안정되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한시우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설하율의 눈동자에 서린 집착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그녀는 한시우의 마른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제게 정도(正道)의 무공을 가르쳐 주시며 말씀하셨지요. 검을 쓰는 자는 칼날이 아니라 그 칼날을 쥔 자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고. 이제 제 마음은 오직 스승님만을 향해 흐릅니다. 이 백발도, 심장의 흉터도 전부 저 때문에 생긴 징표이니…… 평생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아무 데도 가지 마세요, 스승님.”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죄책감과 함께, 스승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두어 영원히 독점하겠다는 비틀린 소유욕의 싹이 완벽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사제역전(Master-Disciple Reversal)의 비극적이면서도 달콤한 굴레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시우는 그녀의 맹목적인 눈빛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초연한 스승의 위엄을 유지하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당으로 가자.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
* * *
한빙동락의 무거운 철문을 열고 청운초당(Cheongun Cottage)의 안방으로 복귀한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었다.
서재 겸 거실의 촛불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둘째 야설화(Ya Seol-hwa), 셋째 염초아(Yeom Cho-ah), 막내 독고란(Dokgo Ran)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은 한빙동락에서 나오는 한시우와 설하율의 모습을 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정확히는, 한시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는 설하율의 손길과, 한시우의 머리카락 절반을 물들인 은빛 백발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스, 스승님……?”
염초아가 주황빛 머리칼을 쥔 채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만독마체(All-Poison Demonic Body)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보랏빛 독기가 불안감에 동요하며 대기 중에서 약하게 일렁였다.
“머리가…… 왜 그렇게 변하신 건가요? 어째서 언니와 그런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죠?”
독고란 역시 감정 없는 인형 같던 얼굴에 깊은 균열을 드러내며, 묵묵히 한시우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도포 소매 끝자락을 꽉 쥐었다.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스승을 향한 깊은 걱정과 경계심이 소리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둘째, 야설화였다.
스사사사사삭.
야설화의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나며 초당의 바닥을 잠식해 들어갔다. 칠흑 같은 흑발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요염한 눈동자가 짙은 불안감과 억눌린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율 언니.”
야설화의 목소리가 뱀처럼 서늘하게 서재의 공기를 찢었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스승님의 어깨에서 당장 손을 떼라고.”
그녀의 암영마기(Dark Shadow Qi)가 질투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을 자극받아 기괴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친부 야적소에게 ‘가치 없는 실패작’이라 불리며 어둠 속에 버려졌던 끔찍한 트라우마. 오직 스승 한시우의 다정한 손길만이 그녀를 그 지옥 같은 어둠에서 구원해 주었거늘, 지금 첫째 언니가 그 유일한 빛을 독점하려 하고 있었다.
설하율은 야설화의 살기 어린 경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한시우의 팔짱을 더욱 단단히 끼며, 차갑고 도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설화야? 스승님은 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과 생명력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이 은빛 머리카락도, 스승님의 심장에 새겨진 붉은 실도 전부 나와 영원히 연결된 증거란다. 너희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결속이지.”
“언니……!!”
야설화의 등 뒤로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암영환무공(Dark Shadow Phantom Step)의 기운이 폭주하듯 요동치며 초당 내부의 촛불들을 단숨에 꺼뜨려 버렸다. 서재 안은 순식간에 차가운 한기와 음산한 어둠의 기운이 충돌하는 폭풍의 한가운데로 변했다.
‘안 된다. 제자들 간의 균형이 무너지면, 설화의 마성마저 자극받아 폭주하게 된다.’
한시우는 심안(Mind's Eye)을 가동해 야설화의 단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질투와 소외감, 그리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의 암영마체를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 역시 자아를 잃고 폭주할 터였다.
한시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야설화의 앞으로 다가갔다. 기경폐절의 통증으로 인해 전신이 욱신거렸지만, 그는 온화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설화의 떨리는 손을 살며시 잡아 쥐었다.
“설화야, 내 눈을 보거라.”
“스, 스승님…….”
스승의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순간, 야설화의 몸을 감싸던 사나운 그림자 기운이 거짓말처럼 일시적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슬픔과 결핍은 지워지지 않았다.
“스승님은 하율 언니만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를…… 또 가치 없다고 버리실 건가요? 그 노란 여우년(주선아)에게 밀착하실 때도 참았는데, 이제는 하율 언니와 영혼까지 묶이시다니요…….”
그녀의 목소리는 애절하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의 독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스승님을 가두어 두고 싶어요. 그러면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평생 저만 바라봐 주실 테니까요.”
야설화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나직한 속삭임.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스승이 다치고 상처받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의 어둠 속에 영원히 감금하겠다는 비틀린 소유욕의 표출이었다.
한시우는 그녀의 집착 가득한 독백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제자들의 정화를 위해 영혼을 바친 행동이, 오히려 그녀들의 독점욕과 집착을 광기 어린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설화야, 나는 너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내게는 너희 네 명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제자들이란다.”
한시우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설하율의 매서운 눈초리와 야설화의 어두운 살기는 초당의 밤을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청운봉 기슭 아래 청성파(Cheongseong Sect)의 삼엄한 천막 내부.
“으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얼어 터진다! 아버님! 제발 이 저주를 풀어주십시오!”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청성파 분타의 조용한 밤공기를 난도질했다.
침상 위에는 청성파의 소가주이자 망나니인 조충(Jo Chung)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오른팔은 어깨부터 손끝까지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었고, 미세한 균열 사이로 차가운 서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하율의 폭주하는 빙백마기에 직격당해 경맥이 완전히 동사(凍死)해 버린 흔적이었다.
그 침상 옆에는 화려한 청색 비단 도포를 입은 청성파의 장로, 조덕필(Jo Deok-pil)이 어두운 안색으로 서 있었다. 그는 아들의 얼어붙은 팔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강맹한 청성자하공 내력을 주입하려 했으나, 내력이 닿자마자 차가운 빙결 한기가 역류하여 자신의 손끝마저 얼려버리려 하자 급히 손을 떼었다.
“이, 이 무슨 지독한 한기란 말이냐……! 정파의 무공 중에는 이토록 잔혹하고 사악한 빙결 기운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덕필의 눈에 경악과 분노가 서렸다.
“아버님! 그년들은…… 그 청운초당의 계집년들은 평범한 약초꾼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년들은 마교의 괴물들입니다! 특히 은발을 한 그 첫째 년은 백련마교 교주의 신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충이 잘려 나간 어깨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이를 갈았다.
“한시우…… 그 폐물 새끼가 뒤로는 마교의 첩자들을 숨겨두고 정도 무림을 파멸시키려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팔을 이렇게 만든 그 마녀년들과 한시우를 당장 잡아다가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합니다!”
조덕필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비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청운봉의 희귀 영약 채집권을 독점하려던 그의 사사로운 욕심에, ‘마교 척결’이라는 정파 무림 최고의 대의명분이 쥐어진 것이다. 게다가 아들의 팔을 망가뜨린 고수(그는 한시우의 배후에 거대한 마교 고수가 숨어있다고 오판하고 있었다)를 처단한다면, 가문의 위세는 물론 무림맹에서의 입지도 탄탄해질 터였다.
“마교의 씨앗들을 은밀히 키우고 있었다라…… 흥, 아주 훌륭한 명분이 생겼구나.”
조덕필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한시우, 감히 내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청성파의 영지를 넘보았겠다. 당장 관청과 무림맹에 연락하여 청운봉 수색 영장을 발부받아라. 내 직접 청성파의 최정예 무사들을 이끌고 올라가, 그 폐물 놈의 목을 베고 마교의 년들을 쇠사슬로 묶어 만인 앞에 화형에 처하겠다!”
청성파의 거대한 음모와 무력의 폭풍이 청운봉을 향해 서서히 닻을 올리고 있었다.
* * *
다시 청운초당의 안방 침상.
한시우는 제자들의 기싸움을 겨우 진정시키고 침상에 몸을 뉘었으나, 심장 부근의 검푸른 마기 흉터가 욱신거리며 가혹한 고통을 뿜어냈다. 옆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설하율의 죄책감과 집착이 영혼 공명을 통해 그의 심장으로 다이렉트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율이의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내 심장이 반응하는군…… 지독한 굴레다.’
한시우가 창백한 안색으로 마른기침을 뱉어내려던 그 순간.
스스스슥.
아무런 소리도 없이, 침상 밑의 어두운 그림자가 기괴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시우는 깜짝 놀라 심안을 가동했다. 침상 가장자리, 촛불조차 닿지 않는 어둠의 경계선에서 서서히 솟아오른 야설화의 신형이 굳건히 서 있었다.
그녀는 얇은 도포 자락만을 걸친 채, 요염하면서도 극도로 불안한 눈빛으로 한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설화의 등 뒤로 불길한 검은 그림자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그녀의 마성이 질투를 먹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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