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공명, 영구히 묶인 영혼의 붉은 실
“오지 마세요……! 제발, 스승님……! 제가 스승님을 죽이게 하지 마세요!”
청운초당의 앞마당은 이미 인간의 지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극음(極陰)의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타오르던 대나무 숲의 불길마저 얼려버린 서슬 퍼런 빙결의 장막 속에서, 설하율은 붉게 물든 눈동자로 울부짖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빙백마기(Ice Demon Qi)는 칼날 같은 성에가 되어 사방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 한기 서린 바람에 닿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얼어 터지고 뼈가 시릴 지경이었다.
기경팔맥이 폐절된 병약한 육체의 한시우에게 이 한기는 심장을 단숨에 멈출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한시우는 멈추지 않았다. 입가에 묻은 선혈을 대충 훔쳐낸 그가 하얗게 질린 입술로 슬프게 미소 지었다.
사각, 사각.
한시우가 서리가 가득 내려앉은 얼음 바닥을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심안(Mind's Eye)이 허공을 어지럽게 뒤흔드는 차가운 냉기의 궤적을 정밀하게 읽어냈다. 내공은 1푼도 없었으나, 과거 정파 제일검 시절에 체득한 무게 중심 이동의 극의가 그의 신형을 인도했다. 환영보법(Illusionary Footwork)의 이치를 응용한 기묘한 보폭이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의 사각지대를 절묘하게 비껴갔다.
“하율아.”
“오지 마…… 오지 마세요!”
설하율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빙결 강기가 한시우의 가슴팍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장막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야설화와 염초아가 비명을 질렀으나, 한기의 결계에 가로막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한시우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밀려드는 한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마침내 설하율의 눈앞에 도달했다. 전신이 얼어붙는 고통에 심장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창백한 두 팔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았다.
덥석.
“……괜찮다. 스승이 여기 있다.”
차가운 얼음 인형 같던 설하율의 신형이 찰나의 순간 굳어졌다. 전신을 집어삼키던 잔혹한 빙백마기가 한시우의 가슴팍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 기세가 꺾였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 속에서 오직 한시우의 가슴에서만 흘러나오는 가냘프고 따뜻한 온기가 설하율의 얼어붙은 심장을 두드렸다.
“아…… 아아…….”
설하율의 붉은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다 이내 얼어붙어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성을 잃어가던 그녀의 눈빛에 찰나의 회광반조처럼 스승의 얼굴이 담겼다.
한시우는 품에 안긴 설하율의 몸이 무너지듯 쓰러지는 것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발밑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얼음 바닥 위, 도망친 조충이 떨어뜨리고 간 암청색의 빙설옥패(Ice Snow Jade Pendant)가 뒹굴고 있었다. 하율이 마교 교주의 딸이라는 치명적인 물증. 한시우는 내력 없는 손을 뻗어 옥패를 낚아채 품속 깊은 곳에 찔러 넣었다.
“설화야, 초아야. 청성파의 잔당이나 다른 외인들이 청운봉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초당 입구를 철저히 경계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
한기 장막 너머로 들려오는 한시우의 단호한 목소리에, 야설화와 염초아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스승님! 꼭 지키겠습니다!”
한시우는 품에 안은 설하율을 고쳐 안았다. 그녀의 전신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고, 단전 내부의 마기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초당 안방의 비밀 통로를 열고, 청운봉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금지 구역, 한빙동락(Subterranean Ice Cave)으로 향했다.
* * *
지하 한빙동락의 문을 열자, 뼈를 찌르는 극음(極陰)의 한기가 소리 없이 밀려왔다. 동굴 중앙의 얼음 침대에는 한시우의 여동생 한연우가 차가운 정적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한시우는 여동생에게 눈길을 주며 마음속으로 사죄한 뒤, 설하율을 그 옆의 차가운 석상 플랫폼 위에 눕혔다.
“하율아,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내 목소리를 듣거라.”
설하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은발 끝자락에서 흘러나온 서리가 석상 전체를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마공의 폭주로 인해 자아가 파괴되기 직전의 위험한 상태였다.
한시우는 품속에서 청운영지(Cheongun Yeongji)의 정수를 모아 직접 제련한 빙백정화단(Ice Purification Elixir)을 꺼냈다. 영롱한 백색 빛을 내뿜는 단약을 설하율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읍…… 으윽!”
단약이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설하율의 단전에서 거대한 반발력이 일어났다. 체내의 빙백마기가 외부에서 들어온 정화의 기운을 밀어내기 위해 미친 듯이 소동을 피운 것이다. 하율의 몸이 활처럼 꺾이며 고통스러운 비명이 동굴 벽을 울렸다.
한시우는 급히 청운침통을 열어 현철은침 세 대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기혈을 제어하기 위해 인당혈과 백회혈을 향해 빠르게 자침했다.
팅! 팅! 핑!
하지만 은침들이 그녀의 이마에 닿는 순간, 지독한 쇳소리와 함께 단숨에 부러져 나갔다. 폭주하는 마성의 크기가 너무도 거대하여, 일반적인 침술과 외적인 혈도 제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은침 제어 실패.*
‘이 정도의 마기일 줄이야…… 오직 영혼을 직접 연결하는 금기 비법뿐인가.’
한시우는 입가에 고이는 피를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수명과 영혼력을 대폭 깎아 먹는 극약처방. 하지만 망설임은 사치였다. 한시우는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깨물어 붉은 선혈을 흘려냈다. 그리고 그 피로 설하율의 이마와 양손, 그리고 석상 바닥에 기묘한 고대의 룬 문양을 빠르게 그려 나갔.
사제공명진(Master-Disciple Resonance Array).
스승과 제자의 심상을 완벽히 동기화하여 기운과 고통을 공유하는 고대의 금기된 진법이 붉은 핏빛을 발하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한시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설하율의 차가운 관자놀이에 자신의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순수한 도가의 심법을 끌어올렸다.
도심정화술(Dao-Heart Purification Method).
“내 영혼을 이정표 삼아라, 하율아. 길을 잃지 마라.”
웅웅웅!
한시우의 손끝에서 은은하고 고결한 금빛의 정화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빛은 차가운 빙백마기의 장막을 뚫고 설하율의 이마를 지나 그녀의 단전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아아아악!!”
설하율이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단전 내부에서 금빛의 정화 기운과 칠흑 같은 빙백마기가 격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날뛰는 마성은 한시우의 손끝을 타고 역류하여, 그의 ruptured meridians(파괴된 경맥)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한시우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각혈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Advantage Swing*: 마성의 폭주가 한시우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며 그의 의식을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네까짓 병약한 인간이 감히 천생마체를 길들이려 하느냐’는 사악한 환청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한시우의 도심(Dao-heart)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하율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스승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과 구원의 갈망이 그 마성의 저항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심상이 하나로 동기화되며, 영혼 공명(Soul Resonance)의 신비로운 기적이 일어났다.
스르륵.
한시우의 눈앞에 설하율의 억눌린 기억의 조각들이 펼쳐졌다. 그것은 마교 총단에서 도구로 학대받던 어두운 날들이 아니었다. 맑은 대나무 향이 흐르던 청운초당의 어느 밤이었다.
*설하율의 속마음 - 첫날 밤에 결심한 마교 배신.*
그녀가 마교의 비밀 첩자로서 청운봉에 위장 잠입했던 첫날 밤. 설하율은 차가운 방 바닥에 누워 언제 정체가 들통나 죽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리며 병약하게 기침을 뱉던 스승 한시우가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추위에 떠는 그녀에게 손수 짠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어붙은 손을 짚어주며 밤새도록 약초를 우려낸 따뜻한 미음을 끓여 대령했다.
‘이 사람은…… 나를 무기로 보지 않는구나.’
그 따뜻한 손길과 미음의 온기가 설하율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였던 그 첫날 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마교를 배신하겠노라고. 아비 설무극의 명령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이 병약하고 다정한 스승의 곁에서, 그의 제자로 살아가겠노라고.
그 기억의 공유는 영혼 공명의 완벽한 기폭제가 되었다.
“스승님……!”
설하율의 영혼이 한시우의 온기를 향해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열어젖혔다. 폭주하던 빙백마기가 금빛 정화 기운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부드럽고 맑은 태극의 형태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지독한 파괴의 한기가 맑고 고결한 정화의 서리로 승화되는 기적.
마교의 에너지가 정도의 깨달음과 융합되어 창안된 궁극의 심법, 빙청도심결(Ice-Pure Dao-Heart Art)이 그녀의 단전에서 마침내 완성되었다.
“후우…….”
동굴을 가득 메웠던 살인적인 냉기가 서서히 흩어지고, 맑고 투명한 푸른빛의 정기가 설하율의 몸 주변을 우아하게 감싸 안았다. 폭주는 완벽하게 제어되었다.
하지만 기적에는 가혹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인과적 부작용(영혼 공명의 영구적 구속력)이 한시우의 육신을 덮쳤다.
“컥……!”
한시우는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심장 부근에 검푸른 마기의 흉터가 영구적으로 새겨졌다. 두 사람의 영혼이 붉은 실로 묶여버린 흔적이었다. 이제 하율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녀가 뿜어내는 기운의 파동이 한시우의 심장에 고스란히 전해져 평생 그를 구속할 터였다.
스르륵.
한시우의 머리맡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낙뢰의 후유증과 이번 영혼력 소모의 대가로, 그의 칠흑 같던 머리카락 절반이 완전히 은빛 백발로 변해 굳어져 있었다. 쇠약해진 숨결을 내뱉는 그의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운 은빛의 검선 같았다.
“스승님……?”
정화를 마친 설하율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은 살기를 지워내고 맑고 깊은 빙결의 이채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시우의 은빛 백발을 발견했다. 그리고 스승의 가슴팍에 새겨진 검푸른 흉터와, 자신과 영혼 깊은 곳에서 실시간으로 공명하는 그의 심장 고동을 느꼈다.
그것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치른 처절한 대가임을 깨닫는 순간.
설하율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가녀린 죄책감은, 차마 인간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극단적이고도 아름다운 소유욕으로 진화했다.
스르륵.
설하율이 침상에서 일어나 한시우의 몸 위로 엎어졌다. 그녀는 가녀린 두 팔로 한시우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정화된 빙청도심결의 향기가 한시우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스승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입꼬리를 묘하게 올리며 집착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스승님의 고통은 제 것입니다. 평생 제 곁을 벗어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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