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의 첫 번째 클레임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이 뼈마디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대황제국의 버려진 셋째 황자, 이현은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고, 목구멍은 모래를 삼킨 듯 서걱거렸다.
'결국... 다시 눈을 뜨고 말았군.'
이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에서 인사 관리(HR) 실장으로 뼈를 깎으며 야근하다가 과로사했던 그 허무한 종말이.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국의 병약한 황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실의 비정함은 전생의 악덕 기업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무공 자질이 전혀 없고 몸마저 나약하다는 이유로, 그는 마교와의 평화 협상을 위한 일회용 인질 카드로 던져져 이곳 지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은 마교 변방의 가장 음침하고 악명 높은 수용소, 흑뢰(黑牢)였다.
"콜록! 콜록...!"
허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폐부가 찢어질 듯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곰팡이가 검붉게 슬어 있는 벽면과 썩은 내가 진동하는 바닥의 짚단들. 숨을 쉴 때마다 흩날리는 먼지가 이현의 연약한 호흡기를 사정없이 자극했다. 위생 상태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전생의 산업안전보건법 기준을 들이댄다면 즉시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생지옥이었다.
쿠궁!
그때, 쇠사슬이 긁히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고문실의 철문이 열렸다. 붉은 마기를 내뿜으며 걸어 들어오는 사내의 풍채에 가위눌릴 듯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흑뢰 감옥의 지배자이자 잔혹함으로 악명 높은 간수장, 조태독이었다.
그의 손에는 한철로 주조된 혈사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채찍이 바닥을 쓸 때마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황자 놈이 제법 끈질기게 살아 있구나."
조태독이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며 이현의 턱을 채찍 끝으로 툭툭 쳤다. 절정 극성의 마공을 익힌 마두답게, 그가 풍기는 살기만으로도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조태독의 뒤에는 초임 간수 서필이 결재판을 든 채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마교에 왔으니 마교의 법을 배워야겠지. 황자라 하여 곱게 대접받을 생각은 마라. 기선 제압을 위해 손가락 몇 개쯤은 부러뜨려 주마. 그래야 본산의 교주님께 보낼 보고서가 보기 좋게 채워지지 않겠느냐?"
조태독이 채찍을 치켜들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무공이 전혀 없는 이현으로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였다. 하지만 이현은 떨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퉤."
이현이 뱉어낸 핏방울 섞인 침이 정확히 조태독의 칼날같이 잘 닦인 가죽 장화 깃에 묻었다.
"이놈이...!"
조태독의 눈이 뒤집히며 살기가 폭발했다. 당장이라도 이현의 목을 날려버릴 듯 채찍이 허공에서 울부짖었다. 그 순간, 이현이 창백한 안색으로 꼿꼿하게 앉으며 단호하고 예리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조 간수장. 귀하는 지금 엄청난 정무적 배임 행위이자 교단 자산에 대한 무단 훼손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지독한 무식함이 귀하의 삼대를 멸하게 만들 것임을 정녕 모르십니까?"
"뭐라? 배임...?"
조태독이 멈칫했다. 생전 처음 듣는 기묘한 단어와,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 당당하고 깐깐한 황자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기세가 주춤한 것이다. 이현은 전생의 HR 실장 시절, 노조 협상 테이블에서 수백 명의 강경파 조합원들을 말빨 하나로 압도하던 카리스마를 발동했다.
"귀하가 모시는 천마신교의 교주 독고영과 우리 대황제국의 부황이 진행 중인 평화 협상의 핵심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나의 '생존'과 '신체적 완전성'입니다. 즉, 나는 현재 마교가 황실로부터 막대한 영토와 자원을 뜯어내기 위해 확보한 가장 가치 있는 '외교적 유동 자산'이라는 뜻입니다."
이현이 콜록거리며 옷깃을 칼같이 정리했다. 얇은 체구였으나 자세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만약 귀하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해 내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혹은 이 비위생적인 감옥 환경 때문에 폐렴에 걸려 내가 급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실은 즉시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마교를 섬멸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를 파병할 명분을 얻게 됩니다. 교주님은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를 잃고 외교적 파국을 맞이하겠지요. 귀하가 저지른 짓은 단순한 기선 제압이 아닙니다. 교단의 최고 이익을 사적인 가학욕구 때문에 날려버린 '업무상 배임'이자, 교주님의 계획을 망가뜨린 '역모'에 준하는 중죄입니다!"
"이, 이 무슨 궤변을...!"
조태독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머리는 둔하지만, 이현이 말하는 '교주님의 분노'와 '외교적 파국'이라는 단어의 무게만큼은 뼈저리게 다가왔다. 인질이 다치거나 죽으면 가장 먼저 목이 날아가는 것은 관리 책임자인 자신이었다.
이현은 틈을 주지 않고 뒤에 서 있던 초임 간수 서필을 예리하게 쏘아보았다.
"서필 간수. 귀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 관리 책임자로서 연대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내가 오늘 밤 건조함과 먼지 때문에 각혈하다 죽는다면, 귀하의 목숨 또한 무사하겠습니까?"
"히익...!"
서필이 결재판을 떨어뜨리며 혼비백산했다. 황자의 병약한 몸뚱이는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깨지는 유리창 같았다. 만약 진짜로 죽기라도 한다면 교주님의 불호령에 자신들은 뼈도 못 추릴 것이 뻔했다. 서필은 무릎을 꿇으며 조태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간, 간수장님! 황자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본산의 감찰관들이 수시로 인질의 상태를 점검하러 내려오는데, 몸에 상처라도 있으면 저희가 먼저 처형당합니다! 제발 고문을 거두어 주십시오!"
조태독은 짓눌리는 정무적 책임감과 식은땀 속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채찍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이현은 조태독의 살기가 완전히 꺾인 것을 확인하고, 휠체어에 몸을 기대며 첫 번째 클레임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당장 내 거처의 수용 환경 개선을 요구합니다. 내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해 방 안의 습도를 정확히 70%로 유지하십시오. 당장 깨끗한 면 수건을 따뜻한 온수에 적셔 이 방 벽면에 촘촘히 걸어두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인질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유지 보수 비용'입니다. 서필 간수, 지금 즉시 실행하십시오."
"예, 예! 당장 따뜻한 물과 수건을 준비하겠습니다!"
서필은 조태독의 눈치도 보지 않고 물러가며 이현의 비서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태독은 자신이 지배하던 흑뢰 감옥에서 도리어 병약한 인질에게 행정적으로 완벽히 제압당했음을 깨닫고 허탈하게 채찍을 거두었다.
이현은 음습하고 더러운 흑뢰 감옥의 사방을 둘러보며 깊고 깐깐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비위생적인 환경이라니... 전반적인 안전 보건 진단이 시급하군요."
그 나직한 한숨 소리에 고문실에 남아 있던 마교 간수들이 일제히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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