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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의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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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가득 채웠던 녹색 레이저 격자들이 잘게 부서지며 우진의 망막 아래로 녹아내렸다. 일시적으로 강제 동기화되었던 빛의 세계가 다시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강우진은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감을 수 없었다. 그의 망막은 이미 방금 전 목격했던 정하윤의 흐릿한 실루엣, 그 가냘프고도 단단한 윤곽을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각인한 뒤였다.


녹색 실루엣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존재가 우진의 얼어붙은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서재 안에는 오직 타오르는 장작 소리와 두 사람의 흐트러진 호흡 소리만이 무겁게 얽혀들었다. 하윤은 긴장이 풀린 듯 우진의 무릎 근처에 기대어 그의 커다란 손을 꼭 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은 우진의 손등을 타고 그의 심장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진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녀가 머물던 허공을 응시했다. 자가 시력은 다시 차갑게 꺼졌지만, 그의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체온만큼은 그 어떤 빛보다도 선명한 실존이었다.


“정하윤 씨.”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윤은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네, 우진 씨.”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겠군. 내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준 건, 당신이 처음이었어.”


하윤은 그의 진심 어린 음성에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 오는 것을 느꼈다. 대기업의 냉혹한 후계 구도 속에서 아무도 믿지 못한 채 고립되어 가던 이 남자가, 오직 자신의 기술과 손길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하윤은 소매 끝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올림픽대로의 추격전으로 다친 이마의 찰과상 상처가 아물어가며 욱신거렸지만, 우진의 눈가에서 채취한 눈물 샘플이 담긴 유리 모세관 튜브를 가방 속 분석 키트에 안전하게 넣는 순간만큼은 엔지니어로서의 차가운 이성이 다시금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 고요한 구원의 밤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침이 밝아오며 양평 계곡의 자욱한 안개를 뚫고 차가운 겨울 햇살이 서재 창문으로 들이쳤다. 밤새 켜두었던 서재 벽면의 대형 모니터 화면이 갑작스러운 비프음과 함께 붉은색 속보 자막을 띄우기 시작했다. 한 집사가 굳은 얼굴로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와 리모컨을 조작해 텔레비전 채널을 켰다.


[속보: 태성그룹 전무 강우진, 불법 무면허 의료 시술의 희생양 되나? 배후의 산업 스파이 정하윤 지명수배]


화면 속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갑고 무자비했다.


“태성그룹의 후계자로 유력했던 강우진 전무가 최근 실명 상태에 빠진 가운데, 이를 악용한 조직적 산업 스파이 범죄가 포착되었습니다. 검찰과 경찰은 무명 광학 스타트업 ‘아우라 테크’의 대표 정하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전국에 긴급 지명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정하윤은 식약처 승인도 받지 않은 미검증 스마트 렌즈를 강 전무의 안구에 불법 피팅하여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위해를 가한 뒤, 태성의 차세대 광학 R&D 기밀 특허를 탈취해 도주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화면 우측에는 하윤의 대학 졸업 사진과 함께 ‘아우라 테크’의 로고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언론은 그녀를 천재 엔지니어가 아닌, 돈에 눈이 멀어 환자를 마루타 삼아 불법 시술을 자행한 흉악한 사기꾼이자 기술 유출범으로 완벽하게 조작해 내보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내가 아빠의 기술을 도용하고 우진 씨를 해쳤다고요?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윤은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억울함과 분노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평생을 빛의 굴절과 인간을 위한 렌즈 연구에만 바쳐온 아버지의 명예와 자신의 모든 커리어가 대기업의 거대한 언론 플레이 한 번에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그때 하윤의 개인 스마트폰이 거칠게 울렸다. 독립 언론 기자인 친구 윤미래였다.


“하윤아! 뉴스 봤어? 지금 태성그룹 기획실 최창수 팀장이 주도해서 메이저 언론사들에 보도자료를 통째로 뿌렸어! 내가 이 기사의 모순점과 네 특허 원본을 바탕으로 반박 기사를 쓰려고 독립 언론 사이트에 올렸는데, 대기업 포털 사이트에서 압력을 넣었는지 노출이 통째로 차단당하고 있어. 포털 메인에서 네 이름이 검색어 1위인데, 옹호 여론은 전부 스팸 처리되고 있어. 한정혜 이사장이 황 의원을 움직여서 사법부와 경찰청장 라인까지 완벽하게 장악한 게 분명해!”


미래의 다급한 목소리 너머로 하윤은 거대한 그물이 자신을 조여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한정혜와 황 의원. 자본과 공권력이 결탁한 거대한 괴물이 그녀라는 나약한 개인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말살하려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래의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하윤의 메신저로 낯선 번호의 동영상이 수신되었다. 영상을 재생한 하윤은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화면 속 공간은 마포구에 위치한 그녀의 좁고 따뜻했던 옥탑방이었다. 아버지를 간병하며 밤새 코딩을 하고 납땜을 하던, 그녀의 땀방울과 추억이 서린 유일한 안식처. 그곳이 지금 처참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부패 경찰 박 형사가 이끄는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압수수색이라는 명목 하에 서랍을 통째로 엎어버리고, 아버지가 남겨준 낡은 광학 서적들을 군화발로 짓밟고 있었다. 하윤이 쓰던 수동 납땜 도구와 계측기들은 바닥에 내팽개쳐져 박살이 났고, 벽에 걸려 있던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액자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안 돼... 아빠 물건들이... 내 집이...”


하윤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 갈 곳 없는 도망자 신세가 된 것도 모자라,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사수하려 했던 유일한 주거 공간마저 적들의 더러운 구두굽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사라져 버린 듯한 지독한 상실감과 절망감이 그녀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하윤의 어깨가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흐느낌이 깊어졌다.


스스슥.


그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서 있던 우진이 케인을 짚으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정확한 방향을 찾아 하윤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비록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고도로 발달한 청각과 감각은 하윤이 흘리는 눈물의 무게와 절망의 깊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우진은 단단하고 커다란 손을 뻗어 하윤의 떨리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넓은 가슴이 하윤의 가냘프고 여린 신체를 따뜻하게 품어 안았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되고 추악한 보도 소음과 대조적으로, 우진의 품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고 아늑했다. 그의 단단한 심장 박동이 하윤의 뺨에 닿아 규칙적인 울림을 전해왔다.


“정하윤 씨, 나를 봐요. 아니, 내 목소리를 들어요.”


우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묵직했다.


“그들이 당신의 집을 부수고 명예를 더럽힐 수는 있어도, 당신의 천재성과 진실까지 파괴할 수는 없어. 내 눈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이 정도 얕은 수작에 무너질 거라면, 애초에 내 손을 잡지도 않았겠지.”


우진의 품 안에서 전해지는 강인한 온기와 든든한 신체적 존재감에 하윤은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였다. 여기서 무너지면 한정혜 일파의 뜻대로 모든 진실이 어둠 속에 묻히고 말 터였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믿어준 이 남자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내야 했다.


“최 변호사를 연결해.”


우진이 한 집사에게 지시하자, 서재의 대형 화면에 최성필 변호사와 정유진 사무장의 보안 화상 연결이 활성화되었다. 최 변호사의 얼굴 역시 굳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노련한 법조인답게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무님, 한정혜가 황 의원을 동원해 법원을 전방위로 압박한 것이 확실합니다. 박 형사가 신청한 정하윤 대표에 대한 긴급 체포영장이 비상식적인 속도로 발부되었습니다. 하지만 법률에는 언제나 틈새가 있는 법이지요.”


최 변호사는 낡은 가죽 서류 가방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화면에 비췄다. 보건복지부의 공식 직인이 찍힌 유권해석 문서였다.


“제가 보건복지부 인맥을 통해 스마트 렌즈의 의료 기기 임상 시험 예외 규정에 대한 공식 유권해석 서류를 확보했습니다. 강 전무님이 태성그룹의 법적 대리인이자 환자 본인으로서 직접 서명한 비공개 임상 시험 동의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 대표의 피팅 행위는 ‘무면허 불법 의료 시술’이 아닌 합법적인 긴급 피난 목적의 연구 임상으로 분류됩니다. 즉, 박 형사가 들고 있는 체포영장의 피의 사실 자체가 법리적으로 원천 무효라는 뜻입니다.”


최 변호사의 날카로운 법리적 방패가 제시되자 하윤의 눈망울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정유진 사무장 역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분석한 데이터를 띄웠다.


“게다가 태성그룹 법무팀이 황 의원실 보좌관들에게 정기적으로 송금한 불법 로비 자금 이메일 로그와 금융 거래 내역을 일부 가로채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이 공권력을 매수해 기획 수사를 벌였다는 정황 증거가 충분합니다. 박 형사가 영장을 집행하려 별장에 들이닥치는 즉시, 저희는 법원에 ‘영장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실시간으로 접수해 집행을 정지시킬 겁니다.”


최 변호사와 우진이 정교하게 설계한 법리적 역공 방패는 완벽했다. 적들의 합법적인 체포 권한을 사법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역으로 옭아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위기를 돌파할 실마리를 찾았다고 안도하려던 찰나.


삐- 삐- 삐-!


별장 내부의 중앙 보안 콘솔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재 벽면에 설치된 수십 개의 모니터 화면 중 하나가 붉은색 불빛을 내뿜으며 긴박하게 깜빡였다.


양평 별장 진입로 초입에 설치된 초소형 감시 카메라 화면이었다. 자욱한 새벽 안개를 헤치며 경광등을 끈 채 은밀하게 다가오는 검은색 순찰차 석 대의 실루엣이 화면 가득 포착되었다. 차량의 문이 열리고, 방탄조끼를 입은 박 형사와 수사관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별장 정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별장 내부의 경보 시스템이 붉은 불빛을 내뿜으며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서재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었다. 적들의 사법적 압박이 마침내 두 사람의 턱밑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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