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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계곡의 은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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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이 양평의 굽이진 계곡 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라이트가 완전히 꺼진 강우진의 전용 방탄 벤츠 S클래스는 오직 정하윤의 스마트 렌즈가 전송하는 녹색의 가상 실루엣 인터페이스에 의지해 느린 속도로 산길을 기어가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깨진 조수석 유리창 틈새로 들이치며 차가운 바람과 함께 차내를 적셨다.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움켜쥔 채, 99%에서 멈춰버린 백업 진행률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테나가 꺾여 위성 신호는 끊겼지만, 다행히 차량이 별장 영역의 사설 중계기 범위에 진입하면서 끊기기 직전의 데이터 패킷들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전방 10미터 앞, 우측으로 꺾으세요. 가드레일이 끊어진 낭떠러지 구간입니다.”


하윤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이 경호원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운전대를 잡은 이 경호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라이트도 없이, 오직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 하나에 목숨을 맡긴 채 절벽 길을 달리는 기분은 극도의 공포였다. 하지만 우진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하윤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눈동자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아우라 렌즈만이 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빛이었다.


마침내 울창한 소나무 숲길 끝에 거대한 석조 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기도 양평의 깊은 계곡 속에 고립된 우진의 사설 보안 별장, ‘소나무 계곡 별장’이었다.


철제 대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박도현 경호팀장이 전술 경보등을 끈 채 차량을 안쪽 차고로 빠르게 유도했다. 차가 완전히 멈춰 서고 시동이 꺼지자, 하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노트북을 닫았다.


차 문이 열리자마자 백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노신사가 우산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우진의 충직한 고용인이자 별장 관리단 총괄인 한 집사였다.


“전무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안쪽은 완벽히 차폐되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한 집사의 묵직하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내리치는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박도현 팀장이 주변의 어둠을 예리한 시선으로 살피며 무전기를 고쳐 잡았다.


“임태식의 미행 차량 두 대가 국도 초입에서 방향을 잃은 것을 열화상 카메라로 확인했습니다. 백동수 씨가 설치한 광대역 전파 방해막 덕분에 이 안쪽의 무선 신호는 외부에서 절대 탐지할 수 없습니다. 당분간은 안전할 겁니다.”


박도현의 보고를 들으며, 하윤은 차에서 내렸다. 다리가 풀려 빗물 고인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그녀의 허리를 우진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정확하게 감싸 안았다. 비록 앞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신체는 하윤의 미세한 호흡 변화와 체온을 귀신같이 읽어내고 있었다.


“한 집사, 정 대표를 안으로 인도해. 그리고 구급상자를 서재로 가져와.”


우진의 낮고 단호한 명령에 한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별장 내부는 차가우면서도 고요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가구들은 짙은 색조의 원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창밖으로는 밤바람에 거칠게 흔들리는 소나무 숲의 아날로그적인 소리가 실내의 침묵을 채웠다. 서재로 들어서자 따뜻한 벽난로의 온기가 두 사람의 젖은 몸을 감싸 안았다.


우진은 소파에 하윤을 조심스럽게 앉혔다. 한 집사가 가져온 구급상자를 열자, 우진은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 하윤의 얼굴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긴 손가락 끝이 하윤의 이마 근처를 맴돌았다.


“다쳤군.”


우진의 목소리에 옅은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하윤은 이마의 찰과상 상처를 만지려다 통증에 읍 소리를 냈다. 올림픽대로 추격전 당시 유리창에 부딪히며 생긴 상처였다.


“괜찮아요. 가벼운 찰과상일 뿐이에요.”


“앞은 보이지 않지만, 피 냄새는 맡을 수 있어.”


우진은 하윤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구급상자에서 소독솜을 꺼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하윤의 이마 상처 부위에 닿았다.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오직 손가락 끝의 예민한 촉각에 의지해 소독솜을 문지르는 그의 손길은 소름 끼치도록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상처에 약이 닿아 알싸한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하윤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우진은 그때마다 손길을 멈추고 그녀의 가쁜 숨소리를 살폈다.


“나 때문에 이런 위험에 처하게 해서 미안하군, 정 대표.”


우진의 차가운 목소리 이면에 숨겨진 깊은 부채감이 하윤의 가슴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하윤은 우진의 단단하고 긴 손가락이 자신의 이마를 짚고 있는 촉감에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기술을 지키기 위한 제 싸움이기도 해요. 그보다 우진 씨, 이제 우리는 여기서 24시간 내내 붙어 있어야 해요.”


하윤은 가방에서 푸른 빛의 휴대용 광학 조율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조율기 화면에 깜빡이는 노란색 경고등이 두 사람의 물리적 한계를 경고하고 있었다.


“아우라 렌즈의 무선 전송 모듈은 전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수신 거리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요. 저와 우진 씨의 물리적 거리가 10미터 이내로 유지되어야만 데이터 전송률이 99.9%로 유지돼요. 그 범위를 벗어나면 영상이 끊기고 붉은 노이즈가 발생하면서 우진 씨는 다시 완전한 암전 상태에 빠지게 될 거예요.”


‘감각 인지 거리: 반경 10m 한계’. 그것은 두 사람이 이 넓은 별장 안에서 거의 모든 동선을 공유해야 함을 의미하는 가혹하고도 밀착된 제약이었다.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10미터라... 좁은 감옥이 되겠군.”


“그래서 규칙이 필요해요.”


하윤은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해요. 제가 옷을 갈아입거나 사적인 공간에 있을 때, 우진 씨가 렌즈의 수신 전원을 수동으로 차단해 주셔야 해요. 수신기에 설치된 ‘프라이버시 블랙아웃’ 버튼을 누르면, 우진 씨의 시야는 부드러운 살구색 화면으로 전환되면서 제 모습이 차단될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합의해야 할 ‘시각 동기화 프라이버시 보호 수칙’이에요.”


우진은 귓가에 들리는 하윤의 논리적이고 정교한 목소리를 음미하듯 가만히 듣고 있었다. 늘 대기업의 전무로서 모든 사람을 통제하고 지시하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감각적 구원자인 이 여자에게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좋아. 프라이버시 블랙아웃 수칙을 철저히 지키지. 하지만 긴급 상황에서는 예외로 하겠어.”


우진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하윤은 그의 동의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상의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하윤은 우진의 개인 침실로 향했다. 침실은 서재와 바로 연결된 넓은 공간이었지만, 가구들의 모서리가 날카로워 앞이 보이지 않는 우진에게는 위험해 보였다. 하윤은 안경 카메라를 켜고 방 안의 구조를 3D 홀로그램 모델링으로 스캔하며 장애물의 위치를 조율기 메모리에 저장했다.


그때였다. 우진이 욕실에서 젖은 셔츠를 벗고 갈아입기 위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상체는 젖은 옷 실루엣 너머로 다부진 근육질 체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윤은 순간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우진 씨, 아직 프라이버시 모드를 켜지 않았어요...!”


“아직 옷을 벗지 않았으니 괜찮아.”


우진은 담담하게 말하며 침대 옆 협탁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려던 순간, 그의 손가락 끝이 추위와 신경 마비 여파로 미세하게 마비되어 단추를 제대로 쥐지 못하고 헛돌았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며 자괴감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평생 누군가의 도움 없이 완벽함을 고수하던 남자가 겪는 신체적 결핍의 비참함이었다.


하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제가 도울게요.”


하윤은 가방에서 초소형 골전도 이어폰을 꺼내 우진의 귓바퀴 뒤쪽에 직접 장착해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우진의 차가운 귀 뒷부분의 부드러운 살결에 닿자, 우진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귀를 막지 않고 뼈의 진동으로 제 목소리만 전달할 거예요. 외부에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하윤은 우진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셔츠 첫 번째 단추로 손을 뻗었다. 10미터 한계 거리 안에서의 극단적인 밀착.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하윤의 가쁜 숨소리가 우진의 젖은 쇄골 틈새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첫 번째 단추는 왼쪽으로 2밀리미터... 제 손끝을 따라 천천히 움직여 봐요.”


하윤이 골전도 이어폰 마이크에 대고 정밀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단추의 위치와 방향을 가이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우진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우진은 손가락을 움직여 하윤의 가이드에 따라 단추를 쥐었다. 하지만 하윤의 가쁜 숨소리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비누 향이 그의 예민해진 청각과 후각을 자극하자, 우진의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렌즈의 생체 센서가 우진의 심박수 상승을 감지하고 붉은색 경고 신호를 하윤의 단말기에 깜빡였다.


우진은 단추를 채우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오직 하윤의 가쁜 호흡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단단하고 긴 손가락이 공기를 가르고 내려와, 하윤의 이마 상처 부위를 지나 뺨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섰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하윤의 체온이 너무나 뜨거워, 우진의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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