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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화염과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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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동 DMC의 밤은 차갑고도 가차 없었다. 빌딩 숲 사이로 부는 칼바람을 뚫고, 정하윤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강남 세인트 안과 병원 VIP 병실에서 복구해 낸 그 끔찍한 비디오 데이터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스마트 렌즈의 원천 소스코드를 지켜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임태식. 우진의 눈을 멀게 한 화학 테러의 실행범이자, 지난 며칠간 자신을 그림자처럼 미행하던 태성그룹 보안팀장. 그의 손목에 새겨진 톱니바퀴 모양의 거친 흉터를 확인한 순간, 하윤은 이 싸움이 단순히 우진 개인의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15년 전 자신의 아버지, 정민우 연구원의 평생을 바친 광학 특허를 찬탈하고 가정을 파탄 낸 한정혜 일파의 거대한 음모와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었다.


지하 1층, 아우라 테크 연구소의 이중 철제 보안문 앞에 도착한 하윤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OTP 인증을 시도했다. 파란색 불빛이 깜빡이며 육중한 문이 열렸다. 연구소 내부는 고요했다. 하윤이 밤새 납땜질을 하고 코딩을 하던, 낡았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공간. 특히 안쪽에 자리 잡은 가로세로 3미터 크기의 유리벽으로 차단된 ‘멸균 광학 실험실’은 그녀의 영혼 그 자체였다.


그때, 가방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아우라 테크의 유일한 인턴이자 충직한 후배, 김민우였다.


“누나! 절대 연구소로 가면 안 돼요! 지금 상암동 빌딩 주변에 검은색 수트를 입은 사내들이 깔렸어요! 임태식이 보낸 놈들이 분명해요! 당장 피하세요!”


민우의 다급한 비명이 수화기 너머로 터져 나왔다. 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메인 콘솔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연구소 안이야, 민우야. 소스코드가 담긴 메인 서버를 그대로 두고 갈 순 없어. 임태식 그자가 노리는 게 바로 이거야.”


“누나, 제발요! 그놈들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 끊을게.”


하윤은 전화를 끊고 조율기를 메인 콘솔에 연결했다. 그녀의 손끝이 독수리처럼 빠르게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아우라 렌즈의 핵심 소스코드를 극비 클라우드로 전송하기 위한 업로드가 시작되었다. 화면에 푸른색 진행 바가 뜨며 숫자가 올라갔다. [20%... 35%...]


콰앙—!


그때, 지하 복도 전체를 흔드는 육중한 타격음이 들렸다. 하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멸균실 유리벽 너머, 연구소 입구의 철제 도어락이 고출력 전기 충격기의 불꽃과 함께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색 마스크를 쓴 왜소하지만 날렵한 체구의 사내, 김성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끝에는 화약 냄새와 함께 차가운 살기가 배어 있었다.


김성곤은 하윤을 발견하고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커다란 플라스틱 용기를 꺼냈다. 시너였다. 그는 연구실 구석구석, 하윤이 피땀 흘려 모은 고정밀 광학 현미경과 서버 랙 위로 가차 없이 화학 인화 물질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만둬!”


하윤이 비명을 지르며 제지하려 했으나, 김성곤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본 뒤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화르륵—!


순식간에 붉은 화염이 멸균 광학 실험실의 커튼을 타고 천장으로 치솟았다. 화학 물질이 타들어 가며 발생하는 유독가스와 매캐한 검은 연기가 좁은 지하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소방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적들이 침입하기 전 이미 건물 소방 밸브를 차단해 둔 것이 분명했다. 하윤은 소방 설비가 마비되었음을 즉각 인지하고, 불을 끄는 대신 가장 핵심적인 물리적 자산을 사수하기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55%... 60%...]


클라우드 전송 바가 60%에 도달한 순간,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인 서버의 전원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화재의 열기로 인해 지하 전력망이 녹아내린 것이다. 화면이 블랙아웃되며 100% 다운로드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윤은 절망하지 않고 콘솔 하부의 물리 슬롯에서 마이크로 SD 카드가 내장된 핵심 암호화 칩을 거칠게 뽑아냈다. 뜨겁게 달아오른 칩이 그녀의 손바닥을 지졌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윤은 미리 준비해 둔 붉은색 실크 실로 칩을 단단히 묶어 자신의 목에 걸고 셔츠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목걸이 펜던트처럼 닿는 칩의 단단한 촉감이 그녀에게 마지막 생명줄과 같았다.


이어 그녀는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자 기술적 모태인 낡은 친필 연구 노트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가방 속에 쑤셔 넣었다.


검은 연기가 허파를 조여왔다. 기침이 터져 나오고 시야가 흐려졌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태울 듯 다가왔고, 출구는 이미 불길과 무너진 천장 자재로 막혀 있었다.


“정 대표님! 누나! 어디 있어요!”


그때, 화염을 뚫고 젖은 수건으로 입을 막은 김민우가 연구소 안으로 난입했다. 민우의 손에는 휴대용 화학 소화기가 들려 있었다. 민우는 소화기 분말을 사방으로 뿌리며 하윤이 쓰러져 있는 콘솔 앞까지 다가왔다.


“민우야... 콜록! 여긴 왜...”


“말하지 말고 제 팔 잡으세요! 비상구 쪽은 아직 불길이 안 잡혔어요!”


민우는 하윤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그녀의 머리 위로 젖은 재킷을 씌워주었다. 그 순간 천장에서 불붙은 단열재 타일이 민우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민우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오른쪽 포지션 소매가 타들어 가며 가벼운 화상을 입었지만, 민우는 이 악물고 하윤을 비상구 철문 방향으로 강하게 밀쳐냈다.


“누나, 앞만 보고 달려요!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통로예요!”


하윤은 민우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무너지는 화염의 장벽을 뚫고 비상구 문을 밀어젖혔다. 차가운 계단실 공기가 허파로 들어오자 격렬한 기침이 쏟아졌다. 뒤를 돌아보니 아우라 테크 연구소는 이미 거대한 붉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평생의 연구 흔적과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깃든 공간이 잿더미로 변하는 비극적인 참상 속에서, 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목에 걸린 마이크로 SD 카드가 그녀의 가슴뼈를 차갑게 두드리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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