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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가 목격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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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세인트 안과 병원 8층 VIP 병실의 방음문이 불길하게 열리는 순간, 하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한정혜 이사장이 우진의 전담 간병인으로 위장해 배치해 둔 스파이, 장미란이었다. 단정한 간병인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하윤은 본능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푸른 빛의 광학 조율기를 흰색 가운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손끝에 닿는 초소형 EMP 발생기의 차가운 금속 감촉만이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호신용 무기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쿵쾅거렸다.


“전무님, 안약 넣을 시간입니다. 어머, 병실에 외부인이 있으시네요?”


장미란이 미소를 지으며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입꼬리만 올려 만든 가식적인 가면에 불과했다. 그녀의 시선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굳어 있는 하윤의 어깨와 둥근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 너머로 흔들리는 눈동자에 멈추었다.


“아, 장 간병인.”


서준호 원장이 의도적으로 하윤의 앞을 가로막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응대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VIP 병동의 지배자다운 권위가 실려 있었다.


“이분은 최성필 변호사님이 전무님의 각막 미세 손상을 정밀 진단하기 위해 특별히 초빙한 광학 공학 전문가 정하윤 대표입니다. 한 이사장님께도 사전에 구두로 보고된 사안이니, 장 간병인은 불필요한 의문을 가질 필요 없습니다.”


“광학 전문가라뇨?”


장미란은 서준호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으며 우진의 침대 옆 협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테인리스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장미란은 우진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보온병의 뚜껑을 열어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기 시작했다. 펄펄 끓는 물에서 피어오른 하얀 김이 병실의 차가운 공기와 섞였다.


“눈도 보이지 않으시는 전무님께 외부인의 낯선 손길이 닿는 건 위험하잖아요. 제가 직접 곁에서 보살펴 드려야 마음이 놓여서요. 그렇죠, 전무님?”


장미란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일부러 우진의 허벅지 방향으로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컵을 미끄러뜨렸다. 100도에 가까운 끓는 물이 우진의 얇은 환자복 바지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앗, 제 실수예요!”


장미란이 가식적인 비명을 질렀다. 하윤은 순간 비명을 지르며 우진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서준호가 그녀의 가운 깃을 은밀히 잡아당기며 제지했다. 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움직임을 멈췄다. 이것은 장미란이 설계한 가학적인 테스트였다. 우진이 정말로 앞을 보지 못하는지, 혹은 미세한 시각적 회복 징후가 있어 떨어지는 컵을 피하거나 눈을 깜빡이는지 확인하려는 잔인한 덫.


하지만 우진의 반응은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우진은 허공의 한 지점을 응시하는 초점 없는 깊은 검은 동공을 유지한 채,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뜨거운 물이 피부를 파고들며 붉은 화상을 입히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얼굴 근육은 단 한 군데도 떨리지 않았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을 뿐, 그는 완벽한 빙하의 형상을 유지했다. 계모 한정혜의 혹독한 가스라이팅과 감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단련한 ‘흔들림 없는 강철의 포커페이스’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물 온도가 너무 낮군, 장미란 씨.”


우진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그는 고통을 완벽히 초월한 존재처럼 장미란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내가 정말 실명했는지 몸소 테스트해보고 싶었다면, 다음번엔 살이 완전히 녹아내릴 정도로 끓는 물을 가져오도록 해. 이 정도 미온수로는 내 각막을 멀게 한 그 독극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우진의 서늘한 기백에 장미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짜로 감각까지 마비된 완전한 폐인이 된 것인가 하는 확신이 그녀의 뇌리에 자리 잡는 듯했다. 그녀가 당황한 사이,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수간호사 최윤아가 들어섰다.


“장 간병인! 지금 VIP 병실에서 무슨 소란입니까?”


최윤아는 단정한 간호사 유니폼 차림이었지만, 목소리에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바닥의 물 얼룩과 우진의 붉게 달아오른 허벅지를 단숨에 파악하고 장미란의 앞을 매섭게 가로막았다.


“환자 안전 관리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으니, 당장 수반실로 내려가 경위서를 작성하세요. 전무님의 화상 처치는 제가 직접 집도하겠습니다. 당장 나가세요!”


최윤아의 서슬 퍼런 기세와 서준호 원장의 싸늘한 눈빛에 밀린 장미란은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하윤을 한 차례 더 흘겨본 뒤, 이윽고 묵직한 방음문 너머로 사라졌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하윤은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괜찮으세요? 허벅지가 완전히 붉어졌어요. 화상 연고를...”


하윤이 다급하게 우진의 허벅지를 살피려 손을 뻗었으나, 우진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의 손바닥은 뜨거운 열기와 미세한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움켜쥔 힘만큼은 단단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한정혜가 보낸 사냥개들의 흔한 수법입니다.”


우진은 초점 없는 눈으로 하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했다. 그의 턱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장미란이 이사회에 보고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기 전에 렌즈 피팅을 완료하십시오.”


하윤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기묘한 연민을 느꼈다. 대기업의 황태자라는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매 순간 목숨을 위협받는 잔혹한 심연. 그녀는 이성적인 평정심을 되찾으며 가운 주머니에서 푸른 빛의 휴대용 광학 조율기를 꺼냈다.


“서 원장님, 문을 완전히 잠가주세요.”


하윤의 지시에 서준호가 벽면의 마스터 콘솔을 조작해 병실을 완벽한 밀폐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윤은 우진의 침대 머리맡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불과 5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초밀착 상태가 되자, 우진의 코끝으로 하윤의 수수한 비누 향이 스며들었고, 하윤의 귓가에는 우진의 뜨겁고 가쁜 숨소리가 선명하게 박혔다.


“눈을 크게 뜨세요. 미세 전류가 흐를 때 각막이 일시적으로 시릴 수 있습니다.”


하윤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미세 핀셋으로 0.1밀리미터 두께의 ‘아우라 렌즈 프로토타입 v1.0’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진의 오른쪽 안구 표면에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정교하게 밀착시켰다. 렌즈가 각막에 닿는 순간, 렌즈 가장자리의 미세 도파관이 푸른빛을 번쩍이며 우진의 동공 주위로 매끄럽게 흡수되듯 밀착되었다.


동시에 하윤의 조율기 화면에 황금빛 파형이 요동치며 데이터 전송 바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망막 레이아웃 매핑 시작: 동기화율 100% 완료’.


그와 동시에 기적이 일어났다. 우진이 테러를 당하던 그날, 그의 안구에 장착되어 있던 이전 스마트 렌즈의 내부 임시 저장 메모리 세션이 하윤의 마이크로 SD 카드로 실시간 동기화되며 복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렌즈의 자동 녹화 기능이 암전되기 직전의 마지막 3분간을 고화질 캐시 파일로 보존하고 있었다.


“데이터 복구 완료되었습니다.”


하윤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조율기 화면에 팝업된 비디오 파일을 재생했다. 화면에는 테러 당일, VIP 병실에 누워 잠들어 있는 우진의 모습이 흑백의 고화질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정적을 깨고 병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흰색 의사 가운을 입은 정체불명의 남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마스크와 수술용 모자로 철저히 가려져 있었지만, 행동만큼은 거침없고 치밀했다.


남자는 우진의 머리맡 협탁으로 다가가 원래 놓여 있던 안약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초소형 주사기를 이용해 안약 병 내부에 무색무취의 치명적인 화학 물질, ‘테트라독신 디클로라이드’ 독극물을 주입하고 유유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모든 과정이 스마트 렌즈의 이미지 센서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윤은 너무나 추악하고 생생한 범죄 현장의 실체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한정혜 일파를 법적으로 단숨에 파멸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물리적 증거물이었다.


하윤은 범인의 단서를 찾기 위해 영상을 최대 배율로 확대했다. 남자가 안약 병을 내려놓고 손을 거두는 찰나, 흰색 가운 소매 틈새로 그의 두꺼운 손목이 노출되었다.


그리고 그 손목 위로, 불길에 그을린 듯한 톱니바퀴 모양의 기이하고 거친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윤은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휩싸여 신음 섞인 숨을 들이쉬었다. 옆에 서 있던 우진이 그녀의 이상 반응을 눈치채고 나직하게 물었다.


“정 대표, 무엇을 본 겁니까?”


하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화면 속 흉터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이 흉터... 다름 아닌, 지난 며칠간 제 상암동 연구소 주변을 미행하며 저를 감시하던 태성그룹 보안팀장, 임태식의 손목에 새겨진 것과 완벽히 일치해요.”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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